[ 44 ] [43화] 누만티아 공방전 (4)
기원전 223년의 8월이 시작되자 본격적으로 폭염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특히 히스파니아 내륙지역의 여름은 유럽대륙의 어느 곳보다도 무더워서 섭씨 40도가 넘는 살인적인 날씨가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하스드루발은 병사들이 더위를 먹지 않게 하기 위해 한낮에는 요새 건설 작업을 멈추고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병사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그늘에서 쉬도록 조치했다.
그날도 하스드루발은 병사들과 함께 잠시만 야외에 나와도 살타는 냄새가 날 것 같은 뜨거운 햇빛을 피해 투구를 벗고 나무 그늘 밑에서 대(大)자로 누워있었다.
“정말 푹푹 찐다... 여긴 날씨만큼은 유럽이 아니라 그냥 북아프리카야. 오늘 작업은 해 떨어질 때쯤에나 다시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대부분의 카르타고군 병사들이 더위에 늘어져 있을 때 운 나쁘게 경계 근무 시간표가 꼬여 망루 위에서 땀을 비처럼 흘리며 보초를 서던 병사 중 하나가 휴식 중인 전우들을 향해 외쳤다.
“누만티아 방면에서 적으로 추정되는 기병 사백여기 접근 중! 거리 약 6 스타디온! (약 1km)”
하스드루발은 보초의 외침을 듣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청동 투구를 쓴 후 주변의 부관들에게 지시했다.
“모두 위치로! 적 기병이 요새 건설을 방해하러 온다! 발레아레스 투석병들에게 사격 태세를 갖추게 하고 리비아 창병들은 투석병을 엄호하게 하라! 기병은 내가 직접 지휘한다!”
불볕 같은 햇볕을 피해 나무 그늘이나 천막 안에서 쉬고 있던 카르타고군의 병사들을 하스드루발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적 기병들이 건설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비록 적 기병이 소수이긴 했지만 하스드루발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적의 공격에 대비했다.
‘겨우 4백기 정도긴 하지만 한니발 형의 포위망을 뚫고 나온 정예병들이다. 저번처럼 미간에 투창이 날아올지도 모르니까 방심하지 말고 공격에 대비해야겠어.’
아레바키족 기병대와 요새 건설현장을 지키기 위해 카르타고군이 구축한 방어진 사이의 거리가 300m 이내로 좁혀지자 하스드루발이 발레아레스 투석병들에게 명령했다.
“투석병 발사!”
대장의 명령에 발레아레스 투석병 300명이 머리 위로 슬링을 돌리며 달걀만 한 돌을 적에게 던졌다.
- 휙!
아레바키족의 기병대는 카르타고군의 투석병이 슬링을 돌려대는 것을 보고 급히 산개한 덕분에 약 그들 중 약 50기 정도만이 번개처럼 날아온 돌에 가슴이나 머리를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어억!”
하스드루발은 발레아레스 투석병의 공격이 생각보다 아레바키족 기병의 수를 많이 줄이지 못하자 적이 아군 보병을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휘하의 이베리아족 중기병 천 기를 이끌고 출격했다.
“적은 우리의 반도 되지 않는다! 모두 돌격하라!”
이베리아족 기병들은 지난 타구스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이후 하스드루발을 전적으로 존경하고 있었기에 대장의 명령에 우렁찬 함성으로 대답하며 맹렬하게 돌진했다.
“우와아아아아!”
그러자 아레바키족의 기병들이 기가 막힌 솜씨로 방향을 선회해 하스드루발과 이베리아족 중기병들을 지나쳐가면서 남쪽으로 전진했다.
그 모습을 본 하스드루발은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기 시작했다.
‘켈트족 경기병들이 저런 승마술을 보인다고? 그런데 저 쪽으로 방향을 틀면 요새 건설을 방해할 수 없는데. 게다가 자세히 보니 이 자들은 갑옷도 입지 않은 경기병이네. 적어도 기병 돌격을 할 생각은 아예 없었구나.’
하스드루발은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어떻게든 아레바키족 기병들을 이 자리에서 섬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두 적의 뒤를 쫓아라! 한 놈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병사와 말이 모두 사슬갑옷과 마갑을 입은 중기병이 가벼운 차림의 경기병을 따라갈 수는 없었다.
하스드루발은 결국 추격을 포기하고 요새 건설 현장으로 돌아와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듯 남쪽으로 점점 멀어져가는 아레바키족 기병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하스드루발의 등 뒤에서 그를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스드루발 대장님께서도 놓치셨군요. 정말 승마술이 대단한 자들입니다.”
하스드루발이 뒤를 돌아보니 휘하의 기병들을 이끌고 온 기병대장 마하르발이 말 등 위에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마하르발은 하스드루발과 같은 기병대장이었지만 그는 바르카 가문의 가신이었기 때문에 하스드루발에게 존대를 했다.
“나도 동감이네. 그자들 승마술 수준이 마치 누미디아 기병이나 한니발 형 수준이더군. 그나저나 나는 몰라도 한니발 형에게서 도망치다니 대단한 자들이야.”
그 말에 마하르발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사실 한니발 장군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적 유격대의 공격을 막고 계셨습니다. 그때 제가 장군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사이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아레바키족 기병들이 두 패로 나뉘어 공격해오지 뭡니까. 그래서 둘 중 수가 많은 쪽을 먼저 막다 보니 방금 도망간 저자들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하스드루발은 위산이 역류하듯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걱정 때문에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그러면 봉화를 올리든 망루 위에서 깃발을 휘두르든 해서 이쪽으로 적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나에게 알렸어야 할 거 아니야. 그럼 기병들을 미리 출격시켜서 적을 앞뒤에서 공격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단지 목숨을 걸고 누만티아를 빠져나온 적 기병 수백 기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서 걱정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 카르타고군은 일류 장수가 너무 부족해. 바르카 가문의 부관 중 가장 유능한 편인 마하르발도 지시를 받은 임무는 잘 해내지만 스스로 전황을 분석하고 전략을 짜는 능력은 부족하니까 말이야.’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일단 당장 해결할 수 없는 큰 문제는 뒤로 제쳐두고 눈앞의 골치 아픈 일을 처리하기로 했다.
“적 기병대장의 지휘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네. 적 대장의 정체와 무모한 탈출을 감행한 목적이 뭔지 당장 알아봐야겠어. 한니발 형에게는 내가 보고할 테니 자네는 당장 기병을 풀어 주변을 수색해주게.”
* * *
아레바키족의 공주 아우니아는 자신이 지휘하는 기병 수백 기의 선두에 서서 카르타고군의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말을 달렸다.
그녀는 하스드루발과 그가 이끄는 중기병대를 완전히 따돌린 것을 확인하자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저기 보이는 숲이 몸을 숨기기에 적당해 보이는군. 저기서 잠시 숨을 돌리고 전열을 가다듬는다. 척후병을 보내 혹시 적이 매복해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 봐라.”
세 명의 척후병이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야 아우니아는 부하들과 함께 숲속으로 들어섰다.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사이 아우니아는 부관을 시켜 피해 상황을 점검했다.
부관이 병사들과 말의 상태를 확인한 후 아우니아에게 보고했다.
“아우니아 공주님께 보고드립니다. 카르타고군의 포위를 뚫을 때 잃은 기병은 전사자와 적에게 붙잡힌 자를 합쳐 총 152명이고 부상자는 30명입니다.”
그녀는 부관의 보고에 인상을 찌푸리며 안타까워했다.
“예상보다 피해가 크군. 마지막에 발레아레스 투석병들의 돌팔매질은 명성대로 정말 위력적이었어.”
부관이 공주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공주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제 옆에 있던 병사는 투구 위에 돌을 맞았는데도 정신을 잃으면서 결국 말 등에서 떨어지더군요.”
아우니아 공주는 피해 상황을 보고받은 후 자리에서 일어나 부관에게 말했다.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한시바삐 움직여야 한다. 전군 다시 말 등위에 오르도록 해라.”
공주의 명령에 약 300명의 아레바키족 기병들이 다시 말을 달려 남쪽으로 향했다.
아우니아 공주는 말을 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목적지인 카르타고 노바에서 누만티아에 오려면 무조건 통과해야 하는 울창한 숲에 도착했다.
숲에 들어서자마자 아우니아는 모든 병사에게 명령했다.
“모두 말에서 내리고 타고 있던 말을 잡아 최대한 말고기를 많이 챙겨두어라. 그 후 이 숲에 숨어있을 아군의 패잔병들을 찾는다.”
병사들은 공주의 명령에 따라 말에서 내리면서도 불만에 차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레바키족 기병 중에는 군마를 단순한 가축이 아닌 수년간 함께 전장을 누빈 전우로 여기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부관 중 한 명이 아우니아에게 말했다.
“아우니아 공주님. 우리는 아직 적어도 5일은 더 버틸 수 있는 식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굳이 병사들이 아끼는 말을 죽여가면서까지 군량을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아우니아가 부관과 눈을 마주치면서 대답했다.
“우리는 가벼운 차림으로 적의 포위망을 돌파하느라 말에게 먹일 건초나 보리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렇다고 장애물이 없는 초원에서 말에게 풀을 먹이다 보면 우릴 추격해온 적에게 발각될 가능성이 크지.”
아우니아의 말에 동의한 아레바키족 병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말을 잡아 고기를 챙겼다.
그 후 아우니아는 주변의 지리를 잘 아는 병사들을 앞세워 며칠간 숲을 수색해 아레바키족의 패잔병 약 2천 명을 다시 규합할 수 있었다.
누만티아로 돌아가는 길이 카르타고군에게 차단당해 어쩔 수 없이 숲속에 숨어있던 아레바키족 패잔병들은 자기 부족의 공주를 다시 보게 되자 뛸 듯이 기뻐했다.
“아우니아 공주님 만세! 공주님께서 직접 우리를 구하러 오셨다!”
그러나 아우니아는 그런 패잔병들을 격려하지 않았다.
“난 너희들의 목숨을 구하러 온 게 아니다. 오히려 너희가 명예롭게 싸우다 죽을 자리를 마련해 주러 온 것이다.”
그녀의 말에 들떠있던 아레바키족 병사들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너희들이 다른 동료 전사들과 달리 카르타고군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은 전황이 불리해지자마자 가장 먼저 도망쳤기 때문일 것이다. 너희의 전우들이 명예롭게 전사하거나 적에게 생포당할 때 말이다.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자는 어디 한 번 반박 해봐라.”
2천 명의 패잔병 중 누구도 아우니아의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지금 누만티아에도 너희같이 적과 검을 맞대기도 전에 항복하자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얼마 전까지도 카르타고에 항복한 다른 부족들을 조롱하던 자들이다. 지금 우리에게 카르타고와 목숨을 걸고 싸웠던 다른 부족들을 흉볼 자격이 있겠는가? 이대로 전투다운 전투도 안 해보고 적에게 항복해 흰머리가 날 때까지 살다 푹신한 침대에서 죽으면 저승에서 조상님들을 뵐 낯이 있겠나?”
아우니아의 말에 자극을 받은 패잔병들이 다시 전의를 불태우며 큰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했다.
“다시 싸우자!”
“카르타고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아우니아는 아레바키족 전사들에게 다시 한번 투지를 불어넣었다.
“아레바키족의 전사들이여! 인간의 목숨은 백 년을 못가 사라지지만 전사의 명예는 후손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하다! 너의 목숨을 걸고 너 자신과 우리 아레바키족의 명예를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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