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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45화 (45/201)

[ 45 ] [44화] 누만티아 공방전 (5)

마하르발이 적 기병대를 추적하기 위해 떠난 후 보름이 지나자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의 막사로 찾아갔다.

마하르발이 그때까지 카트타고군의 군영에 아무런 소식도 전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스드루발이 초조한 표정으로 한니발에게 말했다.

“이거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거 같아. 내가 남은 기병들을 데리고 마하르발을 찾으러 가볼게.”

그러나 한니발은 그런 동생을 말렸다.

“마하르발은 돌발적인 상황에 대한 임기응변은 조금 약한 편이지만 기본에 충실한 유능한 부관이야. 조금 더 믿고 기다려보자.”

그때 임무에서 돌아온 마하르발이 막사에 들어와 한니발에게 경례했다.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드디어 돌아왔군 마하르발. 마침 하스드루발과 자네 얘기를 하고 있었다네. 적 기병대는 찾았나?”

한니발의 말에 마하르발이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기병대장 마하르발, 한니발 장군님께 보고 드립니다. 도망친 적 기병대를 추적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적들의 흔적은 누만티아 남쪽에 있는 큰 숲에서 끊겼습니다. 타고 가던 말을 죽여 고기를 챙긴 후 숲 속으로 숨어든 것으로 보입니다.”

한니발이 아직 그리 길지 않은 턱수염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우리가 지나왔던 그 울창한 숲 말이군. 그런데 왜 숲속으로 도망갔지? 겨우 병사 삼백 명으로는 그곳을 지날 우리 수송대를 습격할 수도 없을 텐데.”

그러자 마하르발의 얼굴이 거의 울상이 되었다.

“그 기병 삼백 명을 이끄는 지휘관이 우리 군대가 일전에 물리친 아레바키족 유격대의 패잔병을 끌어 모아 카르타고 노바에서 오고 있던 수송대를 습격해 군량을 약탈하고 가져갈 수 없는 보급품은 모두 태워버렸다고 합니다.”

한니발이 마하르발의 보고를 듣고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다시 물었다.

“확실한가?”

“숲 밖으로 도망쳐 나온 아군 수송대 병사 수백 명이 같은 증언을 했습니다. 또 숲속에서 부서진 아군 수레 수십 대의 잔해를 제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하스드루발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한니발에게 말했다.

“이거 정말 큰일 났네. 보급품을 실은 수레가 카르타고 노바에서 이 곳까지 오려면 그 숲에 난 길을 지나는 수밖에 없어. 이제 원래 가져온 군량은 일주일치도 안 남았고 말이야. 한동안은 곧 수확할 순무로 버틸 수 있겠지만 다음 수송대도 약탈당하면 꽤 곤란해지겠어.”

그러자 한니발이 흥분하는 동생을 진정시켰다.

“침착해라 하스드루발. 네 말대로 순무를 수확하면 아직 몇 달은 더 버틸 수 있다. 그나저나 적 지휘관의 능력이 대단하군. 우리 수송대를 습격할 정도면 적어도 병사 2천 명은 필요할 텐데. 숲 속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있던 패잔병을 겨우 며칠사이에 그렇게 많이 모으다니 말이야.”

“켈트어를 조금 할 줄 아는 한 수송대 병사가 적병의 외침을 들었는데 아무래도 적 유격대의 지휘관은 아레바키족의 왕족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하스드루발이 표정이 더욱더 어두워졌다.

“왕족의 권위에 능력까지 있는 적 지휘관이 군량도 많이 확보했군. 이제 아군 수송대만 호위하는 정도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겠어. 놈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아레바키족의 청야전술 때문에 수가 늘어난 켈트족 난민들까지 놈들에게 합류해 보급로를 막고 있는 적의 규모가 더 커질지도 몰라,”

한니발이 동생의 말에 동의했다.

“네 말이 맞아. 지금은 숲속에 숨어있는 아레바키족 놈들을 최대한 빨리 제거하는 게 급선무다. 그래서 말인데 방금 괜찮은 작전이 하나 떠올랐어.”

한니발의 말에 하스드루발의 얼굴에 조금 화색이 돌았다.

“그게 뭔데? 형 머릿속에서 떠오른 작전이면 언제든 환영이지.”

“우린 아레바키족이 불태운 마을에서 식량은 얻지 못했지만, 적 병사들이 미처 가져가지 못한 무기는 제법 많이 챙겼지. 적 유격대의 기습을 막으면서 전리품으로 얻은 무기도 꽤 많고 말이야. 그 사실은 아레바키족도 잘 알고 있어.”

“그렇지. 그런데 그게 왜?”

“그 전리품을 덮개가 달린 수레에 실어 카르타고 노바로 보내는 척하자. 수레에는 전리품 대신 병사들을 가득 실어두었다가 호위병이 적은 줄 알고 기습하는 아레바키족 유격대를 일망타진하는 거지.”

그 말에 하스드루발이 감탄하면서 말했다.

“정말 좋은 작전이야! 숲속에 숨어있는 아레바키족 놈들이 앞으로도 패잔병과 유민을 받아들여 군대의 덩치를 키우려면 당연히 더 많은 무기가 필요하겠지. 그것들을 수송한다보면 놈들은 분명 미끼를 물 수밖에 없을 거야!”

한니발은 기뻐하는 동생의 어깨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이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적 지휘관을 절대로 놓치면 안 된다는 거야. 상황 판단 능력이 뛰어난 장수가 전투를 지휘할 필요가 있어. 그러니 이번 작전은 꼭 네가 맡아줬으면 좋겠다 하스드루발.”

하스드루발은 한니발과 눈을 마주치면서 결연하게 대답했다.

“알았어. 맡겨만 둬. 꼭 적장을 물리치고 하는 김에 카르타고 노바에서 새로 보냈을 수송대도 호위하면서 돌아올게.”

하스드루발은 한니발과의 대화를 마치고 막사를 나오면서 아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는 적장에 대해 생각했다.

‘아야몬테 공방전 이후 이렇게 켈트족에게 애를 먹는 건 처음이군. 아무래도 적장은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으니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 * *

한니발의 막사를 나온 후 하스드루발은 점심을 먹고 바로 바느질을 잘하는 병사들을 모아 수레에 씌우는 덮개를 개조하도록 지시했다.

“최대한 빨리 수레 덮개 70개의 입구부분에 천으로 만든 가림막을 설치해 밖에서 안을 보이지 않게 하고 덮개에 작은 눈구멍을 여러 개 뚫어 안에서 밖을 볼 수 있게 해라.”

전장에서 찢어진 리넨 갑옷이나 천막 따위를 여러 번 수선해 본 병사들은 하스드루발의 명령에 따라 순식간에 덮개 개조작업을 마쳤다.

몇몇 수레는 일부러 수레 안에 비치한 창이 천으로 만든 덮개를 조금 뚫고 나오게 해 그걸 본 적이 무기를 수송 중인 수레로 오인하도록 디테일한 위장을 했다.

위장용 수레가 완성되자 하스드루발은 곧바로 부관들을 불러 작전을 지시했다.

“수레 한 대당 무장한 병사 20명을 태운 후 남쪽 숲으로 출발한다. 숲속에 들어서면 적이 기습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역공을 해 일망타진한다.”

하스드루발은 산악지형에 익숙한 이베리아족 경보병 2,500명을 수송대 호위병으로 삼고 북아프리카 중장보병 1,400명을 수레에 태웠다.

지나가다 그 모습을 본 마하르발이 하스드루발에게 물었다.

“하스드루발 대장님. 수송대 호위병으로 더 많은 병사를 데리고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적은 지금쯤이면 수가 좀 더 늘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마하르발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물론 자네 말대로 하면 위험부담은 줄겠지만, 오히려 아레바키족들이 겁을 먹고 우리를 공격해오지 않을 수도 있네. 겉으로 보이는 병력이 이정도 쯤이어야 적도 의심을 하지 않고 미끼를 물겠지.”

마하르발은 그 말을 듣고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과연... 하스드루발 대장님도 이미 완전히 바르카 가문의 남자로 성장하셨군요. 듣고 보니 하밀카르 총독님이나 한니발 장군님도 아마 같은 조처를 하셨을 것 같습니다.”

하스드루발은 마하르발의 칭찬에 대답 대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자 하스드루발은 애마 페라리를 타고 위장 수송대에 맨 앞에 서서 그들을 데리고 남쪽 숲을 향해 출발했다.

약 이틀 정도를 행군하자 그가 몇 달 전에 형 한니발과 함께 지나왔던 울창한 숲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말을 타고 숲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긴장을 늦추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며 그리스 신전의 대리석 기둥만큼이나 굵은 나무 사이사이에 숨어있을 아레바키족 유격대를 찾기 시작했다.

‘변함없이 갑갑한 숲이로군. 하늘이 무성한 나뭇잎으로 가려져 햇빛도 별로 안 들어오는 게, 마치 야생의 감옥 같은 느낌이야. 살아서 숲 밖으로 나가고 싶으면 이제 정신 바짝 차려야한다.’

숲에 들어온 첫날 야영을 하고 다음 날 아침부터 카르타고군이 다시 행군을 시작한 후 서너 시간이 흐르자 드디어 아레바키족 유격대가 미끼를 물었다.

행렬의 맨 앞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던 하스드루발의 눈에 풀숲에 숨어 카르타고군의 행렬에 활을 겨누고 있는 아레바키족 병사 한 명이 눈에 띈 것이다.

하스드루발은 말에서 내려오며 즉시 우렁찬 목소리로 고함을 질러 부하들에게 위험을 알렸다.

“오른쪽! 화살! 방패!”

대장의 경고를 듣고 수레 안팎의 모든 카르타고군 병사들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몸을 최대한 웅크리면서 한 손에 들고 있던 방패로 몸을 가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타고군의 머리 위로 수백 개의 화살이 쏟아지면서 무성한 나뭇잎에 가려 안 그래도 희미한 햇빛을 가렸다.

- 피유웅!

비처럼 쏟아진 화살이 카르타고 병사들의 방패에 무수히 박혔지만, 화살에 맞고 쓰러진 자는 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화살세례가 멈추자 이어서 카르타고군이 따라가고 있던 좁은 숲길의 오른쪽 풀숲과 나무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아레바키족 병사 약 2,400명이 괴성을 지르며 카르타고군 행렬의 옆구리를 공격해왔다.

“우와와아아아아!”

그러자 하스드루발이 방패에 박힌 화살을 대여섯 개를 검을 휘둘러 한 번에 잘라내면서 수레 속에서 대기 중인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지금이다! 투창을 던져라!”

하스드루발의 명령이 떨어지자 수레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북아프리카 중장보병들이 천으로 만들어진 덮개를 단칼에 찢고 모습을 드러내며 수레위에서 일제히 투창을 던졌다.

맹렬히 돌진하던 아레바키족 병사들은 갑작스럽게 날아오는 투창을 막거나 피할 틈도 없이 가슴과 배에 재블린이 박힌 채 바닥에 쓰러졌다.

“으악!”

아군 수백 명이 갑자기 날아오는 창을 맞고 쓰러져가는 것을 보고 전속력으로 달려오던 아레바키족 병사들의 발이 꼬이기 시작했다.

하스드루발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적을 공격했다..

“북아프리카 중장보병은 수레에서 내려와 적을 정면에서 밀어붙이고 이베리아족 경보병은 측면과 배후로 돌아가 적을 포위해라!”

그는 북아프리카 중장보병의 선두에서 함성을 지르며 적을 향해 돌진했다.

“우와아아아아!”

아레바키족 병사들은 대부분 갑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중무장 보병보다 발이 빨랐지만, 갑자기 수레 속에서 나타난 많은 적병 때문에 당황한 나머지 북아프리카 중장보병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다.

“으악! 저리 가! 저리 가라고!”

하스드루발은 공포 때문에 이성을 잃고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며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아레바키족 병사의 턱을 방패로 세차게 올려 쳤다.

“끄아악!”

아레바키족 병사는 입에서 부러진 이 몇 개를 쏟아내면서 정신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북아프리카 보병이 적을 전방에서 압박하는 사이 발 빠르고 수가 많은 이베리아족 경보병이 적의 측면과 후방을 장악하면서 아레바키족 유격대는 완전히 퇴로가 막혀버렸다.

도망칠 곳이 없어진 아레바키족 중에는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자들이 더러 있긴 했지만 용맹함으로 히스파니아 전역에 이름을 떨친 부족답게 상처 입은 야수처럼 극렬하게 저항하는 자들이 더 많았다.

하스드루발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적을 하나씩 쓰러뜨리며 적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 때 그의 눈에 투박한 외날검 팔카타를 든 다른 병사와는 달리 칼자루 끝에 화려한 보석이 박힌 곧은 장검으로 아군 병사의 가슴팍을 베고 있는 적장이 눈에 들어왔다.

‘제식무기인 팔카타를 들지 않고 혼자 갈리아에서나 쓸법한 긴 검을 들고 있네. 저자가 아레바키족의 지휘관인 모양이군!’

하스드루발은 장검을 든 적장과의 거리를 단숨에 좁혀 그의 왼쪽 어깨를 노리고 팔카타를 위에서 아래로 세차게 내리찍었다.

그러나 아레바키족 장수도 능숙하게 왼손에 들고 있던 작은 나무방패로 하스드루발의 검을 쳐냈다.

- 콰각!

경보병용인 가벼운 나무방패가 우츠 강철로 만든 팔카타의 묵직한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반으로 쪼개졌지만 적장은 재빨리 뒤로 폴짝 뛰며 하스드루발의 칼날을 피했다.

그러자 하스드루발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소리치고 말았다.

“세상에! 적장이 여자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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