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 [45화] 누만티아 공방전 (6)
“세상에! 적장이 여자였어?”
하스드루발은 눈앞의 적장 아우니아 공주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고 말았다.
켈트족은 여자도 전장에 나서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켈티베리안 군대의 지휘관이 여자인 경우는 그리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현대의 여자 육상선수처럼 호리호리한 체형에 전신에 탄탄한 근육이 잡혀있고 불꽃처럼 붉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이 매력적인 미녀였다.
‘꼭 영화에서 봤었던 원X우먼 같네.’
아우니아 공주도 하스드루발이 입고 있는 화려한 그리스식 청동 흉갑을 보고 그가 카르타고군의 지휘관임을 알아챘다.
그녀는 그를 어떻게든 처치하기로 다짐하며 이미 반 토막이 나 못쓰게 된 방패를 하스드루발에게 힘껏 던졌다.
하스드루발이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올려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반쪽짜리 방패를 막으면서 자세가 무너지자 아우니아 공주는 그 틈을 타 그의 낭심을 노리고 검을 찔러왔다.
“안 돼!”
하스드루발은 번개같이 빠르게 하반신을 찔러오는 검을 피할 틈이 없어 그대로 몸의 무게중심을 낮추어 입고 있는 청동흉갑으로 아우니아의 검을 받아냈다.
- 챙!
회심의 찌르기가 간발의 차이로 두꺼운 청동흉갑에 막혀 금속음을 내면서 튕겨나자 하스드루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우니아 공주는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차며 다시 굶주린 표범처럼 사납게 하스드루발에게 덤벼들었다.
이번 생에서 가장 큰 위기를 모면한 하스드루발은 방패를 턱 밑까지 들어 올려 상체를 보호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노리려 했다.
그러나 아우니아 공주가 뛰어난 검술을 뽐내며 방패로 가리기 힘든 눈과 하체를 집요하게 노려대자 하스드루발은 그녀의 공격을 막거나 피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었다.
‘이거 정말 여자 맞아? 검이 너무 빨라서 막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친데? 이대로는 언젠가 당하고 말겠어. 큰맘 먹고 도박을 해보는 수밖에.’
하스드루발은 검을 크게 휘둘러 아우니아가 잠시 뒤로 물러나게 한 후 조금이라도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방패를 버리고 투구를 벗어 던졌다.
아우니아 공주는 하스드루발의 상체가 훤히 드러나자 그의 왼팔을 노리고 장검을 횡으로 힘껏 휘둘렀다.
‘다행히 예상대로 움직여 주는군!’
하스드루발도 온몸의 체중을 실어 팔카타를 세차게 휘둘러 아우니아 공주가 휘두른 장검의 옆면을 도끼로 장작을 패듯 힘껏 아래에서 위로 내리찍었다.
- 챙강!
우츠 강철로 만든 짧고 두꺼운 검 팔카타가 길지만 검신이 상대적으로 가는 갈리아식 장검을 단칼에 두 동강 내버렸다.
아우니아 공주는 하스드루발의 일격에 검이 부러져 당황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리후리기로 아우니아 공주를 넘어뜨린 후 그녀의 상체 위에 올라타 목에 검을 가져다 대며 제압했다.
아우니아 공주가 바닥에 쓰러진 채 부러진 검을 놓고 손바닥을 보이며 항복하자 하스드루발이 아직 서툰 이베리아어로 외쳤다.
“적장을 사로잡았다!”
하스드루발의 외침을 들은 카르타고군의 병사들은 사기가 올라 더 맹렬히 저항하는 적을 공격했고 지휘관이 붙잡힌 모습을 본 아레바키족 병사들은 하나둘 무기를 버리고 카르타고군에 항복했다.
아우니아 공주는 이베리아족 병사들에게 포박당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켈트어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분하다...”
하스드루발은 아직 켈트어를 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켈트어를 할 줄 아는 부관을 불러 자신의 말을 아우니아 공주에게 전하게 했다.
“켈트족은 여자들도 전장에서 싸운다는 말은 자주 들어왔지만 이정도로 대단한 여전사를 만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소. 군영에 도착하면 명예로운 전사에게 걸맞은 대우를 할 것을 약속하오.”
* * *
한편 하스드루발이 아군 수송대를 습격해대는 아레바키족 유격대를 토벌하러 떠난 지 이틀이 지났을 때 한니발이 지휘하는 카르타고군은 드디어 카르타고 노바에서 가져온 군량이 바닥나고 말았다.
한니발이 적을 추적하기 위해 떠나는 하스드루발에게 남은 군량의 대부분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니발은 즉시 병사들에게 하스드루발이 일군 밭에서 순무를 수확해 군량으로 삼도록 했다.
그렇게 한니발 휘하의 카르타고군이 순무만으로 끼니를 때우게 된지 한 달이 되던 달 이베리아족 기병 다섯 명이 기병대장 마하르발의 막사에 찾아와 푸념을 늘어놓았다.
“마하르발 대장님! 이제 더는 못 견디겠습니다!”
테이블에 앞에 앉아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던 마하르발이 부하들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뭘 못 견디겠다는 거냐?”
그러자 이베리아족 기병 중 가장 고참인 병사가 마하르발에게 대답했다.
“그저께 식단은 순무 찜이었습니다. 어제 식단은 올리브유에 튀긴 순무였고요. 그런데 오늘 식단은 순무를 갈아서 만든 빵입니다! 이렇게 매일 말 먹이인 순무만 먹다가는 기병이 아니라 군마가 되어버릴 것 같습니다! 이럴 때는 장교들의 식자재도 병사들에게 좀 나눠주실 수는 없습니까?”
마하르발은 골치 아픈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을 했다.
“한니발 장군님의 예상대로군.”
한니발은 대부분 귀족 출신으로 구성된 기병들이 가장 먼저 맛없는 식사에 불만을 터뜨릴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그럴 경우의 대책을 마하르발에게 미리 일러두었다.
마하르발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부하들을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따라 나와라. 너희들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
이베리아족 기병들은 마하르발을 따라 막사 밖으로 나왔다.
마하르발은 군영에 지은 망루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여전히 툴툴거리고 있는 부하들에게 말했다.
“저 망루 위를 봐라.”
이베리아족 기병들이 고개를 들어 망루 위를 올려다보자 그들의 눈에 망루 위에 서서 생 순무를 먹고 있는 한니발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니? 한니발 장군님께서 왜 저런 곳에 계시는 거지?”
마하르발이 엄한 목소리로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부하들을 꾸짖었다.
“한니발 장군님께서는 군량과 연료를 아끼시려고 보름 전부터 아침 점심으로 생 순무 한 개로만 끼니를 해결하고 계신다. 게다가 장군님께서는 병사들이 조금이라도 더 쉬게 하시기 위해서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저렇게 초병대신 보초를 서시면서 식사를 하고 계시지. 그런데 네 놈들은 전쟁터에서 수염도 안 난 어린애처럼 밥투정을 부리나?”
이베리아족 기병들은 마하르발의 꾸짖음에 얼굴이 잘 익은 대추야자처럼 빨개지면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하르발은 그런 부하들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내 너희들의 소원대로 장군님과 같은 식사를 하게 해 주마. 하스드루발 대장님께서 수송대와 함께 우리 군영으로 돌아오실 때까지 매일 생 순무 두 개만 먹도록 해라.”
이베리아족 기병들은 안 그래도 맛없는 순무를 익혀 먹을 수도 없다는 말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솔선수범하는 한니발의 모습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껴 순순히 마하르발의 명령에 따랐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마하르발이 이베리아족 기병들을 꾸짖는 동안 한니발은 손에 들고 있던 순무를 간신히 다 먹었다.
그는 오늘 점심의 감상을 깊은 한숨으로 표현했다.
“하아....”
한니발은 고개를 돌려 완만한 언덕과 숲이 드문드문 펼쳐진 남쪽의 구릉지대를 바라보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빨리 돌아와라 하스드루발. 네 말대로 이거 아무리 배가 고파도 정말 끔찍하게 맛없구나. 내가 언제까지 주린 배를 움켜쥐고 병사들 앞에서 센 척을 해야겠니.”
한니발이 혼잣말을 마치자마자 그의 눈에 한 무리의 군대가 지평선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꽤 먼 거리였지만 한니발은 무리의 선두에 선 동생 하스드루발의 덩치 큰 애마 페라리를 알아보았다.
하스드루발의 뒤에는 아군 수송대로 보이는 수레가 줄을 지어 한니발의 군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니발은 자신의 결혼식에서도 지은 적 없는 밝은 얼굴로 망루 아래의 카르타고군 병사들에게 외쳤다.
“기병대장 하스드루발의 별동대가 수송대와 함께 돌아왔다! 모두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별동대를 환영할 준비를 해라!”
한니발의 외침을 들은 병사들이 거대한 폭포 소리 같은 우렁찬 함성을 질러댔다.
“우와아아아아! 드디어 카르타고 노바에서 보급품이 도착했다!”
하나같이 기뻐하는 카르타고군 병사 6만 명 중에서도 방금 기병대장 마하르발에게 혼난 이베리아족 기병 다섯 명은 특히 기뻐 날뛰며 소리를 질러댔다.
“생 순무 안 먹어도 된다! 드디어 오랜만에 밀가루로 만든 빵과 고기를 먹겠구나! 하스드루발 대장님 만세!!”
* * *
한편 아레바키족의 왕 타르반투는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의 집무실 안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카르타고군의 보급망을 끊으러 간 장녀 아우니아 공주의 안위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제 누만티아의 성벽 위에 설치된 망루 위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에게 카르타고군의 군영에 수레 수백 대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는 아우니아 공주의 작전이 실패했고 그녀가 카르타고군의 손에 죽었거나 포로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었다.
“제발... 제발 무사해다오 아우니아...”
아우니아 공주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맹해 타르반투 왕이 일찌감치 후계자로 점 찍어두었을 정도로 특히 아끼는 자식이었다.
그렇게 타르반투 왕이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그의 부관이 노크를 하고 집무실에 들어와 그에게 보고했다.
“위대하신 타르반투 왕께 보고 드립니다. 카르타고군의 사절이 방금 이 부러진 검과 서신을 가지고 왔습니다.”
부관은 타르반투 왕에게 부러진 장검 한 자루와 서신을 내밀었다.
타르반투 왕은 검 자루에 박혀있는 호두만 한 보석을 보고 그것이 아우니아 공주의 검임을 알아챘다.
“내 딸이 카르타고 놈들에게 붙잡혔구나...”
타르반투 왕은 부관의 손에서 급히 서신을 낚아채 펼쳐보았다.
서신에는 히스파니아의 켈트족들이 사용하는 이베리아 문자로 장황한 글이 적혀 있었는데 그 서신의 핵심적인 내용은 단 세 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다.
‘검의 주인과 그가 이끌던 병사들은 우리의 포로가 되었다. 한니발 장군님께서는 적당한 몸값을 받고 포로를 석방하고자 하신다. 협상을 원한다면 사절을 카르타고군의 군영으로 보내라.’
타르반투 왕은 서신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고함을 질렀다.
“빌어먹을 카르타고 놈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타르반투 왕은 적이 자신이 기거하는 누만티아를 포위해 보급을 끊은 상황에서는 절대로 적에게 몸값을 치르고 아군 포로를 성벽 안으로 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적에게 지불한 몸값은 그대로 적 병사들이 쓸 창과 화살을 만들 군자금이 될 것이고 전쟁포로 중에는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부상병도 많을 것인데 그들이 누만티아의 군량을 먹어 없애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타르반투 왕은 한참을 고민한 끝에 부관에게 명령했다.
“어리석은 신하놈들을 사절로 보낼까보냐! 카르타고 놈들에게 내가 직접 협상을 하러 갈 거라고 전해라! 절대로 놈들의 의도대로 끌려 다니지는 않을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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