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 [46화] 누만티아 공방전 (7)
한니발은 기병대장 마하르발과 함께 지휘관 막사에 곧 도착할 타르반투 왕과 회담을 나눌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막사 한가운데 놓인 책상 앞에 앉아 마하르발에게 물었다.
“준비는 다 됐겠지?”
“네. 장군님.”
“하스드루발이 내가 타르반투 왕과 만나는 걸 모르는 게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하스드루발 대장이 군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목책을 세우고 있은 것을 이미 확인했습니다.”
“좋아. 그럼 이제 그 늙은이를 기다릴 일만 남았군.”
한니발이 잠시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쉬려 할 때 마하르발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니발 장군님, 그런데 이렇게 번거로운 준비를 하실 바에는 그냥 타르반투 왕을 여기서 붙잡아 버리시는 게 간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한니발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마하르발, 아레바키족은 여러 소부족의 연합체라네. 우리가 타르반투 왕과 그의 후계자인 아우니아 공주를 둘 다 붙잡아두면 다른 소부족의 부족장이 정권을 잡아 아레바키족의 왕이 될 가능성이 크지. 만에 하나 머리 나쁜 강경파 부족장이 새 왕이 돼서 마지막 한 명이 죽을 때까지 결사항전을 벌이려 들면 골치 아프지 않겠나?”
한니발의 말에 마하르발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이 약 30분 정도를 기다리자 타르반투 왕이 병사의 안내를 받으며 지휘관 막사에 들어섰다.
한니발이 자리에서 일어나 밝은 얼굴로 타르반투 왕을 맞이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타르반투 왕이시여. 제가 이 부대의 총사령관인 하밀카르의 아들 한니발입니다.”
타르반투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맞이하는 한니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켈트족 기준에서도 큰 한니발의 키와 마치 그리스 조각상 같은 단단한 근육, 그리고 수려한 이목구비도 감추지 못하는 날카로운 눈빛에 조금 주눅이 들었지만 애써 겉으로는 티를 내지는 않았다.
“켈트어를 참 능숙하게 하시는군요. 반갑소. 아레바키족의 왕 타르반투요. 그나저나 50년 넘게 살아오면서 게르만인도 아니고 페니키아인을 올려다볼 날이 올 줄은 미처 몰랐소. 우리가 이렇게 만나지만 않았다면 사윗감으로 삼고 싶은데 참 안타깝소.”
타르반투 왕의 말에 한니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자리에 앉으셔서 말씀을 나누시죠.”
타르반투 왕은 한니발의 말에 따라 자리에 앉자마자 정색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포로는 전부 몇 명이나 되오?”
한니발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총원 513명입니다.”
“포로 한 명당 건강한 노예 두 명 가격을 은으로 치르겠소. 이미 후한 가격을 제시했으니 흥정은 하지 않겠소.”
타르반투 왕의 말대로 그가 제안한 포로의 몸값은 당시 기준으로 그럭저럭 후한 편이었다.
그는 일단 협상의 주도권을 잡기위해 흥정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하루빨리 딸을 구하기 위해 한니발이 포로의 몸값을 좀 더 올려 부르더라도 어느 정도 응할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한니발이 원하는 것은 재물이 아니었다.
“과연 관대한 제안이십니다. 하지만 저희가 받고 싶은 건 은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을 원한다는 말이오?”
한니발은 담담한목소리로 타르반투 왕에게 말했다.
“일전에 우리와 동맹을 맺은 다른 부족들과 같은 조건으로 바르카 가문과 동맹을 맺으시지요. 그게 싫으시면 모든 누만티아 성벽안의 모든 사람이 각자 입을 옷 두 벌만 가지고 도시를 떠나 주셔야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기꺼이 아우니아 공주님과 다른 포로들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타르반투 왕은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헛소리를 지껄이는군! 난 아비이기 전에 대 아레바키 부족의 왕이다! 아무리 자식의 목숨이 소중해도 부족의 안위와 명예보다 중요하겠느냐! 더 들어볼 것도 없군! 협상은 결렬이다! 포로들도 부족의 명예를 위해 목숨 걸고 전장에 섰던 자들이니 자신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겠지!”
그러자 한니발은 양손을 모아 깍지를 끼면서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참 유감입니다.”
그 때 한니발이 말을 마치는 순간 막사 밖에서 날카로운 젊은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꺄아아아악! 이 짐승 같은 놈들!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꺄아아아악!”
타르반투 왕은 켈트어로 누군가에게 반항하며 애처롭게 비명을 지르는 여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고 고함을 질렀다.
“이 더러운 자식! 감히 내 딸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아우니아의 몸에서 털끝 하나만 상해봐라! 그랬다가는 네놈의 머리를 잘라서 삼나무 기름을 발라주마!”
그러자 한니발과 타르반투 왕의 호위병들도 일제히 검을 뽑아들어 자신들의 주군을 지키고자 했다.
좁은 막사 안에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한니발이 온화한 목소리로 타르반투 왕을 달랬다.
“진정하십시오. 설마 제가 대부족의 공주님께 그런 무례를 범할 리가 있겠습니까? 저와 함께 밖으로 나가시지요. 오해를 풀어드리겠습니다.”
한니발은 타르반투 왕을 지휘관 막사 뒤편으로 데리고 나가자 허름한 차림의 켈트족 여자 한 명이 포박당한 채 리비아인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한니발이 말했다.
“잘 아시겠지만 이 주변에는 마을을 잃고 떠도는 난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가끔 굶주림에 이성을 잃고 야밤에 우리 군영에 숨어들어 식량을 훔치려는 자들도 적지 않아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닙니다. 그런 자들은 보시다시피 군법으로 엄히 다스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타르반투 왕이 얼빠진 얼굴로 한니발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그럼 우리 아우니아는 여전히 무사한가?”
한니발은 오른팔을 뻗어 손가락으로 한 막사 앞을 가리켰다.
“저 쪽을 보시지요.”
타르반투 왕은 자기도 모르게 한니발의 손끝이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눈에 먼발치에 서 있는 아우니아 공주가 눈에 들어왔다.
아우니아 공주는 아버지가 이곳에 와있는 줄도 모르고 중무장한 카르타고군 병사 네 명의 감시를 받으며 바람을 쐬고 있었다.
“아아.... 내 딸이 무사했구나... 만신전의 모든 신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타르반투 왕은 안심한 나머지 긴장이 풀려 눈물을 글썽이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때 그의 머리 위에서 한니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따님이 참 그리우셨나봅니다.”
타르반투 왕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한니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타르반투 왕을 내려다보는 한니발의 눈빛에는 자만이나 조롱의 기색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딸을 그리워하는 아비에 대한 연민도 없었다.
한니발은 그저 먹잇감의 생태를 관찰하는 포식자의 섬뜩한 눈빛으로 타르반투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제야 타르반투 왕은 자신이 한니발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일부러라도 역정을 내야 마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타루반투 왕은 도저히 속을 읽을 수 없는 한니발의 깊고 차가운 눈빛을 보자마자 뱀과 눈이 마주친 쥐처럼 온몸이 굳어버리는 바람에 화를 내기에 적당한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잠시 그 자리에 굳어 있다가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최소한의 체통을 지켰다.
“나도 모르게 주책을 떨었군. 협상이 결렬됐으니 난 이만 돌아가겠소.”
그 말을 마지막으로 타르반투 왕은 자신의 호위병들과 함께 말을 타고 카르타고군의 군영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타르반투 왕은 카르타고군의 군영이 주먹만해 보일정도로 멀어지자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며 한탄했다.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속내를 밑바닥까지 다 내보여주고 말았구나! 저 괴물 같은 놈에게 우리 부족과 내 딸을 구해낼 방법이 도저히 보이질 않으니 이를 어쩌면 좋다는 말인가!”
한편 한니발은 타르반투 왕이 자신의 막사에서 충분히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리비아인 병사들에게 끌려가던 켈트족 여인에게 말했다.
“아우니아 공주와 목소리가 꽤 비슷하군. 제법 괜찮은 연기였다. 약속대로 식량을 나눠주도록 하마.”
한니발은 병사들을 시켜 여인에게 식량을 준 후 마하르발과 함께 다시 자신의 막사로 들어갔다.
한니발이 막사 한가운데 놓인 집무용 책상 앞에 앉자 마하르발이 한니발에게 말했다.
“협정이 체결되지 않아서 유감입니다. 한니발 장군님.”
그러나 한니발의 대답은 마하르발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나? 난 저 완고한 늙은이가 오늘 바로 우리에게 항복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네. 오늘의 수확은 따로 있지.”
“수확이 있다니요? 아레바키족은 여전히 험한 요새에 틀어박혀 꿈쩍도 하지 않을 거고 포로들은 우리의 군량을 계속 축낼 것입니다. 딱히 이번 회담에서 얻으신 것은 없지 않습니까?”
한니발이 왼손으로 턱을 괴면서 마하르발에게 대답했다.
“타르반투 왕이 자기 딸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를 확인 하지 않았나. 게다가 그 늙은이에게 아직 딸을 살릴 수도 있다는 희망과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을 함께 심어줬어. 그건 생각보다 큰 수확이라네.”
마하르발은 의아한 얼굴로 한니발에게 말했다.
“한니발 장군님. 후계자를 아끼지 않는 왕은 없습니다.”
“자네 말이 맞네. 그렇지만 말 그대로 자신의 나라나 부족을 자기가 죽은 후에도 유지해나갈 유능한 관리자로서 아끼는 것과 진짜 자식으로서 사랑하는 건 다르지. 안 그런가?”
마하르발은 그제서야 한니발의 말을 이해했다.
“이제야 좀 말씀하신 뜻을 알겠습니다. 그저 후계자로만 여기는 경우에는 아우니아 공주가 죽어도 다른 후보자를 내세우면 그만이겠군요. 하지만 타르반투 왕은 결국 자기 딸보다는 부족의 명예를 택하지 않았습니까?”
마하르발의 말에 한니발은 고개를 저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딸을 그저 유능한 후계자로만 여겼다면 아우니아 공주가 무사한 모습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지언정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눈물을 글썽이지는 않았을 테지. 타르반투 왕은 부정(父情)과 왕으로서의 책임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후자를 선택한 걸세. 지금 당장은 말이야.”
“그럼 나중에는 마음을 바꿀 수도 있을 거라는 말씀입니까?”
마하르발의 말에 한니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네. 이제 아레바키족이 항복하면 우리 바르카 가문이 관대한 처우를 내릴 거라는 소문이 누만티아의 성벽 안에 퍼뜨릴 생각이네. 그러면 아레바키족 사이에서 항복하자는 여론이 점점 힘을 얻겠지. 그때 조만간 도착할 거대한 투석기로 겁을 좀 주면 타르반투 왕도 딸을 구하는 길이 부족 전체를 위한 길이라고 믿고 싶어지지 않겠나? 사람은 결국 믿고 싶은 걸 믿게 되는 법이라네 마하르발.”
“하지만 어떻게 누만티아에 그런 소문을 퍼뜨릴 생각이십니까? 경계가 삼엄해서 공작원을 보내기는 어려우실 겁니다.”
한니발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포로수용소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우니아 공주를 제외한 아레바키족 포로들을 전부 풀어주게. 몸값은 받을 필요 없네. 그동안 우리 병사들보다 좋은 밥을 먹이고 깨끗한 옷을 입혔으니 그자들도 슬슬 밥값을 할 때가 됐어. 풀어주기 전에 잘 다독이면 포로들은 누만티아로 돌아가 자발적으로 바르카 가문의 관대함을 동포들에게 알릴 걸세.”
마하르발은 한니발의 의도를 알고 나자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전 그동안 장군님께서 그저 좋은 값을 받고 노예로 파시려고 포로들을 잘 먹이시는 줄 알았습니다. 장군님을 모신지 벌써 5년 차지만 아직도 장군님의 속을 전혀 읽을 수 없군요.”
한니발은 마하르발의 말에 대답 대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마하르발은 문득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하스드루발 대장에게 오늘 회담을 숨기신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평소 동생 분을 신뢰하고 계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제가 잘못 짚은 것입니까?”
한니발은 하스드루발이 짓고 있는 요새 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하스드루발은 어린 나이에 국내파의 비열한 음모를 막은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런 치졸한 모략을 꾸미는 건 아주 혐오한다네. 내가 오늘 한 일은 자식을 인질로 잡고 불쌍한 노인네를 협박한 것뿐이지 않은가. 아마 미리 말했으면 그 녀석은 어떻게든 날 말리려고 했겠지.”
한니발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내 동생 하스드루발은 좀 까불거리는 구석은 있지만 총명하고 올곧은 녀석일세. 그 녀석은 분명 아버지처럼 장차 우리 카르타고의 앞날을 비출 한 줄기의 빛이 될 걸세. 하지만 빛은 어두운 곳에서 가장 잘 보이는 법 아니겠나? 난 로마를 멸망시키고 카르타고를 지킬 수만 있다면 어떤 업보라도 짊어질 생각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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