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 [47화] 누만티아 공방전 (8)
기원전 223년의 가을도 어느덧 중반에 접어들었지만 아레바키족은 여전히 누만티아의 성문을 굳게 닫고 농성을 하고 있었다.
한니발이 아우니아 공주를 제외한 아레바키족의 포로들을 대가 없이 풀어준 뒤로는 누만티아의 성벽 안에서 바르카 가문에 항복을 하자는 여론이 점점 힘을 얻고 있었지만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그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
때문에 한니발은 포위망을 더 강화하고 슬슬 요새를 공격해 적의 투지를 완전히 꺾기로 했다.
한니발은 하스드루발을 불러 누만티아를 포위하기 위한 요새 건설 작업의 진척상황을 물었다.
“하스드루발. 누만티아 포위를 위한 공사는 완료됐어?”
“평지와 언덕은 모두 목책과 참호를 둘러서 포위했어. 늪지에는 목책을 세울 수 없어서 칼날을 박은 통나무를 띄워서 쉽게 적이 건너올 수 없게 했고 말이야. 이제 트레뷰셋만 도착하면 완벽하겠는데.”
“어제 카르타고 노바에서 파발이 도착했다. 며칠 후면 이곳에 도착할 예정이라더군.”
한니발의 말에 하스드루발의 표정이 태어나서 처음 생일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밝아졌다.
“드디어 오는구나! 이번 겨울은 꼼짝없이 군영에서 나는 줄 알았는데 잘하면 가을이 끝나기 전에 카르타고 노바로 돌아갈 수 있겠네! 그럼 슬슬 탄환을 준비해야겠다.”
한니발의 막사를 나온 하스드루발은 바로 병사들을 불러 모은 후 입을 열었다.
“너희도 알다시피 아레바키족 놈들이 입을 꽉 다문 조개처럼 누만티아의 성문을 닫고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은 지 벌써 넉 달이 넘었다. 이대로 놈들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마냥 기다리면서 천막에서 겨울을 나고 싶나? 아니면 저 산 위의 요새를 두들겨 깨고 겨울이 오기 전에 집에 돌아가서 휴가를 보내고 싶나? 부인이 해준 따듯한 밥을 먹으면서 천막 대신 침대에서 자고 싶지 않은가?”
고대에는 겨울이 시작되면 전쟁을 중단하고 다음 해 봄이 되면 다시 개전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대부분 늦어도 가을이 끝나기 전에는 집에 돌아가고 싶었던 참이었다.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습니다!”
하스드루발은 병사들이 기대했던 호응을 보이자 그제야 작업을 지시했다.
“이제 며칠 후면 카르타고 노바에서 보낸 거대한 투석기가 이곳에 도착한다! 모두 무게가 4달란트(약 128kg)가 조금 넘는 돌덩이를 군영에 모으도록 해라! 아레바키족에게 돌벼락 맛을 보여주고 찬바람이 불기 전에 집에 가는 거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앞다투어 군영 주변의 산지와 구릉 지대를 뒤지며 돌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하스드루발은 그 모습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고대의 군인들도 ‘휴가’라는 단어를 들으면 눈빛이 달라지는구나. 앞으로도 종종 써먹어야겠다.”
하스드루발이 병사들에게 적당한 자극을 준 덕분에 닷새가 지나자 카르타고군의 군영에 커다란 돌덩이들이 작은 언덕으로 보일 정도로 많이 쌓였다.
한니발은 문자 그대로 산처럼 쌓인 돌무더기를 보며 말했다.
“이정도 양이면 누만티아 성벽을 모두 무너뜨릴 수도 있겠는데. 하스드루발. 병사들을 너무 혹사시킨 아니냐?”
한니발의 말에 하스드루발이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난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말했는데도 비번인 병사들도 미친 듯이 돌을 나르더라고. 이거 트레뷰셋이 도착했는데도 아레바키족이 항복 안 하면 병사들이 날 잡아먹으려 들겠는데.”
그 때 망루위의 초병이 군영을 향해 소리쳤다.
“남쪽 10 스타디온 방면(약 1.8km)! 아군 수송대로 보이는 무리가 남문 쪽으로 접근 중!”
초병의 외침을 들은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해맑은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수송대가 군영에 다다르자 먼 길을 온 부관과 병사들을 치하하기 위해 직접 마중을 나갔다.
그때 두 사람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가 카르타고군의 군영에 울려 퍼졌다.
“하스드루발! 내가 왔다!”
어린아이처럼 쾌활한 노인의 목소리에 한니발은 얼굴을 찡그리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고 하스드루발은 놀란 표정으로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 아르키메데스 선생님? 이 위험한 곳에 왜 오셨어요! 여긴 전장이라고요!”
아르키메데스는 말이 끄는 수레에서 폴짝 뛰어내린 후 하스드루발의 앞까지 걸어온 다음 말했다.
“왜 왔긴! 내 새로운 발명품을 실험해 보려고 왔지!”
“네? 전에 처음 대형 트레뷰셋 발사실험을 할 때는 아예 와보시지도 않았잖아요? 어차피 잘 작동할 거라고 하시면서요.”
하스드루발의 말에 아르키메데스는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을 빛내면서 대답했다.
“트레뷰셋은 시라쿠사에 있을 때도 비슷한 걸 만들어 본 적이 있어서 그랬던 거지. 이번에 내가 실험해 보고 싶은 건 트레뷰셋용 신형 탄환이야! 이리 와봐! 보여줄 테니까!”
그 말에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궁금한 마음이 들어 아르키메데스의 뒤를 따라갔다.
아르키메데스는 한 수레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수레에 실려 있는 거대한 철구(鐵球) 여섯 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한니발은 아르키메데스가 가리킨 현대의 짐볼 만 한 철구를 보자마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뭔가 했더니 투석기로 돌덩이 대신 쇳덩이를 쏘자는 말씀이셨군요. 뭐, 철이 돌보다 더 단단하니 같은 무게면 조금 더 파괴력이 강하긴 하겠습니다.”
그러자 아르키메데스도 콧방귀를 뀌며 한니발의 말에 맞받아쳤다.
“이 아르키메데스가 겨우 그따위 물건을 가지고 이 먼 길을 왔겠나? 가까이 와서 자세히 들여다보게.”
하스드루발은 아르키메데스의 말대로 거대한 철구에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철구의 윗부분에는 작은 구멍이 여러 개 뚫려있었는데 고개를 숙여 구멍 안을 들여다보니 철구의 속은 마치 항아리처럼 비어있었다.
하스드루발은 고개를 들고는 아르키메데스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아! 알겠다! 선생님! 이거 그리스의 불을 안에 채워 넣고 트레뷰셋으로 쏘시려는 거 맞죠?”
그러자 아르키메데스는 면전에서 부모의 욕을 들은 사람처럼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무슨... 불?”
하스드루발은 아르키메데스의 악귀 같은 표정을 보고 자신의 실수를 알아챘다.
“아! 내 정신 좀 봐!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그리스의 불이 아니라 아르키메데스의 불꽃이었죠!”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아르키메데스는 험악한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리면서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다시는 내 발명품을 그따위 근본 없는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또 그랬다가는 그 동안 내가 카르타고 노바에 있는 내 발명품들을 확 다 태워버리고 시라쿠사로 돌아가 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아유... 아르키메데스 선생님.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아르키메데스가 하스드루발의 사과를 듣고도 분이 덜 풀려 씩씩거리자 한니발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르키메데스 선생. 하스드루발이 미안하다잖소. 당신도 그 새로운 발명품 실험을 해보려면 일단 트레뷰셋부터 설치해야 하지 않겠소? 여기 내 반지를 빌려드리겠소. 병사들에게 이걸 보여주면 내가 선생께 권한을 위임한 걸 알고 기꺼이 트레뷰셋 설치를 도울 거요.”
그 말에 아르키메데스는 한니발의 반지를 낚아채듯 받아들고는 투덜거리면서 수송대가 가져온 수레 근처에 모여 있는 병사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니발은 그런 아르키메데스의 뒷모습을 보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타르반투 왕보다 훨씬 상대하기 까다로운 늙은이로군.”
* * *
아르키메데스는 자신이 데려온 목수들을 지휘하여 일주일 만에 트레뷰셋을 조립했다.
거대한 신형 투석기를 처음 본 병사들은 트레뷰셋 주변에 모여들어 구경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저렇게 큰 게 바알 함몬 신전의 주춧돌만한 돌덩이를 날려댄다는 말이지? 아레바키족 놈들 한발만 맞아도 오금이 저리겠는데!”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르키메데스가 데려온 기술자 한 명이 이미 트레뷰셋에 장전되어 있는 아르키메데스의 불꽃이 들어있는 철구의 구멍에 조심스럽게 횃불을 가져다 댔다.
- 화르르륵!
철구 윗면의 구멍에서 일제히 불길이 솟구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병사가 검을 휘둘러 트레뷰셋에 설치된 밧줄을 끊었다.
- 덜커덩!
트레뷰셋의 발사대가 투박한 소리를 내며 공중으로 솟구치자 불길에 휩싸인 철구가 큰 포물선을 그리며 혜성처럼 날아가 누만티아의 성벽 안으로 떨어졌다.
- 콰과광!
그리 두껍지 않은 선철로 만든 철구가 한 목조건물의 지붕을 뚫고 들어가 바닥에 부딪히자마자 산산이 조각나면서 화염이 사방으로 튀었다.
“불이야! 어서 물을 가져와라!”
인근에 있던 아레바키족 시민과 병사들이 물동이를 들고 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는 불길을 잡으려고 했지만 유류 화재를 물로 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거대한 요새도시 누만티아의 5분의 1이 화염에 휩싸이자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승리의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모든 병사들이 승리를 예감하며 기뻐하는 카르타고군의 군영에서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은 단 하나, 아우니아 공주뿐이었다.
한니발과 병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군영 내를 산책하고 있던 아우니아 공주는 자신의 고향이 불길에 휩싸인 것을 보고 조용히 눈물 한 방울을 흘리며 나직이 말했다.
“인정할 수 없어.”
한니발은 그런 아우니아 공주에게 물었다.
“무엇을 인정할 수 없단 말입니까?”
아우니아 공주는 계속 누만티아 쪽을 바라보면서 한니발에게 반말로 대답했다.
“난 지난 전투에서 장수로서 이길 수 없다면 전사로서라도 이기기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당신 동생과 싸웠지. 하지만 당신 동생은 아주 대단하신 명검으로 내 검을 단칼에 두 동강 내버리더군. 그런데 이제 당신들은 고작 괴상한 쇳덩이 한 개로 내 고향을 불바다로 만드는구나. 제대로 된 싸움도 해보지 못하고 부족이 멸망하게 생겼으니 당신이 내 입장이면 이 따위 패배를 인정할 수 있겠나?”
그러자 한니발이 트레뷰셋을 바라보며 노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아우니아 공주에게 말했다.
“내 동생 하스드루발은 그 명검을 만들 철을 수입하기 위해 겨우 열세 살 때 대제국의 왕자와 담판을 지었다. 그리고 저 불타는 쇳덩이와 거대한 투석기를 만든 괴팍한 노인의 마음을 사기 위해 겨우 열네 살에 얼마 전까지 적국이었던 나라에 사절로 다녀오기까지 했지. 그렇게 내 동생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와 바르카 가문을 위해 어린 시절부터 피나는 노력을 해왔다.”
한니발은 다시 아우니아 공주의 옆얼굴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면서 몰아붙였다.
“당신은 지금까지 뭘 하면서 지내왔지? 내 동생처럼 세상에 대한 안목을 넓혀왔나? 아레바키족의 번영을 위해 전투에서 싸워 이기는 것 말고 자신이 뭘 할 수 있는지 한 번이라도 고민 해본 적은 있나? 내 동생이 이룬 우리 가문의 승리를 깎아내리지 마라. 아우니아 공주.”
아우니아 공주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노기가 가라앉은 한니발이 다시 존대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전장에서 검을 들고 싸우는 것만이 전쟁이 아닙니다.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시지요 아우니아 공주. 그렇게 하신다면 우리 바르카 가문은 아레바키족과 함께 번영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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