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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49화 (49/201)

[ 49 ] [48화] 드디어 항복한 아레바키족

타르반투 왕은 소부족의 부족장과 신하들을 대동하고 아르키메데스의 불꽃이 일으킨 화마(火魔)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둘러보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카르타고군에 대항해 결사항전을 벌여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던 장군 한 명이 완전히 재가 되어버린 군량창고를 보자마자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우리 대 아레바키족의 역사가 이대로 끝나는구나.”

그때 타르반투 왕의 일행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 콰앙!

타르반투 왕 일행이 맹수의 울음소리에 놀란 미어캣 무리처럼 일제히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들의 눈에 완전히 부서져 버린 성벽의 한 부분이 보였다.

이마에 피가 흐르는 부관 한 명이 타르반투 왕에게 달려와서 말했다.

“전하! 어서 피하십시오! 여기 계시면 위험합니다!”

그러나 타르반투 왕은 무너진 성벽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타르반투 왕의 신하들은 그런 주군을 말리기 시작했다.

“전하! 그쪽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어서 왕궁 안으로 피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타르반투 왕은 신하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벽이었던 돌무더기 위에 올라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불과 몇 주 사이에 몰라보게 늙어버린 노왕의 눈동자에 먼발치에서도 충분히 거대해 보이는 투석기의 모습이 비쳤다.

마치 거인의 팔을 떼어내 만든 것 같은 투석기의 발사대가 다시 한번 공중으로 솟구치자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온 거대한 돌덩어리가 타르반투 왕에게서 1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망루를 직격했다.

- 콰과광!

타르반투 왕은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망루를 보며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내심 놀라고 말았다.

아레바키족에게는 더 이상 농성을 하기 위한 군량도, 산 밑의 구릉지대를 가득 메운 바르카 가문의 대군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성벽도 없었다.

타르반투 왕이 이런 상황에선 인제 그만 사랑하는 딸을 구하기 위해 적에게 항복한다 한들 저승에 계신 조상님들조차도 자신을 탓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함께 화재현장을 둘러보고 있던 부족장들이 그의 등 뒤로 몰려왔다.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자가 타르반투 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타르반투 전하. 안타깝지만 이제는 용단을 내리실 때가 됐습니다. 이 이상 카르타고인들에게 저항하면 부족민 전부가 노예로 팔려 가게 될 겁니다. 적장 한니발이 풀어준 포로들의 말대로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적어도 부족의 명맥은 유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불과 며칠 전에 그런 말을 들었으면 불같이 화를 냈을 그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렇게 말해주는 늙은 부족장이 고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쩔 도리가 없구나. 군량도 없고 성벽도 무너졌으니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나. 성문에 백기와 올리브 가지를 내걸고 카르타고군의 군영에 사절을 보내 내 뜻을 전해라. 오늘부로 우리 아레바키족은 바르카 가문과 동맹을 맺겠다고 말이다.”

타르반투 왕의 명령을 받은 가신들은 곧바로 한니발에게 사절을 보내 서신을 전달했다.

한니발은 전군을 한데 모은 후 손에 쥔 서신을 높이 들고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고생 많았다! 아레바키족의 왕 타르반투가 드디어 우리에게 항복했다! 우리의 승리다!”

한니발의 외침에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이 지른 환호성을 터뜨렸다.

“와아아아아!”

병사들의 흥분이 가라앉은 후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군영을 지킬 병사를 제외한 전군을 이끌고 누만티아로 향했다.

두 형제가 탄 흑마가 백기와 올리브나무가지를 내건 성문 안으로 들어서자 그들을 마중 나온 타르반투 왕과 아레바키족의 부족장들이 보였다.

한니발의 배려로 아직 포로 신분임에도 말을 타고 있던 아우니아 공주가 타르반투 왕을 보자마자 말 등에서 뛰어내려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아바마마! 무사하셨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아우니아 공주는 이미 서신을 통해 타르반투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두 눈으로 아버지가 무사한 모습을 확인하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타르반투 왕도 무사히 돌아온 딸을 부둥켜안으며 펑펑 울기 시작했다.

“아우니아! 이렇게 다시 너를 보니 꿈만 같구나! 어디 다친 데는 없니? 혹시 카르타고군에게 몹쓸 짓을 당하지는 않았고?”

“다친 데도 없고 포로로 잡혔을 때도 무례한 일을 당하진 않았어요. 그런데 한 달 만에 왜 이렇게 늙으셨어요! 이마에 주름 좀 봐!”

“왜긴 왜야! 네 걱정 하다가 확 간 거지 요것아!”

한니발을 제외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타르반투 왕 부녀의 애틋한 상봉 장면을 보고 미소 지었다.

타르반투 왕은 지금 당장 딸과 회포를 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전쟁에서 패한 자신의 입장을 잊어버릴 만큼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그는 말 등 위에 앉아 있는 한니발과 눈을 마주치면서 말했다.

“딸을 무사히 돌려보내주어서 감사합니다. 약속대로 우리 아레바키족은 바르카 가문과 동맹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한니발이 타르반투 왕에게 말했다.

“그 말을 카르타고의 히스파니아 총독이시자 바르카 가문의 수장이신 제 아버지를 직접 만나서 전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타르반투 왕은 한니발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만 우리 부족은 다른 부족과 동맹을 맺을 때 빛의 신을 모신 신전에서 의식을 치르는 풍습이 있습니다.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우리가 의식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주었으면 좋겠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하밀카르는 평소 속주민의 문화와 종교를 존중해 왔기 때문에 한니발도 타르반투 왕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우리는 신전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병사들과 함께 타르반투 왕 일행을 따라 빛의 신의 신전으로 향했다.

하스드루발은 말을 타고 누만티아 시내를 천천히 지나면서 태어나서 처음 대도시에 온 시골 사람처럼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드디어 켈티베리안 최후의 도시 누만티아를 내 눈으로 직접 보는구나!’

히스파니아의 켈트족인 켈티베리안들은 로마가 히스파니아 전체를 정복할 때까지 피레네 산맥 너머에서 이주한 켈트족과 히스파니아의 원주민인 이베리아족의 문화가 융합된 매우 독창적인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전생에 서양고대사 연구에 인생을 바쳤던 역사 덕후 하스드루발에게 누만티아는 그야말로 보물창고 같은 곳이었던 것이다.

‘갈리아의 켈트족은 무슨 움집 비슷한 곳에서 사는 경우가 많았다는데 아레바키족은 돌을 쌓고 밀짚으로 지붕을 만든 2층집도 짓는구나! 이곳 터가 21세기에도 남아있었으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됐을 수도 있겠는데! 전생에는 켈트족의 유적이나 유물이 별로 남은 게 없어서 참 아쉬웠는데 여기가 천국인가 싶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하스드루발의 환한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의 머릿속에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인구 40만의 대도시 카르타고 시민 중 약 35만 명을 학살하고 카르타고를 완전히 불태운 지 불과 13년 후에 이곳 누만티아도 완전히 파괴해버린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 아직은 지적 호기심이나 충족하려 들면서 희희낙락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본격적으로 로마를 공격하기 전에 준비해야할게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말이야.’

하스드루발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타르반투 왕과 한니발 일행은 아레바키족의 신전 앞에 도착했다.

네모난 돌을 쌓아 올려 만든 신전은 밖에서도 내부가 보이도록 지어져 있었기 때문에 하스드루발은 신관이 의식을 치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신관은 신전의 한가운데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양팔을 들어 올려 기도문을 읊조리며 바르카 가문과 아레바키족이 동맹을 맺었음을 자신들의 신에게 고했다.

하스드루발은 현대에서는 그 내용을 추측해 볼 엄두조차 못냈던 아레바키족의 종교의식을 눈에 담자 코끝이 찡해졌다.

‘로마를 정복하지 못했을 때 멸망하는 건 카르타고뿐만이 아니지. 수많은 나라와 부족과 문명이 가능성과 다양성을 거세당한 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갈 거야. 찬란한 로마문명을 살찌우기 위해서 말이지. 로마가 사라지면 얼마나 다양한 문화와 언어가 유럽대륙에서 발전해 나갈까.’

* * *

아레바키족 신관이 의식을 마친 후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군대를 이끌고 타르반투 왕과 아우니아 공주를 호위하며 카르타고 노바로 향했다.

한니발 일행은 약 한 달간 행군하여 가을이 끝나기 직전에 그리운 카르타고 노바에 도착했다.

타르반투 왕은 타고 있는 마차의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카르타고 노바의 성벽을 보고 감탄을 자아냈다.

“정말 대단하군! 완공되고 나면 하늘을 날지 않는 이상 저런 성벽을 넘을 수는 없겠어!”

한니발과 하스드루발도 눈앞의 광경이 놀랍기는 매한가지였다.

한니발이 한창 개축중인 카르타고 노바의 성벽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정말 단단해 보이는군. 이건 트레뷰셋으로도 부수지 못하겠어.”

하스드루발의 형에 말에 맞장구쳤다.

“그러게. 아르키메데스 선생님이 올해 5월부터 성벽개축을 한다고 하긴 했는데 벌써 이렇게 많이 진행됐을 줄은 몰랐네.”

원래의 역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2차 포에니전쟁 말기에 카르타고 노바의 성벽에 결함이 있는 곳을 찾아내 순식간에 함락시킨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참사를 미리 막기 위해 누만티아 원정을 떠나기 전에 아르키메데스에게 카르타고 노바 성벽을 개축해 달라고 부탁했다.

수학과 공학의 천재 아르키메데스는 정공법으로는 결코 함락시킬 수 없다고 알려진 시칠리아 최고의 대도시 시라쿠사의 성벽을 설계한 당대 최고의 축성전문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타르반투 왕은 자기가 탄 마차 앞에서 말을 타고 가고 있는 한니발에게 말했다.

“바르카 가문이 이집트의 파라오 뺨칠 정도로 부유하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인가 보구려. 하밀카르 총독님께서 허락하신다면 회담이 끝난 후에 카르타고 노바의 시내를 한번 둘러보고 싶소.”

한니발이 고개를 돌려 타르반투 왕과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아버지께서는 분명 타르반투 전하의 청을 흔쾌히 허락하실 겁니다. 관광하실 때는 시내 지리를 잘 알고 켈트어를 할 줄 아는 하인과 호위병을 붙여드리겠습니다.”

두 형제가 원정군을 이끌고 카르타고 노바 시내에 들어섰지만 몇몇 바르카 가문의 가신들이 마중을 나왔을 뿐 타구스강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처럼 화려한 개선식은 준비되어있지 않았다.

하스드루발은 의외로 차분한 분위기의 시내를 둘러보면서 중얼거렸다.

“아버지께서 타르반투 왕을 많이 배려하셨네. 하긴 이미 항복했는데 자기네 부족을 정복했다고 신나게 축제를 열어대면 기분 나쁘긴 하겠지.”

한니발 일행이 바르카 가문의 저택에 도착하자 미리 대문까지 마중을 나온 하밀카르가 타르반투 왕을 환영하며 악수를 청했다.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카르타고의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 하밀카르라고 합니다.”

타르반투 왕도 하밀카르가 내민 손을 잡으며 인사했다.

“한니발 장군처럼 켈트어를 잘하시는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아레바키족의 왕 타르반투입니다.”

하밀카르와 타루반투 왕은 둘 다 눈을 초승달처럼 뜨며 웃고 있었지만 서로 맞잡은 손에 점점 더 힘을 주며 기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치나 외교가 전쟁보다 훨씬 골치 아파. 난 계파 수장자리를 맡아줄 형이 둘이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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