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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50화 (50/201)

[ 50 ] [49화] 뜻밖의 경사

하밀카르는 타르반투 왕과 인사를 나눈 후 그와 아우니아 공주를 만찬에 초대했다.

바르카 가문의 모든 식구들이 손님과 함께 기다란 직사각형 식탁을 빙 둘러싸듯 앉자 하인들이 온갖 산해진미를 가져왔는데 중에서 타르반투 왕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한 것은 바로 포도주였다.

“이 포도주는 정말 최상품이로군요! 루비를 갈아 넣은 것 같은 선명한 빛깔과 잘 말린 오렌지껍질 냄새 같은 은은한 향기에 이끌려 한 모금 마시니 아직도 입안에서 갓 짜낸 리넨 옷감처럼 부드러운 여운이 가시질 않습니다!”

하밀카르는 평소 좋은 포도주를 모으는 취미가 있었기 때문에 타르반투 왕의 극찬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타르반투 전하께서는 포도주를 보는 안목이 대단하시군요. 이건 카르타고산 포도주 중 최고급품인 바그라다스강 유역에서 재배한 포도로 빚은 명품을 내놓은 보람이 있습니다 그려. 이번에는 물을 섞지 말고 한잔 더 드셔보시지요.”

하밀카르와 타르반투 왕은 서로 잔을 부딪쳐가며 물도 섞지 않은 포도주를 연거푸 마시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취기가 올라 볼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스름해졌다.

술이 들어가자 두 사람은 마치 오랫동안 알고지낸 이웃사촌처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 글쎄 그때 한니발이 꼭 독사 같은 눈빛으로 절 꼬나보는데 등골에 소름이 쫘~악 끼치지 뭡니까? 총독께서는 어떻게 아들을 저리도 강단 있게 키우셨습니까? 저한테도 자식 농사 비결 좀 알려주십시오!”

타르반투 왕의 말에 하밀카르가 대답했다.

“아니 이 사람이! 남의 아들보고 독사가 뭡니까! 독사가! 한니발! 너 고개 좀 이리로 돌려봐라. 저게 어떻게 독사 같은 눈빛이에요! 사자 같은 눈빛이지!”

하스드루발은 그런 두 사람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버지야 원래 친화력이 좋은 분이지만 타르반투 왕도 의외로 붙임성 있는 성격이었네. 아무리 그래도 만난 지 30분 만에 저러는 건 너무 빠른 거 아니야?’

그러나 하밀카르는 친분 때문에 공과 사를 구별 못할 정도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하밀카르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타르반투 왕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타르반투 전하, 좋은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는 않지만, 더 취하기 전에 바르카 가문과 아레바키족이 맺을 협정에 관해 이야기 해 두어야겠습니다. 아레바키족은 우리의 수송대를 습격해 큰 피해를 입혔으니 전후 복구가 되고 나면 적절한 전쟁배상금을 지급해 주셔야겠습니다. 또 다른 부족과 마찬가지로 전하의 아드님 중 한 명을 카르타고 노바에 보내시는 것도 있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그러자 타르반투 왕이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딸 아우니아 공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총독님의 뜻대로 차후 배상금을 지불하겠습니다. 하지만 볼모 문제는 부디 재고를 부탁드립니다. 신들께서 제게 아들이라고는 늦둥이 딱 한 명만 주셨는데 그 녀석이 이제 겨우 네 살이라 차마 제 엄마 품에서 떼어낼 수가 없군요. 그래서 말인데 괜찮으시다면 아들을 보내는 대신 사돈을 맺는 건 어떻겠습니까? 원래는 아우니아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이 최선인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하밀카르는 턱수염을 매만지며 머릿속에서 손익을 계산한 후 입을 열었다.

“글쎄요... 혼인 동맹이라... 확실히 괜찮은 제안입니다만 제 아들 중 결혼을 안 한 녀석들은 아직 나이가 어려서 좀 마음에 걸리는군요.”

하밀카르가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딱 잘라 거절하지 않자 타르반투 왕은 계속 그를 설득하기 위해 말을 이었다.

“제 딸은 올해 열여덟이 되어 이미 성인식을 치렀습니다. 듣자 하니 이미 전 히스파니아에 명장으로 이름을 떨친 셋째 아드님 하스드루발이 제 딸과 동갑이더군요. 약간 이른 감이 없지는 않지만, 더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경우도 흔하지 않습니까?”

타르반투 왕의 말에 하밀카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하스드루발은 얼굴이 도화지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

‘저 양반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난 얼마 전에 당신 딸한테 강제로 중성화 수술 당할 뻔했다고!’

하지만 하스드루발이 아우니아 공주와의 결혼해 질색하는 이유는 지난 전투에서 안타까운 일을 당할뻔한 경험 때문만은 아니었다.

‘심지어 나랑 동갑이라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로 안 된다!’

동갑끼리의 연애는 전쟁이다.

하스드루발이 전생에 경험했던 단 한 번의 짧은 연애와 수 많은 주변 지인들의 경험담을 통해 내린 결론이었다.

그는 전생에 그리 길지 않은 연애기간 동안 전 여친과 미친 듯이 싸워대던 나날을 떠올리자 모골이 송연해졌다.

게다가 만만치 않은 성격의 아우니아 공주와 연애 기간도 없이 곧바로 결혼을 하게 된다면 전쟁을 넘어 지옥을 맛보게 될 수도 있다는 예감에 하스드루발의 가슴은 공포로 물들어갔다.

‘안 그래도 아우니아 공주는 한 성깔 하는 것 같은데 심지어 동갑이라. 잘못하면 부부싸움 하다 검술을 겨루게 될지도 모르겠네. 당장 혼담을 엎는 건 외교 문제로 번질 수 있으니까 일단 시간이라도 벌어보자.’

하스드루발은 애써 밝은 미소를 보이며 이번 원정 기간 동안 포로를 심문하면서 익힌 켈트어로 타르반투 왕에게 말했다.

“타르반투 전하의 고마운 말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우니아 공주님 같은 미인과의 혼담을 마다할 남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켈트족은 전통적으로 부모가 자식에게 원치 않는 결혼을 강요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바르카 가문과 아레바키족의 우호를 다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혹시 아레바키족의 오랜 전통을 해치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

그러자 타르반투 왕이 하스드루발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역시 하스드루발 대장은 소문대로 박식하시군요! 이미 우리 부족의 전통까지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카르타고 노바에 오는 길에 아우니아에게 물어봤더니 대장님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더군요.”

그 말에 하스드루발은 고개를 돌려 아우니아 공주를 바라보았다.

아우니아 공주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말하는 듯이 새침한 표정으로 먼 산을 보고 있었지만 양 볼은 잘 익은 사과처럼 발그스름했다.

그녀는 카르타고 노바로 오는 길에 켈트어를 할 줄 아는 바르카 가문의 부관들에게 하스드루발의 어린 시절의 일화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아우니아 공주는 어릴 적부터 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살 때부터 능숙하게 말을 하고 열두 살 때부터 전장에서 활약해온 하스드루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던 것이다.

일반적인 열일곱 살짜리 남자라면 그런 아우니아 공주의 모습에 가슴이 뛸 만 했겠지만 전생까지 합쳐 46년을 살아온 하스드루발은 여전히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좀 귀엽긴 하네. 하지만 사람이 외모가 다가 아니지. 어떻게든 이 위기를 모면해야 하는데!’

하스드루발이 간신히 미소를 유지하며 속으로는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하밀카르가 의도치 않게 아들의 고민을 덜어주었다.

“전하의 제안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렇지만 공교롭게도 한 달 전에 우리 작은 하스드루발을 카르타고의 중진 정치인이신 하스드루발 기스코 의원님의 따님과 장래에 혼인시키기로 약조했습니다.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하밀카르의 말에 타르반투 왕과 아우니아 공주는 애써 실망감을 감추었지만 하스드루발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하스드루발이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저도 처음 듣는 얘기네요 아버지. 혹시 하스드루발 기스코 의원님의 따님 이름이 소포니스바 인가요?”

아들의 말에 하밀카르가 놀란 얼굴로 대답했다.

“넌 우리 해외파 정치인의 가족 이름까지 외우고 있는 게냐? 정말 대단하구나. 네 말이 맞다. 아직 소포니스바가 열세 살밖에 안 돼서 당장 식을 올릴 수는 없지만 4년 후에 너와 혼인시키기로 이미 약조를 했단다. 네가 원정을 떠나있는 바람에 미리 알려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아버지! 본국의 해외파 정치인들과 계속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외교만큼이나 중요하죠. 아버지 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하밀카르는 그저 아들이 자기 뜻에 순종하는 줄 알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만 하스드루발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딸 소포니스바면 카르타고 최고의 미녀잖아! 아직 어려서 미인으로 소문이 나진 않았나 보네.’

소포니스바는 삼국지로 치면 초선에 비견될 만한 카르타고의 절세 미녀이다.

두 사람의 다른 점은 초선은 삼국지연의의 저자 나관중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지만 소포니스바는 카르타고의 시조 엘리사 여왕 이외에 유일하게 역사에 이름을 남긴 실존 인물이라는 점이다.

원래의 역사에서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딸 소포니스바를 훗날 왕비로 만들 생각으로 카르타고의 오랜 동맹인 북아프리카 누미디아 지역에 사는 마실리 부족의 왕자 마시니사와 약혼시킨다.

그러자 마실리 부족의 라이벌 부족인 마사에실리 부족의 왕 시팍스가 라이벌 부족의 왕자가 북아프리카 최고의 미녀와 약혼한 것에 질투를 느껴 소포니스바를 빼앗기 위해 2차 포에니전쟁이 한창일 때 카르타고와의 동맹을 깬 후 로마와 손을 잡고 카르타고를 공격한다.

그러나 바르카 가문이 원래의 역사보다 훨씬 더 큰 부와 명성을 얻자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마실리 부족의 왕자 대신 어린 나이에 이미 군사적 재능과 장사수완이 뛰어나다고 소문이 자자한 하스드루발을 사위로 맞기로 마음먹었다.

하스드루발은 속으로 뛸 듯이 기뻐했다.

‘내가 절대로 소포니스바가 앞으로 카르타고 최고의 미녀로 자라나는 걸 미리 알고 있어서 좋은 게 아니야. 카르타고의 동맹 부족들 사이에 분란을 일으킬 원인을 미리 제거하게 돼서 기쁜 거지. 그런데 왜 이렇게 웃음이 나오지?’

하스드루발이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을 때 하밀카르는 실망하는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타르반투 왕과 아우니아 공주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우리 작은 하스드루발 말고도 제게는 아직 장가를 가지 않은 아들이 하나 더 있습니다. 제 막내아들 마고는 작은 하스드루발 보다 겨우 한 살 어린 열여섯 살이니 조금 이르긴 해도 우리 바르카 가문과 아레바키족이 사돈을 맺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 같군요.”

하밀카르의 말에 타르반투 왕은 바르카 가문 아들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명장 하밀카르와 함께 20년 동안 함께 전장에서 경험을 쌓은 덕분에 겨우 30대 중반의 나이에 백전노장의 경륜이 느껴지는 바르카 가문의 양아들 공정한 하스드루발.

바르카 가문이 멜카르트 신의 혈통임을 온몸으로 증명하듯 기골이 장대하고 눈빛 날카로워 가만히 있어도 대단한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한니발.

한니발처럼 키가 크지는 않지만 평범한 켈트족 전사 정도는 넘어설 것 같은 건장한 체격에 언 듯 봐도 영민해 보이는 하스드루발.

그리고 모든 면에서 평범해 보이고 순하다 못해 귀엽게 생긴 마고.

타르반투 왕은 자기 자식 중 제일 잘난 아우니아 공주를 네 형제 중 가장 볼품없어 보이는 마고에게 시집보낼 생각을 하니 울화가 치밀었지만, 자기가 한 말이 있어 하밀카르의 제안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는 아직 어린 딸의 철없는 반항을 하여 혼담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을 기대하며 아우니아 공주에게 물었다.

“아우니아야. 난 하밀카르 총독님께서 좋은 제안을 해주셨다고 생각하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솔직하게 얘기해 봐라.”

그러나 아우니아 공주는 타르반투 왕이 가장 아끼는 자식답게 자신의 감정보다 부족의 앞날을 우선시했다.

“훌륭한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바마마의 뜻대로 바르카 가문에 시집가겠습니다.”

혼담이 성사되자 하밀카르는 만찬이 끝나자마자 약혼을 기념하는 축제를 열었다.

모두가 웃고 떠들며 즐기고 있을 때 아우니아 공주는 혼자 발코니에 나가 별로 가득한 카르타고 노바의 밤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러쿵저러쿵할 처지는 아니지만 참 아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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