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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51화 (51/201)

[ 51 ] [50화] 또 다른 신무기

기원전 223년 가을이 끝나갈 무렵 누만티아 함락을 마지막으로 바르카 가문은 드디어 히스파니아 원정 사업을 마무리했다.

이로써 바르카 가문은 로마의 동맹도시국가인 사군툼을 제외한 히스파니아의 에브로강 이남 지역 전체를 다스리게 되었다.

가을이 끝나고 초겨울이 되자 하밀카르는 아들들과 바르카 가문의 장교 중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병대장 마하르발을 자신의 집무실로 불러 군사 회의를 열었다.

모든 참석자가 원탁에 주변에 놓인 의자에 앉자 하밀카르가 입을 열었다.

“모두 모였구나. 오늘 회의는 보안이 중요하기 때문에 가족 말고는 마하르발만 불렀다. 드디어 우리는 13년 만에 히스파니아 원정사업을 마무리했다. 이제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겠지.”

하밀카르의 말에 한니발이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로마...!”

하밀카르가 고개를 돌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에서 독기를 내뿜는 한니발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래. 네 말대로다. 이제 올해 정복한 지역의 내정을 어느 정도 다지고 나면 슬슬 로마 놈들에게 지중해를 되찾아올 준비를 해야지.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이탈리아반도에 발을 들일 수 있을지 다들 말해 보아라.”

제일 먼저 장남인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원탁 한가운데 놓인 지중해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말했다.

“카르타고도 해군을 많이 강화하긴 했지만, 아직 로마와 제해권을 다툴 정도는 못 되니 육로로 가야합니다. 먼저 사군툼을 어떻게든 한 다음 차근차근 지중해의 해안선을 따라 보급선을 확보해 나가면서 로마로 진군하는 게 어떨까요?”

하스드루발은 큰형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에 충실한 스타일인 큰형다운 착실한 전략이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로마의 압도적인 물량에 점점 밀리다 말라죽을 뿐이겠지.’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말을 마치자 이번에는 한니발이 입을 열었다.

“저는 전쟁 초기에 로마군에 큰 피해를 줘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여러 도시들이 로마연합에서 이탈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군대를 둘로 나누어 한 쪽은 해안선을 따라 로마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마실리아를 공격하는 척 하면서 적의 시선을 끌고 다른 한쪽은 겨울에 알프스를 넘어 전쟁 준비가 안 된 로마를 공격해야 합니다.”

하스드루발은 방금 한니발이 말한 전작이 원래의 역사에서 한니발이 사용했던 전략과 다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바로 원래의 역사의 한니발은 로마군을 속이기 위해 병력을 나눠 마실리아를 공격하는 시늉을 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하스드루발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원래 역사에서는 기원 218년에 한니발 형이 사군툼을 공격해도 로마는 당장 히스파니아를 공격할 여유가 없었지. 지금과는 다르게 말이야.’

원래의 역사에서 한니발은 로마 정벌을 계획하던 도중 기원전 218년에 이탈리아반도 북부에 사는 갈리아인 부족인 보이족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의 시선을 끌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사군툼을 공격한다.

하지만 기원전 223년 현재 하스드루발 이외에 다른 사람이 앞으로 5년 뒤 보이족이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스드루발은 보이족이 반란을 일으키면 병력을 분산시킬 필요 없이 로마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몇 년 더 내실을 다지면서 다가올 기회를 기다리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본국의 내정 다지면서 국내파를 몰아낼 준비를 하고 외교와 새로운 병장기 개발에 투자할 시간도 더 필요한 참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

“전 한니발 형의 알프스를 넘는 작전에 찬성합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힘을 기르면서 때를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로마는 갈리아와 일리리아 원정사업에 투입하는 병사를 매년 늘려가고 있습니다. 놈들이 더 많은 군단을 해외로 보내면 병력을 나눠 양동작전을 할 필요 없이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을 수 있을 겁니다.”

하밀카르는 겨울철에 알프스를 넘자는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다른 장수가 그런 소리를 했으면 허세로 들렸겠지만 하밀카르는 지금까지 전장에서 뛰어난 전략으로 큰 공을 세워온 두 아들이라면 알프스쯤은 충분히 넘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밀카르는 세 아들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각각의 전략에 너희들의 특징이 잘 묻어있구나. 하지만 현 상황에서는 작은 하스드루발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 사군툼에는 친 카르타고파 정치인도 꽤 많아서 지금은 그곳을 공격할 명분이 부족하다. 또 로마가 매년 주변 나라나 부족들을 침략하느라 국력을 소모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로마가 가장 방심하고 있는 틈을 찌르도록 하자.”

회의가 끝난 후 바르카 가문의 남자들은 각자 로마정벌을 준비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공정한 하스드루발은 마고를 데리고 군수품을 점검하며 병참의 기초를 가르쳤고 한니발은 총독집무실에 남아 하밀카르와 바르카 가문의 외교정책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하스드루발은 총독집무실을 나오자마자 대장간으로 향했다.

‘난 올해 히스파니아 원정과정에서 두 번이나 죽을 뻔했지. 투창이 미간을 향해 날아왔을 때랑 아우니아 제수씨와 격투를 벌일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로마와 전쟁을 벌이기 전에 좋은 방어구를 개발해놔야지 불안해서 안 되겠어.’

하스드루발이 대장간에 도착하자 수석대장장이가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하스드루발 대장님.”

“회의를 하느라 좀 늦었네. 부탁한 갑옷은 완성됐나?”

“말씀하신 것 중 하나는 간신히 만들었습니다만 나머지 하나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네요. 일단 완성된 것부터 보시지요.”

말을 마친 수석대장장이는 갑옷 한 벌을 가져오자 하스드루발이 말했다.

“경번갑은 제법 그럴듯하게 만들어졌군.”

하스드루발은 누만티아 공방전을 마치고 카르타고 노바에 돌아오자마자 수석대장장이에게 경번갑과 두정갑 개발을 지시했다.

경번갑은 사슬갑옷에 부분적으로 철판을 결합한 것이고 두정갑은 천으로 만든 옷 안에 작은 철판이나 가죽 조각 여러 개를 쇠못으로 박아 고정해 만든 것이다.

하스드루발은 중세의 갑옷인 경번갑과 두정갑은 기원전 3세기 중장보병의 주무장인 사슬갑옷보다 방어력이 좋으면서도 고대의 기술력으로 쉽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두정갑 만드는 게 왜 어렵다는 거지? 그냥 두꺼운 천 옷 안에다 물고기 비늘처럼 빼곡하게 작은 철판을 못으로 박아 넣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하스드루발의 말에 수석대장장이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말은 쉬운데 실제로 해보면 창검에 맞아도 깨지지 않을 만큼 튼튼하고 가벼운 쇠못을 만드는 게 생각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또 철판을 박아 넣는 과정에서 쇠못이 망가지는 경우도 많고요. 아무래도 못의 재질을 우츠 강철로 바꾸고 시행착오를 수없이 겪어야 그 두정갑이란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석대장장이의 말에 하스드루발이 한숨을 푹 쉬었다.

‘맘 같아선 중세유럽의 기사들이 입는 판금갑옷을 만들고 싶었지만 고대의 기술력으로는 답이 없어서 찾은 타협점이 경번갑하고 두정갑인데. 세상에 쉬운 게 하나도 없구나.’

그는 결국 다시 한번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일단 경번갑 생산에 중점을 두고 두정갑은 가장 실력이 뛰어난 대장장이 몇 명을 선별해서 계속 개발을 진행하게. 적어도 3년 안에 정예병의 갑옷과 마갑은 그 두 가지로 전부 대체할 생각이네.”

“알겠습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하스드루발은 대장간에서의 용무가 끝나자 이번에는 활 공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활 공방에 도착하자마자 대장간에서의 아쉬움을 털어낼 수 있었다.

드디어 그가 몇 년씩이나 기다려온 각궁 개발이 완료되었기 때문이다.

하스드루발은 각궁을 들어 올려 한 번 시위를 당겨보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활 장인을 칭찬했다.

“장력이 정말 대단하군! 누미디아 출신 궁수가 쓰는 나무 활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겠어! 역시 지중해 최고의 궁수로 유명한 크레타 출신 활 장인다운 솜씨야! 정말 고맙네! 요 몇 년간 정말 고생 많았어!”

하스드루발의 극찬에 활 장인은 겸손하게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저는 지금껏 크레타에서 잡은 사슴뿔과 힘줄로 만든 활보다 뛰어난 활은 세상에 없을 거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대장님께서 저를 고용하신 후 물소 뿔과 그 대나무라는 신기한 소재를 제공해 주신 덕에 제 인생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으니 감사는 제가 드려야겠지요.”

하스드루발은 어린 시절부터 크기가 작고 위력이 강한 합성궁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고대 지중해 세계에는 궁술이 그다지 발전하지 않았고 활을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재료도 한정적이라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다.

하지만 바르카 가문이 마우리아 왕조와 무역을 하기 시작하면서 인도에서 물소 뿔과 대나무를 수입해 본격적으로 조선의 각궁을 모티브로 한 활을 개발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조선의 활보다는 성능이 떨어지겠지만, 고대 지중해에선 최강의 활이 분명하겠지. 누미디아 기병들을 잘 설득해서 등자를 사용하게 하고 기마궁술 훈련을 시키면 지중해 최강의 궁기병이 되겠어. 그리고 나도 오늘부터 기마궁술 연습 빡세게 해야지.’

사실 로마와 전쟁을 벌일 때쯤에는 지휘관이 되어있을 하스드루발이 년 단위의 시간을 투자해야 익힐 수 있는 기마궁술을 배우려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패한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스키피오 일가의 활약이다. 아버지 스키피오가 히스파니아를 공격해 한니발 형의 보급선을 6년이나 틀어막는 동안 아들 스키피오는 로마 최고의 명장으로 성장해 히스파니아를 점령하고 북아프리카 본토를 공격하지.’

그는 다시 한번 각궁을 들어 올려 로마에 있는 미래의 숙적을 겨냥했다.

‘계획대로 기원전 218년에 전쟁을 시작하면 아마 원래의 역사처럼 한니발 형은 전쟁 초기에 딱 한번 아들 스키피오와 아버지 스키피오를 한 전장에서 만나게 될 거야.’

하스드루발은 활의 시위를 팽팽하게 당기면서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그때 스키피오 부자를 사살한다. 내가 직접 궁기병을 지휘해 두 사람의 등에 화살을 박아주지.”

* * *

한편 하스드루발이 병기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한니발은 하밀카르와의 대화를 마치자마자 여행을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마침 바르카 가문의 저택에 들렀던 기병대장 마하르발은 그런 한니발의 모습을 보고 물었다.

“한니발 장군님. 누만티아에서 돌아오신 지 아직 열흘도 안 됐는데 어디를 가시려고 하십니까?”

하인들이 준비한 소지품을 점검하던 한니발은 고개를 돌려 마하르발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셀레우코스 제국에 다녀오게 됐네.”

한니발이 뜻밖의 대답을 하자 마하르발이 다시 물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이라면 옛 페르시아 지역에 자리 잡은 대제국 아닙니까. 그 먼 곳까지 가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한니발이 담담한 목소리로 마하르발에게 대답했다.

“장차 대왕으로 불리게 될 자를 설득하러 간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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