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 [51화] 지중해 삼분지계 (1)
고대 지중해 세계의 뱃사람들은 정말 급한 경우가 아니면 겨울에는 항해하지 않았다.
지중해의 바람은 언제나 변덕스럽지만, 특히 겨울에는 맞바람을 맞아가며 항해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고대의 사각형 돛은 맞바람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223년의 겨울이 시작될 무렵 바르카 가문의 사절로서 셀레우코스 제국에 가게 된 한니발은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최대한 육로를 이용하여 중간지점인 카르타고에 가기로 했다.
그는 먼저 히스파니아 남동쪽 끝에서 배를 타고 폭이 14km밖에 안 되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로 간 후 자신을 호위하는 기병들과 함께 말을 타고 카르타고 향했다.
본국에서 겨울을 난 한니발은 기원전 222년의 봄이 오자마자 배를 타고 셀레우코스 제국의 수도인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출발해 3주간의 항해 끝에 드디어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그는 갤리선의 갑판위에서 점점 도시의 윤곽을 드러내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를 동방의 여왕이라고도 부른다더니 카르타고 못지않은 화려한 도시군.”
한니발은 여유롭게 흐르는 오렌토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들어선 장엄한 성벽과 그 주변을 둘러싼 드넓은 오렌지 과수원을 보며 감탄을 자아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탄 배가 항구에 들어서면서부터 마음을 다잡고 결의에 찬 눈으로 성벽 안 어디서든 보일 정도로 거대한 셀레우코스 왕가의 왕궁을 바라보았다.
“하스드루발의 말대로라면 저 화려한 궁궐 안에 카르타고의 국내파 못지않은 간신배들이 득실거리고 있단 말이지.”
디아도코이 왕국 중에서 가장 강성했었던 셀레우코스 제국은 현재 개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전대의 왕 두 명이 암살당하고 기원전 223년에 아직 열여덟 살밖에 안 된 안티오코스 3세가 왕위에 오른 틈을 타 간신 헤르미아스가 정권을 잡고 부정부패를 저지르면서 이에 반발한 여러 장군들이 제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의 역사에서 안티오코스 3세는 즉위 초반에는 경험이 부족해 실권을 잡지 못하고 간신 헤르미아스에게 휘둘리고 만다.
그러나 그는 역사에 대왕이라는 칭호를 남긴 자답게 즉위 4년 차에는 정권을 휘어잡아 제국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고 간신을 숙청해 셀레우코스 제국 최대의 전성기를 열게 된다.
역사를 잘 아는 하스드루발은 바르카 가문이 안티오코스 3세에게 빚을 지울 기회는 아직 그가 어리고 미숙한 기원전 222년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스드루발은 몇 년 전 안티오코스 3세와 안면을 튼 한니발에게 그를 만나 도와주라고 부탁했고 한니발은 동생의 말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전에 조사해본 바로는 간신 헤르미아스의 허가가 없으면 왕을 알현할 수도 없다지. 먼저 카르타고에서 가져온 상품을 팔아서 자금을 마련해야겠군. 간신치고 뇌물을 싫어하는 자들은 없으니까 말이야.’
한니발은 본국에서 겨울을 나는 동안 카르타고의 해외파 정치인인 큰매형 보밀카르가 챙겨준 설탕이나 유리 공예품 등 값비싼 상품을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전부 팔았다.
그는 그렇게 벌어들인 은화로 다시 금덩이를 사들인 다음 그것을 가지고 몇몇 수행원들과 함께 길을 물어 간신 헤르미아스의 집으로 찾아갔다.
헤르미아스의 집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사정을 잘 모르는 외지인이 보면 궁궐로 착각할만한 으리으리한 저택이었다.
한니발은 대문을 두드리자 저택의 방문객을 맞는 노예가 대문에 설치된 사람 얼굴 크기의 작은 방범창을 열어 밖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누구십니까?”
한니발이 노예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카르타고의 히스파니아 총독이신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 한니발이라고 한다. 대 셀레우코스 제국의 총독이신 헤르미아스님을 뵙고 싶어 먼 길을 찾아왔다고 전해라.”
그러자 노예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총독님께서는 지금 바쁘십니다.”
노예의 건방진 태도에 한니발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외국에서 온 명 문귀족 출신의 손님이 한나라의 고관대작의 집을 방문한 경우 손님을 맞이하는 노예는 주인이 집에 없거나 바쁘더라도 일단 문을 열고 손님을 응접실로 안내해 다과라도 대접하난 것이 보통이었다.
한니발은 헤르미아스의 노예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챘고 가신에게 지시했다.
“저자에게 적당한 사례를 해라.”
한니발을 보좌하고 있던 수행원이 은화 1드라크마(당시 임금 노동자의 일당에 해당하는 금액)를 건네주었다.
그러나 노예는 은화를 받아들고도 여전히 문을 열지 않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카르타고는 지중해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라고 들었습니다만.”
한니발은 마음 같아선 노예의 따귀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에게 돈을 더 주었다.
노예는 10드라크마를 더 받고 나서야 한니발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제까짓 놈도 문고리 권력이라 이거군. 노예가 하는 짓을 보니 주인의 됨됨이도 대충 알만하구나.’
한니발이 큰돈을 벌어 입이 귀에 걸린 노예의 안내를 받아 저택 응접실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곧 헤르미아스가 나타나 그에게 인사했다.
“카르타고 제일의 명문 귀족인 바르카 가문의 자제분께서 먼 길을 오셨군요. 셀레우코스 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제국의 총리이자 이 저택의 주인인 헤르미아스입니다.”
헤르미아스는 호리호리한 체형에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과 숯이 적어 쥐의 수염 같아 보이는 턱수염을 기른 중년 남자였다.
한니발도 헤르미아스의 인사에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대제국의 총리께서 이렇게 환대해주시니 영광입니다.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 한니발입니다.”
“안티오코스 전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몇 년 전 카르타고에서 열렸던 축제에 참석하셨다가 한니발 님과 즐거운 담소를 나누신 후로 두 분께서 종종 서신을 주고받으신다지요? 그런데 먼 히스파니아에서 이곳 시리아의 안티오키아까지 오셔서 저를 찾으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한니발은 헤르미아스의 질문에 미리 생각해둔 대답을 했다.
“이미 아시겠지만, 저희 바르카 가문은 작년에 히스파니아 원정사업을 마쳤습니다. 덕분에 저희 가문의 남자들은 다시 본업인 무역사업에 힘쓰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히스파니아의 특산품인 철광석과 질 좋은 말을 셀레우코스 제국에 팔면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을 거라고 여겨 시장조사를 하러 먼 길을 왔습니다만, 제국의 관세가 대단히 비싸다는 사실을 알고 실망스러워하다 이렇게 총리님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헤르미아스는 한니발의 말을 듣고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헤르미아스가 제국의 정권을 완전히 휘어잡은 건 셀레우코스 제국의 선대왕인 셀레우코스 3세 케라우노스가 몇 달 전 암살당한 후인데 서지중해 끝에 위치한 히스파니아에서 온 청년이 벌써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헤르미아스는 한니발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고 그의 말을 진심으로 경청하기 시작했다.
“제가 뭘 해드렸으면 하십니까? 한번 말씀해 보십시오.”
헤르미아스의 반응을 보고 한니발이 미끼를 던졌다.
“현재의 관세를 절반으로 줄여주신다면 저희 바르카 가문은 감사의 뜻으로 헤르미아스 총리님께 꾸준히 성의를 보이겠습니다.”
말을 마친 한니발이 손짓을 하자 바르카 가문의 가신이 큼직한 금덩이를 가져와 두 사람이 앉아있는 자리의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헤르미아스는 어린아이 머리만 한 금덩이를 보고 눈이 접시처럼 커졌다가 이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셀레우코스 제국과 바르카 가문이 좋은 관계를 맺게 되어 기쁩니다. 혹시 이곳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머무시는 동안 필요하신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제 힘이 닿는데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한니발은 바로 그 상투적인 말 한마디를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으시다면 안티오코스 전하를 알현할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전하와 함께 카르타고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위대한 업적에 대해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년이 지나버렸습니다. 전하께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군요.”
평소 헤르미아스는 자기 이외의 사람이 왕을 알현하는 것을 늘 경계해왔다.
하지만 외국인인 한니발이 그와 권력을 다투게 될 리 없었고 무엇보다 새로운 돈줄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헤르미아스는 한니발의 청을 흔쾌히 승낙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군요. 안티오코스 전하께 말씀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요즘 몸살을 앓고 계셔서 며칠 기다리셔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괜찮으시다면 그동안은 제 집에서 머무시지요.”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신세를 지며 전하의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청이 더 있습니다만.”
“말씀하시지요.”
“저택의 대문을 지키는 남자노예가 아주 싹싹하고 예의바른 게 마음에 들더군요. 괜찮으시다면 그 친구를 저에게 파시지 않겠습니까?”
헤르미아스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한니발에게 대답했다.
“대문을 지키는 노예? 아 그 녀석 말씀이시군요.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누군지 알 것 같습니다. 그 녀석이라면 그냥 드리겠습니다. 한니발 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에 비하면 그깟 아무 재주도 없는 노예의 몸값 따위는 푼돈이지요.”
* * *
한니발은 헤르미아스의 집에서 머문 지 사흘째 되던 날 드디어 안티오코스 3세에게 기다리던 답변을 받았다.
한니발은 안티오코스 3세가 보낸 서신을 받자마자 서둘러 셀레우코스 왕조의 궁궐로 향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알현실이 아닌 자기 방에서 환한 표정으로 한니발을 맞이했다.
“한니발! 이게 얼마만인가! 가끔 서신만 주고받다가 이렇게 만나니 정말 반갑네!”
안티오코스 3세는 한니발과 카르타고에서 만난 지 5년 만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키가 크지는 않지만 마른 근육질의 잘생긴 청년으로 자라있었다.
한니발이 안티오코스 3세의 환대에 답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편찮으시다고 들었었는데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이제 많이 괜찮아졌다네. 여기 앉게. 함께 예전처럼 즐겁게 얘기를 나눠 보세나.”
안티오코스 3세는 하인에게 간단한 주안상을 내오게 해 한니발과 함께 포도주를 마시며 5년 만의 회포를 풀었다.
술잔이 여러 번 오가자 볼이 조금 빨개진 안티오코스 3세가 오른손에 든 포도주잔을 바라보면서 한니발에게 신세 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지난 4년은 정말 지옥 같은 세월이었네. 아바마마께서 갑자기 괴한들에게 암살당하신 후 왕위를 물려받으신 형님도 작년에 암살 당하셨지. 형님을 죽인 원수들은 헤르미아스 총리의 도움으로 모두 사형시켰지만 그자도 언젠가 내 자리를 집어삼키려드는 간신일 뿐이지. 게다가 제국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외적들의 침입도 끊이질 않고 있네.”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할지 모르겠습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다음 허공을 한니발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괴로웠던 게 뭔 줄 아나?”
“어떤 게 가장 힘드셨습니까?”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하는 거였다네. 짐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짐의 손으로 직접 임명한 장군들이 반란을 일으켜 내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지. 헤르미아스의 사주를 받고 내 동태를 살피러 온 자네처럼 말이야.”
포도주를 마시던 한니발은 그 말에 깜짝 놀라 탁자위에 잔을 내려놓고 안티오코스 3세를 바라보았다.
안티오코스 3세는 증오로 가득한 눈빛으로 한니발을 노려보며 말했다.
“짐을 만나려면 헤르미아스의 허락이 필요하니 좋든 싫든 그를 만날 수밖에 없었겠지. 그건 짐도 알아. 하지만 어떻게 그 자의 집에서 3일이나 묵을 수 있었지? 조심성이 많은 헤르미아스가 아무나 자기 집에서 재우진 않을 것 같은데? 손님이 자신의 최측근이거나 아주 중요한 사업파트너가 아닌 이상에는 말이야.”
안티오코스 3세는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작은 유리병을 흔들면서 말을 이었다.
“아까 주안상을 내올 때 자네의 술잔에 독을 발라두라고 하인에게 지시해뒀네. 죽고 싶지 않으면 내가 납득할만한 대답을 해보게. 자네가 배신자가 아닌 것을 스스로 증명하면 상으로 이 해독제를 주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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