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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53화 (53/201)

[ 53 ] [52화] 지중해 삼분지계 (2)

한니발은 온 몸에 독이 퍼져나가면서 식은땀이 흐르고 시야가 점점 흐릿해져 갔다.

사실 한니발이 포도주와 함께 마신 독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만큼 미량이었지만 극심한 통증을 유발했다.

한니발은 안티오코스 3세가 자신의 진심을 떠보기 위해 연극을 하고 있음을 대번에 눈치 챘다.

‘우리 마고처럼 순수하던 안티오코스 왕에게 꽤 음흉한 구석이 생겼구나. 애초에 날 죽일 생각이었으면 내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를 벗어났을 때 암살자를 보내는 편이 합리적이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셀레우코스 제국이 굳이 나를 왕궁에서 죽여 바르카 가문을 적으로 돌릴 이유가 없으니까 말이야.’

한니발은 갑자기 관자놀이를 바늘로 찌르는 것만 같은 두통 때문에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윽!”

그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면서 왼팔로 탁자를 짚어 무너져 내리는 상체를 지탱했다.

한니발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자 중무장한 병사 네 명이 그와 안티오코스 3세가 앉아 있는 테이블 주변을 포위하고 있었다.

네 명의 병사는 모두 은빛으로 빛나는 미늘 흉갑과 윗부분이 뾰족한 트라키아식 투구를 쓰고 손에는 그리스식 검과 은도금을 한 커다란 원형 방패를 들고 있었다.

그는 한눈에 병사들의 정체를 알아챘다.

‘안티오코스가 벌써 셀레우코스 제국의 최정예병인 은방패병단을 포섭했군. 아직 왕이 된지 1년도 안됐는데 수완이 대단하군.’

한니발은 지금 상황에서 말을 가려서 하지 않으면 안티오코스 3세가 더욱 더 의심암귀(疑心暗鬼)에 마음을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는 자신도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진심을 드러내는 사람 흉내를 내 안티오코스 3세와 연기를 주고받기로 마음먹었다.

“안티오코스 전하. 전하께서는 5년 전 카르타고에서 제가 왜 그토록 열심히 알렉산드로스 대왕님의 군사전략을 공부 하냐는 전하의 질문에 무슨 대답을 드렸었는지 혹시 기억나십니까?”

한니발의 말에 안티오코스 3세가 경멸과 애정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이죽거렸다.

“물론이지! 내가 어떻게 그 날을 잊을 수 있겠나? 자네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위업을 논하던 그날을 말이야! 자네는 그 때 분명 진실한 눈빛으로 카르타고 시민을 지켜보면서 그들을 지키기 위한 검이 되고 싶다고 했어! 그랬던 자네가 지금은 이렇게 간신배의 사냥개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날 줄이야!”

한니발은 광기에 사로잡힌 척하는 안티오코스 3세에게 진심어린 표정을 지어보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전 카르타고 시민을 지키기 위한 검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한 번도 잊은 적 없습니다. 우리 바르카 가문은 앞으로 카르타고인이 카르타고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 로마를 정복하고 서지중해의 패권을 되찾아올 생각입니다.”

한니발의 말에 안티오코스 3세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왕의 자질을 갖춘 그는 아직 지중해의 강대국 반열에 끼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로마가 가진 저력을 잘 알고 있었다.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뱉는 말치고는 꽤 창의적이군. 대체 카르타고가 무슨 수로 로마를 이긴단 말이지? 이탈리아반도의 야만인들은 예비군까지 합하면 총 75만 명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다. 바르카 가문이 한 번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어느 정도지? 8만? 9만?”

한니발은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쥔 채 고통을 참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셀레우코스 제국과 카르타고, 그리고 마케도니아 삼국이 힘을 합친다면 로마를 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지중해를 세 나라가 나누어 가질 수 있습니다. 훗날 바르카 가문이 로마를 공격할 때 힘을 보태주겠다고 약속해주시면 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하와 제국을 위협하는 반역자들을 처단 하는데 힘을 보태겠습니다.”

“내가 자네 말을 어떻게 믿지?”

한니발은 마지막 힘을 짜내 안티오코스 3세에게 소리쳤다.

“제 말을 믿지 마시고 한번 현실을 직시해보십시오! 바르카 가문이 누구와 손을 잡게 더 도움이 되겠습니까? 자신의 전횡 때문에 일어난 반란도 진압 못 하는 간신배와 통일된 대제국을 다스리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 중에서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안티오코스 3세는 잠시 고민하다 한니발에게 해독제를 건네주면서 말했다.

“자네 말이 거짓말은 아닌 것 같군. 하긴 요즘 한창 기세등등한 바르카 가문이 언제 망할지도 모르는 제국의 총리와 우호를 다지러 이 먼 길을 오는 건 부자연스러운 일이긴 하지. 게다가 바르카 가문이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군사동맹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정권을 잡은 헤르미아스의 환심을 사려 한 것도 납득이 가는군.”

한니발은 해독제를 단숨에 마신 후 지친 얼굴로 안티오코스 3세에게 대답했다.

“이제라도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안티오코스 3세는 그런 한니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정말 미안하게 됐네. 사실 자네가 먹은 것은 치사량에 못미치는 미량의 독이었다네. 몇 달 전 선왕이신 형님께서 평소 아끼시던 부하들에게 암살당하신 이후 일단 사람을 의심부터 하고 보는 습관이 들어버렸지 뭔가. 그건 그렇고 자네가 말한 계획은 그리 현실적이지는 못한 것 같은데.”

한니발의 자못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며 대답했다.

“그건 미처 몰랐군요. 그런데 왜 제 계획이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셀레우코스 제국은 국내의 반란을 전부 진압하고 나서도 주변의 외적들 때문에 로마를 공격할 여유가 없네. 특히 이집트를 차지하고 있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호시탐탐 제국을 침략하려고 벼르고 있어서 모든 제국민이 불안에 떨고 있지.”

한니발은 이미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오자 하스드루발이 미리 일러줬던 말을 안티오코스 3세에게 전했다.

“저도 전하와 생각이 같습니다. 바르카 가문이 셀레우코스 제국에 바라는 것은 그저 마케도니아가 카르타고와 함께 로마를 공격할 때 그리스에 있는 도시국가들이 마케도니아의 뒤통수를 치지 못하도록 조금 위협해주시는 것뿐입니다.”

국내 반란만 진압된다면 셀레우코스 제국이 이미 전성기가 지난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위협해 움직임을 막는 것은 굳이 전면전을 벌이지 않고 무력시위만 해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 수고랄 것도 없는 약속의 대가가 명장 한니발이 직접 지휘하는 지원군 수만 명이니 안티오코스 3세는 한니발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군. 알겠네. 그렇게 하세나. 바르카 가문이 반란군을 처단하는 걸 도와주면 내 자네와 한 약조를 반드시 지키겠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그 말에 한니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한니발은 안티오코스 3세가 짧은 기간 동안 아버지와 친형이 암살당하는 바람에 의심암귀에 빠져 자신에게 독을 먹이는 꾀를 부리긴 했지만 그가 본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삶을 모방하고 싶어 하는 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니발은 안티오코스 3세가 생전에 비겁함을 경멸한 것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이상 그가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감사합니다 안티오코스 전하. 오늘 전하께서 내리신 용단으로 카르타고와 셀레우코스 제국 양국이 함께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나야말로 고맙네. 가증스러운 반역자들 때문에 요 몇 년간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했으니 말일세. 그런데 마케도니아와는 이미 동맹을 맺은 건가? 고지식한 안티고노스 왕이 이미 한번 로마에 패한 카르타고와 쉽게 손을 잡을 것 같지는 않네만.”

한니발은 그 말에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점은 걱정 마십시오. 마케도니아에 협상하러 간 제 동생이라면 분명 잘 해낼 겁니다.”

* * *

한니발이 셀레우코스 제국에서 안티오코스 3세와 담판을 짓는 동안 하스드루발은 마케도니아의 수도 펠라에 있는 왕궁으로 향했다.

하스드루발은 2차 포에니 전쟁을 시작하고 한니발이 활약을 하다보면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5세가 바르카 가문에 동맹을 요청해 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되도록 개전 전에 미리 마케도니아와 동맹을 맺을 생각이었다.

전쟁 초기부터 바르카 가문이 마케도니아가 함께 로마를 공격하여 압도적인 물량을 자랑하는 로마군단을 분산시킨 다면 전황을 유리하게 이끄는데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스드루발이 알현실에 들어서자 높은 단상 위에 놓인 옥좌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마케도니아의 왕자 필리포스 왕자가 보였다.

마케도니아의 왕인 안티고노스 3세 도손이 현대의 발칸반도 서부에 해당하는 일리리아 지역으로 원정을 떠났기 때문에 올해 열여섯 살이 된 필리포스 왕자가 하스드루발을 대신 맞이한 것이다.

‘역사대로라면 내년에 왕이 되는 필리포스 왕자잖아. 마침 잘됐다. 여기서 협상만 잘하면 왕이 바뀌었다고 동맹을 없었던 일로 하거나 하진 않겠네.’

하스드루발은 필리포스 왕자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진정한 후계자이신 필리포스 왕자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카르타고의 히스파니아 총독인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 하스드루발이라고 합니다.”

필리포스 왕자는 며칠 전 바르카 가문이 보낸 티리언 퍼플로 염색한 최고급 옷감과 히스파니아 산 명마 수십 마리를 받았지만, 그 의도를 짐작하지 못해 하스드루발을 경계했다.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바르카 가문이 보낸 귀한 선물을 잘 받았다고 그대의 부친께 전해주시지요. 헌데 우리 마케도니아에 이렇게 귀한 선물을 주시고 이곳 펠라 까지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하스드루발은 필리포스 왕자의 말에 외교무대에 익숙한 아버지 하밀카르처럼 능숙하게 대답했다.

“위대하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진정한 후계자인 마케도니아와 엘리사 여왕의 도시 카르타고 사이의 우호를 다지고 양국이 함께 번영해나갈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작은 성의를 보인 것뿐입니다.”

그 말에 필리포스 왕자가 짜증이 조금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니까 두 나라가 함께 번영해나갈 방법이라는 게 뭐냔 말이요? 카르타고인이 값비싼 선물을 보낼 때는 뭔가 바라는 게 있을 때 뿐 이잖습니까?”

“이 작은 도시국가에 불과했던 로마가 나날이 강성해지더니 급기야 지중해 전체를 집어 삼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이에 저희 바르카 가문은 강대한 마케도니아와 동맹을 맺고 함께 로마를 역사에서 지우고자 합니다.”

하스드루발이 예상했던 대로 필리포스 왕자는 그의 말에 부정적이었다.

“로마가 근래 우리와 일리리아 지역을 두고 종종 다투고 있긴 하지요. 그렇지만 우리 마케도니아가 겨우 로마 따위를 물리치는데 타국과 동맹을 맺어야 할 필요성은 못 느끼겠군요.”

필리포스 왕자는 정치력과 군재가 뛰어난 편이지만 꽤 오만한 성격이어서 신흥 강대국인 로마를 얕잡아보고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필리포스 왕자에게 대답했다.

“왕자님의 뜻을 잘 알겠습니다만 결정을 내리시기 전에 최근 로마인이 만든 검 한 자루를 보여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신지요?”

“검? 뜬금없는 제안이군요. 좋소. 그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니 어디 한번 봅시다.”

하스드루발은 그와 함께 온 수행원에게 지시해 미리 가져온 검을 대령하게 했다.

그 검은 카르타고 노바의 대장장이들이 우츠 강철을 아낌없이 써서 당시 로마군이 자주 사용하던 켈트식 군용 검의 모양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었다.

필리포스 왕자는 검 날에 우츠 강철 특유의 물결무늬를 보고 흥미를 보였다.

“모양은 흔한 로마의 검이지만 그 물결무늬는 제법 아름답군요.”

“이 검은 로마가 최근 자국의 병사들에게 지급하기 위해 개발한 것입니다. 제작과정이 까다로워서 아직 양산을 하지는 못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라더군요. 한번 이 검과 왕자님의 검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튼튼한지 비교해 보시겠습니까?”

필리포스 왕자는 하스드루발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하! 기가 차는군! 한낱 야만인 잡졸의 무기와 마케도니아 최고의 대장장이가 만든 내 검을 비교하다니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어디 한번 줘보시죠. 내 그대에게 진짜 명검을 보여주겠습니다.”

필리포스 왕자는 내관을 시켜 하스드루발의 검을 가져오게 했다.

검을 받아든 필리포스 왕자는 자신을 호위하던 병사 두 명에게 각각 자신의 검과 하스드루발의 검을 쥐여준 후 두 검을 힘껏 휘둘러 서로 부딪히게 했다.

두 병사가 동시에 있는 힘껏 검을 휘두르자 날카로운 금속음이 알현실의 침묵을 찢었다.

- 쨍그랑!

필리포스 왕자는 자신의 검이 두 동강이 나 대리석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필리포스 왕자를 보고 짐짓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말했다.

“그런 검을 만들 수 있는 적국이 그리스에서 뱃길로 하루거리에 있습니다.”

그 말에 필리포스 왕자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안티고노스 전하께서 원정에서 돌아오시면 바르카 가문과 동맹을 맺자고 진언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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