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 [53화] 국내파를 몰아낼 방법
한니발은 안티오코스 3세와 협약을 맺은 후 카르타고 노바에 있는 아버지에게 병사 3만 명과 전함 50척으로 구성된 해군을 요청했다.
기원전 222년의 봄이 끝나기 전에 한니발이 보낸 서신을 받아든 하밀카르는 즉시 아들들과 부관들을 소집해 명령을 전달했다.
“한니발이 무사히 셀레우코스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이제 제국에 반기를 든 오합지졸들을 제거하는데 도움을 주면 천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는 대제국이 우리의 우방이 된다. 마하르발은 즉시 보병 2만 5천 명과 기병 5천 기를 한니발에게 전달해라.”
그때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하밀카르에게 말했다.
“아버지. 우리 바르카 가문은 히스파니아 원정에 몰두 하느라 해전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일단 본국 해군의 하급 장교들을 불러 수군을 훈련해두긴 했습니다만 해군 지휘관을 누구로 삼으면 좋을까요?”
하밀카르는 장남의 말을 듣고 턱수염을 매만지면서 잠시 고민하다 공정한 하스드루발에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본국에서 오랫동안 해군 장교 경력을 쌓아온 첫째 사위 보밀카르에게 해군을 맡기는 게 가장 좋겠구나. 이 기회에 마고도 큰매형이 지휘하는 함대에서 아우니아와 함께 실전 경험을 쌓도록 해라.”
용맹한 부인과 결혼한 후 몰라보게 늠름해진 마고가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마지막으로 하밀카르는 며칠 전에 마케도니아에서 돌아온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작은 하스드루발은 며칠 푹 쉬어서 여독을 풀고 나 대신 카르타고 노바를 지키면서 병사들을 훈련시키도록 해라. 나는 큰 하스드루발과 함께 이번에 카나리아 제도에 새로 건설한 식민지가 잘 운영되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와야겠다. 네 말대로 사탕수수 농사를 짓기에 딱 좋은 곳이더구나.”
“그럴게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아버지.”
카나리아 제도는 일곱 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진 아프리카 서북쪽 해안에 위치한 제도로 온화한 기후와 비옥한 화산질 토양 덕분에 현대에도 사탕수수 농사를 많이 짓는 곳이다.
또한 카나리아 제도는 히스파니아에서 조금 멀긴 하지만 대서양에 위치한 덕분에 아직 지브롤터 해협 밖에서 항해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로마해군의 약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는 곳이었다.
하스드루발은 카나리아 제도에서 생산하는 설탕을 팔아 번 돈으로 본국 카르타고의 내정을 다질 생각이었다.
‘바르카 가문이 아무리 분투해도 결국 본국 카르타고의 기초체력이 튼튼하지 않으면 로마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지.’
그렇게 하스드루발을 제외한 다른 바르카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해외로 나가 로마 정벌 준비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그중에서도 한니발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지원군과 합류해 안티오코스 3세와 함께 기원전 222의 가을이 끝나기 전에 셀레우코스 제국의 반란군을 모조리 소탕해 버리는 맹활약을 보였다.
한니발의 눈부신 활약 덕에 셀레우코스 제국은 원래의 역사보다 2년 먼저 반란군을 진압했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터키가 있는 아나톨리아 지방 대부분에 세력을 뻗치게 되었다.
그 덕에 카르타고와 셀레우코스 제국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돈독해져 갔다.
한편 하스드루발이 혼자 카르타고 노바에 남아 병사들을 훈련하면서 본국에서 시행할 정책을 구상하고 있던 어느 여름날, 그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평소 사업차 카르타고 노바에 종종 드나들던 카르타고의 오랜 동맹 도시국가 우티카 출신의 페니키아인 무역상 한 명이 그를 만나려고 바르카 가문의 저택을 방문한 것이다.
상인은 저택의 응접실에서 하스드루발을 만나자 머리를 조아리면서 인사했다.
“아히롬의 아들 기스코가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 대리이신 하스드루발 님을 뵙습니다.”
하스드루발은 종종 바르카 가문에 장사하던 도중 알게 된 정보를 가져다주는 무역상이 자신을 만나러 오자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반갑네 기스코. 저번에 만난 후로 거의 3년 만이군그래. 우리 가문의 친구가 이번에는 무슨 정보를 가져왔는지 궁금하군.”
“이번에는 로마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소문을 듣고 바르카 가문에 알려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상인의 말에 하스드루발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듣고 있네. 어서 말해보게.”
“저는 평소 사업상의 이유로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여러 그리스 도시국가에 자주 가는 편인데 얼마 전에 스파르타인 상인에게 요즘 로마가 갑자기 이탈리아반도 남부의 항구에서 전함 수십 척을 생산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상인의 말을 듣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300척에 가까운 많은 전함을 보유한 로마가 갑자기 전함을 늘릴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하다. 로마놈들이 몇 년 전부터 우리 카르타고가 전함을 건조하고 있는 걸 눈치챘나? 그럴 리가 없는데? 카르타고의 군항은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 항아리 모양으로 설계되어 있으니까 말이야.’
하스드루발이 상인에게 자세한 내용을 물었다.
“혹시 언제부터 로마가 전함을 만들기 시작했는지도 들었나?”
“작년 가을부터라고 들었습니다.”
하스드루발은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작년 가을이면 히스파니아 원정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카르타고에서 전함 건조를 시작했을 때잖아. 우연의 일치라고 보긴 어렵겠는데. 본국의 정보가 로마로 새 나가고 있다고 봐야겠군. 아마 국내파 놈들 짓이겠지.’
그는 무역상에게 은화가 가든 든 주머니를 사례로 주었다.
“좋은 정보를 알려주어서 고맙네. 앞으로도 로마해군에 대한 정보를 들을 때마다 바르카 가문에 알려주면 고맙겠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후한 사례에 감사드립니다! 바다를 다스리시는 멜카르트께서 바르카 가문에 순풍을 보내주시길!”
내심 바라던 것을 얻은 상인은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으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저택 밖으로 나갔다.
하스드루발은 국내파에 대한 대책을 궁리하며 곧 돌아올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계절이 바뀌어 초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쯤 하밀카르가 카나리아 제도 식민지의 관리를 공정한 하스드루발에게 맡겨두고 카르타고 노바에 돌아왔다.
하스드루발이 식민지 시찰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를 대문 밖까지 나와 맞이했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아버지! 오시는 길에 바다는 잔잔했나요?”
“오랜만이구나 하스드루발, 다행히 순풍이 불어준 덕분에 별 탈 없이 잘 다녀왔단다. 카나리아 제도의 설탕농장이 아주 잘 돌아가고 있더구나.”
“그거참 잘됐네요. 그런데 아버지. 많이 피곤하시겠지만 바로 들으셔야 할 말이 있어요.”
하밀카르는 하스드루발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음을 예감했다.
“그래 알았다. 그럼 안으로 들어가서 바로 이야기를 들려다오.”
하스드루발은 저택에 들어가서 아버지에게 우티카 출신 무역상이 한 말을 전부 들려주었다.
하밀카르는 아들의 말을 듣고 한숨을 쉬었다.
“네 말대로 국내파 놈들이 로마에 정보를 흘리고 있는 것 같구나. 그게 사실이라면 대 한노 그 작자가 갈 데까지 간 거군. 성군이셨던 한노 대왕께서 타락한 후손을 보고 저승에서 눈물을 흘리시겠어.”
아버지의 말에 하스드루발이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아버지. 전함 건조에 대한 기밀이 유출됐으니 군항에 근무하는 해군들을 하나하나 심문하면 국내파 놈들이 로마와 내통했다는 증거나 증언을 확보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 다음 놈들을 반역죄로 재판에 넘겨야겠어요.”
그라나 하밀카르는 아들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100인회 의원들이 입법자이자 판관이기도 한 걸 잊었느냐? 그동안 우리 해외파가 꾸준히 세력을 늘려왔지만, 아직도 국내파와 해외파 의원의 비율은 반반 정도다. 아무리 확실한 증거가 있어도 무죄가 나오겠지.”
“그럼 어떻게 하면 좋죠? 병사들을 이끌고 무력으로 놈들을 제거하려다가는 로마 정벌을 앞둔 중요한 시기에 내전이 일어나 버릴 수도 있고...”
하밀카르가 고민에 빠진 아들의 등을 손바닥을 한번 세게 후려쳤다.
“아야! 왜 그러세요 아버지!”
비명을 지르는 들에게 하밀카르가 대답했다.
“뭘 고민하고 있느냐! 100인회 의원은 이천 명도 안 되는 대귀족 가문들끼리 밀실에 모여서 뽑으니까 매년 두 계파의 의원 수가 비슷하게 나오고 있지. 그렇지만 너와 한니발의 활약으로 현재 평민들은 대부분 우리 바르카 가문과 해외파를 지지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밖에 없지 않느냐!”
그제야 하스드루발은 아버지의 뜻을 알 수 있었다.
“혹시 내년 수페트 선거에서 해외파 후보 두 명을 당선시킬 생각이신가요?”
하스드루발의 말에 하밀카르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대답을 대신했다.
수페트는 로마의 집정관에 해당하는 카르타고 행정부에서 가장 높은 관직으로 모든 카르타고 시민이 참여하는 선거를 통해 매년 두 명의 수페트를 선출한다.
수페트는 실권도 크지만, 카르타고의 대표자라는 상징성 때문에 두 계파가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며 매년 서로 한 석씩을 나누어 갖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수페트가 실권은 100인회 전원에 비하면 약간 밀리는 자리이긴 하지만 두 자리를 모두 해외파가 독차지하면 얘기가 달라지지. 그렇게만 된다면 수페트가 여론을 주도하기 좋은 자리니만큼 아예 100인회 의원직도 시민들의 직선투표로 뽑게 법을 바꿀 수도 있겠어. 그럼 증거만 찾으면 국내파 놈들을 반역죄로 처벌할 수 있겠지.’
원래의 역사에서 카르타고가 2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한 후 한니발은 본국에 귀국하자마자 수페트에 당선됐다.
그때 한니발은 여론을 주도하여 시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카르타고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00인회 의원직을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직접선거로 뽑게 하고 의원직 연임을 2년으로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는 그렇게 오랜 세월 귀족정 국가였던 카르타고에 잠시나마 기원전 3세기 기준으로는 가장 완전한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국의 경제를 불과 5년 만에 회복시켰다.
하지만 대 한노를 필두로 한 국내파 정치인들은 한니발과 그에게 열광하는 시민들의 미소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국내파는 결국 한니발이 로마와 다시 전쟁을 벌일 준비를 하고 있다며 로마원로원에 밀고 해 그를 카르타고에서 쫓아내고 민주주의를 폐지한 뒤 다시 100인회 의원을 귀족들끼리 밀실에 모여 뽑는 귀족정 국가로 만들어버린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하스드루발은 드디어 국내파를 정계에서 몰아낼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국내파 놈들 딱 기다려라. 원래의 역사에서는 로마에 빌붙어 한니발 형을 쫓아냈지만 이번에는 네놈들이 기댈 외세가 없을 거다.’
잠시 생각을 하던 하스드루발이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 수페트 후보로는 보밀카르 매형과 제 장인 어르신이 되실 하스드루발 기스코 의원님을 내세우면 어떨까요?”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무엇이냐?”
“보밀카르 매형은 이미 수페트에 당선된 경험이 있는 중진 정치인이라 안정적인 무게감이 있어요. 그리고 하스드루발 기스코 의원은 워낙 유명인사라 카르타고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아들의 말에 하밀카르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보밀카르 사위야 문제없이 당선될 것 같구나. 하지만 하스드루발 기스코 의원이 과연 당선될 수 있을까? 유명하고 정치경력이 긴 분이지만 그에 비해 그다지 실적이 없어서 아직 한 번도 수페트에 당선된 적이 없는 걸로 아는데...”
하스드루발은 걱정스러워 하는 아버지에게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부분은 제가 보충할게요. 선거가 치러지기 3개월 전에 카르타고로 넘어가겠습니다.”
그 말에 하밀카르가 아들의 오른쪽 어깨를 두드리며 대답했다.
“바알 함몬께서 또 네게 지혜를 내려주셨구나. 좋다. 이번에도 널 한번 믿어보마.”
하스드루발은 아버지의 신뢰에 미소로 답했다.
‘하스드루발 기스코 의원이 정책을 짤 능력이 없으면 내가 대신 짜주면 되지 뭐. 이번 기회에 현대의 정책 중에서 괜찮은 것들을 카르타고에서 시행해야겠다. 가능하면 그 끔찍한 인신 공양도 폐지하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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