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 [55화] 전쟁보다 치열한 선거전 (2)
하스드루발은 보밀카르에게 국내파 정치인들이 어떤 식으로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지 전해 듣고 분통을 터뜨렸다.
“50살이 넘은 계파 수장이 직접 수페트 선거에 나오는 것도 황당한데 지역유지들에게 뇌물까지 잔뜩 먹이고 있다니? 매형, 그거 불법 아닌가요?”
그의 말에 보밀카르가 고개를 저었다.
“알아봤는데 전례가 없을 뿐이지 불법은 아니었어. 선거운동을 하면서 시민들에게 빵이나 은화를 조금씩 나눠주는 건 카르타고의 전통이나 마찬가지니까 말이야. 감정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지만 법적으로는 문제 될 게 없다고 하더라.”
하스드루발은 매형의 말이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현대였다면 당장 선거법 위반으로 쇠고랑 찼을 텐데 진짜 어이없네. 우리도 국내파를 따라 해야 하나? 아니야. 그놈들을 따라해 봐야 대 한노가 짜놓은 프레임에 말려들어 갈 뿐이다. 우리도 국내파를 따라 하면 그 놈들은 해외파가 평소에 위선을 떨더니 국내파와 별로 다를 것도 없다는 양비론을 펼치겠지.’
그는 해외파의 움직임에 흔들리지 않고 카르타고 노바에서부터 생각해온 선거 전략을 보밀카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에게 권했다.
“국내파가 그렇게 나온다면 우리는 획기적인 정책을 공약으로 내걸어서 시민들의 지지를 모으는 수밖에 없겠네요.”
그의 말에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물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미 전함을 더 건조해서 가난한 카르타고 시민을 해군으로 고용하는 복지정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더 뭘 할 수 있을까요?”
하스드루발은 미래의 장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지금부터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스드루발은 미리 준비해온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보여주면서 두 사람에게 자신이 생각해낸 정책을 설명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과거제도의 도입
현재 사실상 명예직인 24명의 원로원 의원과 가장 강력한 권력집단인 100인회 의원, 그리고 수페트를 제외한 카르타고의 모든 공직에 대한 인사권은 대부분 100인회가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카르타고에서는 업무능력이 떨어져도 단지 100인회 의원을 배출한 명문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중요한 관직을 맡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는 바르카 가문의 남자들을 제외한 카르타고의 장수들이 하나같이 로마의 장수보다 역량이 떨어지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카르타고 시민 누구나 적절한 시험을 보고 행정관리와 장교가 될 수 있도록 하면 이런 폐해를 막고 우수한 부관을 확보할 수 있다.
2. 의무교육 실시
카르타고의 기초교육은 여러 신전의 신관들이 시민의 아들들에게 페니키아 문자로 읽고 쓰는 법과 카르타고의 역사를 가르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신전에 기부할 수 없는 가난한 시민들은 자식들에게 기초교육을 시킬 수 없었다.
카르타고 정부가 시민들 대신 신전에 기부를 하고 모든 시민의 아들들이 읽고 쓰는 법을 배운다면 더 많은 인재가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있게 된다.
3. 100인회 의원 직선제 도입과 연임 제한
입법권과 사법권, 예산안 승인권한을 가진 강력한 권력기관인 100인회 의원직을 시민이 직접 선거를 통해 뽑게 하고 한번에 2년 이상 연임하지 못하도록 해 부패하거나 무능한 의원을 매년 교체할 수 있게 한다.
4. 리비-페니키아인에게 시민권부여
카르타고 시민과 리비아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 리비-페티키아인들은 오랜 세월 중장보병이나 기병으로 활약하며 카르타고군의 중추역할을 해왔다.
그런 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여 로마 시민보다 수가 적은 카르타고 시민의 수를 늘려야한다.
5. 인신공양의 폐지
안 그래도 주변의 강대국보다 부족한 카르타고의 인구를 더욱 줄이고 주변국에게 혐오감을 조장하는 인신공양을 폐지한다.
인신공양은 거의 백 년 전부터 귀족들 사이에서만 행해지고 있는 풍습이고 인신공양 풍습을 혐오스러워해서 카르타고에 발을 들이지 않는 외국인 손님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상인들은 장사에 지장을 주는 악습이 폐지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사실 더 많은 정책을 제안하고 싶었지만 이 정도만 해도 현재의 카르타고 사회에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에 일단 참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두 해외파 수페트 후보는 하스드루발의 설명을 듣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 중 보밀카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 파격적인 정책이구나. 확실히 평민들이 좋아하겠어. 다른 건 해외파 동지들을 잘 설득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긴 한데 인신공양을 폐지하는 건 어렵지 않을까? 신들께서 노하실까봐 걱정 되는데.”
하지만 하스드루발은 그런 카르타고 귀족들의 논리에 이미 대답을 준비해 둔 상태였다.
“물론 고귀한 혈통의 귀족자제를 바치지 않으면 신들께서 노하시겠지요. 그렇지만 불과 백 년 전만 해도 인신공양 말고 다른 방식으로 신께 우리 카르타고의 아들들을 바치는 전통도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보밀카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카르타고 역사에 해박한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면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신성대를 부활시키자는 말씀이시군요! 그 방법이면 인신공양 횟수를 줄이면서도 우리 카르타고를 지킬 최정예부대를 얻을 수 있겠습니다!”
신성대는 기원전 4세기에 활약한 카르타고 최정예부대이다.
신성대는 인신공양의 제물이 되는 대신 평생 군역에 종사하는 조건으로 신전에 소속된 병사가 되어 카르타고를 수호하기로 맹세한 귀족의 자제들로만 구성되었다.
하스드루발은 고개를 끄덕인 후 미래의 장인에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다만 예전의 신성대를 부활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인신공양을 아예 폐지하고 모든 귀족가문의 장남을 신성대의 일원으로 만드는 겁니다.”
과거의 신성대는 오직 바알 함몬 신전과 미의 여신 아스타르테의 신전에서만 모집했지만 하스드루발은 앞으로 모든 카르타고의 신전에서 신성대를 모집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 말에 보밀카르가 환하게 웃으며 감탄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신들의 분노를 사지 않으면서도 카르타고의 어머니들이 더는 어린 자식을 잃고 울부짖지 않아도 되겠구나! 그동안은 예산 부족을 이유로 국내파가 반대하는 바람에 시행할 엄두도 못내는 정책이었지만 요즘 같은 분위기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 이제 정책 홍보만 잘 하면 되겠어!”
하스드루발 기스코도 보밀카르의 말에 맞장구쳤다.
“보밀카르 의원님의 말씀대로 홍보가 중요하겠습니다. 다만 우리도 꽤 오랜 시간 설명을 들어야 이해할 정도로 생소한 정책이 많은데 과연 시민들이 자기 시간을 쪼개 우리의 말을 들어줄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평민들은 항상 먹고사느라 바쁜데 말입니다.”
그 말에 하스드루발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짜고짜 우리의 말부터 들어달라고 하면 시민들을 설득하기 어렸겠지요. 그렇지만 두 분과 시민들이 만나 진솔하게 소통하는 자리를 만들면 카르타고 시민들에게 우리의 정책을 이해시킬 수 있을 겁니다.”
* * *
대 한노는 하스드루발이 카르타고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급해져 선거운동 준비를 서둘렀다.
“15년 전 바르카 가문의 망할 꼬맹이에게 망신을 당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그놈이 또 나를 방해하려고 카르타고에 왔구나. 해외파 놈들이 그놈의 꾀를 빌려 이상한 짓을 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쳐야겠구나.”
대 한노는 즉시 국내파 의원들을 시켜 평민출신 지역유지들에게 막대한 양의 은화를 뿌려 국내파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해외파를 헐뜯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도록 했다.
그는 이런 전략으로 제법 재미를 보면서도 매일 직접 선거운동에 나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국내파가 선거운동을 시작한 지 일주일째 되는 아침, 대 한노는 그날도 집사장을 시켜 외출을 준비하게 했다,
“잠시 후에 시민광장으로 출발할 것이다. 빈민들에게 나눠줄 빵과 은화도 잊지 말고.”
지사장은 대 한노의 명령을 듣자마자 발 빠르게 움직였다.
대 한노는 귀족이 아닌 카르타고 시민이나 외국인과 옷깃이 스치는 것도 불쾌하게 여겼기 때문에 건장한 노예 네 명이 드는 가마를 타고 시민광장으로 향했다.
그는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이 데려온 수행원 수십 명에게 큰 소리로 지시했다.
“빵과 은화를 뿌려라!”
금과 은을 입힌 대 한노의 화려한 가마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행원들이 일제히 시민들에게 재물을 주면서 말했다.
“한노 왕가의 후예이시자 이번 수페트 선거에 출마하신 대 한노 의원님의 선물이다. 감사히 쓰도록 해라.”
대 한노는 평소처럼 많은 시민들이 자신의 주변으로 모여들 것을 기대하며 미소를 지으며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맡기며 가마 위에 편안히 앉아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시민광장이 평소보다 한산해 예상보다 많은 시민들이 자신의 주변에 모이지 않는 것을 의아해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군. 평소 같으면 지금쯤 빈민들이 빵 한 조각이라도 더 받아가려고 내 주변에 개미떼처럼 모여들어야 하는데... 내가 놓친 행사라도 있나? 그럴 리가 없는데. 한 번 알아봐야겠군.”
대 한노는 수행원 중 한 명을 보내 사정을 알아보게 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심부름을 갔던 수행원이 그에게 돌아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 한노 의원님! 해외파의 두 후보가 구 시가지에서 토론회를 열었는데 시민들이 전부 그리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의원님께서 재물을 베푼 자들 중에서 받은 돈을 돌려주고 그리로 가는 이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대 한노는 수행원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귀족들끼리 토론을 하는 걸 빈민들이 왜 보러 간다는 말이냐! 그곳에서 해외파 놈들이 금덩이라도 나눠주고 있다더냐?”
지역유지는 괜히 자신에게 역정을 내는 대 한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런 것은 아니고 해외파의 보밀카르 의원과 하스드루발 기스코 의원이 주점을 하나 통째로 빌려서 간단한 주안상을 차려놓고 그곳에서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 말에 대 한노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함을 질렀다.
“명문귀족의 후손이라는 자들이 빈민들과 술잔을 부딪치면서 수다를 떨고 있다고? 그자들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하스드루발은 전생에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이 벌이던 선거운동을 대부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 정책토론회 만큼은 좋게 생각해왔다.
재래시장에서 장사해온 전생의 어머니가 시간 날 때마다 대형 마트 주말 휴무 법제화를 주제로 하는 정치토론회에 참여하던 도중 실제로 그 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수백 년 동안 정치에서 소외되어 온 고대 카르타고의 시민들도 현대의 재래시장 상인들처럼 처음으로 자신들의 생각이 정치에 반영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열광하며 해외파가 주최한 토론회 장소로 모여들었다.
대 한노는 화가 나서 삶은 문어처럼 얼굴을 붉히면서 수행원들에게 지시했다.
“지금 당장 국내파 지지자들을 그 술집으로 보내 해외파 놈들이 빈민들과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오게 해라! 그놈들의 꿍꿍이가 뭔지 낱낱이 적어오게 하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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