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 [56화] 전쟁보다 치열한 선거전 (3)
대 한노를 비롯한 국내파 100인회 의원 전원은 대 한노에 집에 모여 회의를 하다 해외파가 내건 공약에 시민들이 열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고 있었다.
대 한노는 수하가 가져온 해외파의 공약 내용이 적힌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읽어보더니 그것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소리를 질렀다.
“드디어 해외파 놈들이 실성한 모양이군! 인신공양을 폐지하자니? 그리고 100인회 의원을 빈민들이 뽑게 하자고? 이럴 거면 귀족과 평민을 구분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 자리에 있던 한 국내파 의원도 도화지처럼 창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100인회 의원을 선거로 뽑게 되면 정치에 뜻을 둔 귀족들은 평생 빈민들의 눈치를 보면서 살 수밖에 없을 겁니다!”
다른 의원도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면서 말을 보탰다.
“그뿐입니까? 인신공양을 신성대로 대체하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이럴 거면 뭐하러 비싼 돈을 주고 평민의 아이를 양자로 데려왔단 말입니까? 게다가 귀여운 친자식을 마치 용병이나 속주민처럼 군대에 보내야 한단 말입니다!”
카르타고의 귀족에게는 나라에 큰 재난이 일어났을 때 장남을 신에게 제물로 바쳐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국내파 정치인들은 대부분 미리 장남보다 나이가 많은 가난한 평민의 아들을 돈을 주고 데려와 형식상의 양자로 삼은 후 때가 되면 제물로 바쳐왔다.
그러나 인신공양을 신성대의 부활로 대체하게 되면 신성대에 입대한 자식은 계속 가문을 대표하며 다른 귀족가문과 시민들의 평가를 받게 된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 친자식이 아닌 제물로 바칠 생각으로 데려와 제대로 된 교육도 하지 않은 양자를 대신 보내면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할 것이 분명했다.
대 한노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국내파 의원들에게 말했다.
“이대로 두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모두 지금 당장 일가친척과 우리 지지자 중에서 믿을 수 있는 자들을 최대한 많이 끌어 모으도록 합시다.”
회의실 안에 있는 모든 국내파 의원이 숨을 죽이며 대 한노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사흘 뒤 해외파 놈들의 토론회장으로 찾아갑시다. 더는 놈들의 전횡을 간과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대 한노의 말에도 국내파 의원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들 중에서 한 명이 조심스럽게 대 한노에게 말했다.
“대 한노 의원님. 바르카 가문의 삼남인 하스드루발이 그 토론회에서 사회자 노릇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자는 뛰어난 웅변술로 유명한데 괜히 망신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 말에 대 한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누가 말싸움을 하러 간답니까?”
그 말에 조금 전 말했던 국내파 의원이 굳은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어쩌실 계획이신지...”
대 한노가 마귀처럼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모두 날카로운 비수를 하나씩 품속에 넣어 오십시오. 바르카 가문의 애송이와 해외파 놈들에게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줍시다.”
* * *
한편 해외파의 두 수페트 후보는 정책토론회를 시작한 지 불과 며칠 만에 장소를 구시가지에 있는 주점에서 시민광장 한복판으로 변경하기로 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민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제 며칠 후면 그리스 도시국가의 아고라와는 달리 주로 상업지구의 기능만 하던 카르타고의 시민광장에 처음으로 정치가와 시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일 예정이었다.
토론회를 기획하고 사회를 맡은 하스드루발로서는 기쁜 일이었지만 그는 지금 정보원이 가져다준 소식 때문에 고민에 빠져있었다.
“국내파 100인회 의원들이 닷새 전에 대 한노의 집에 전부 모여서 회의를 연 다음에는 한 번도 안모이고 있다는 말이지. 뭔가 구린내가 나는데.”
현재 국내파는 해외파의 새로운 선거 전략과 공약내용에서 밀려 선거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매일같이 모여서 대책을 세워도 모자랄 판에 별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국내파가 수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혹시 이것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선거에서 질 것 같으니까 암살계획을 짠 다음 쉬쉬하고 있는 거 아니야? 고대에는 그런 일이 흔하잖아.”
하스드루발은 몰락한 로마의 자영농을 되살리려고 농지개혁법을 제안했다가 로마 원로원 의원 수백 명에게 길 한복판에서 쇠몽둥이에 맞아 죽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원로원 건물 안에서 반대파 원로원 의원들이 휘두른 비수에 찔려 죽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떠올리자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보밀카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에게 경호를 강화하라고 조언한 후 자신도 나름의 대책을 세우기로 마음먹고 바르카 가문의 회계담당자인 아훈을 불렀다.
아훈은 보밀카르의 집에 마련된 하스드루발의 방에 들어서면서 인사했다.
“하스드루발 도련님! 아니, 이제 기병대장이 되셨으니 대장님이라고 불러야겠군요. 카르타고에 오신지 열흘이 넘었는데 이제야 저를 찾으시니 섭섭합니다.”
하스드루발은 너스레를 떠는 아훈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미안하네. 고향에 도착하자마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거든. 그리고 이제 카르타고의 유명인사가 되신 아훈님을 용건도 없이 오라 가라 해서야 되겠나?”
그러자 아훈이 너털웃음을 웃은 후 하스드루발에게 대답했다.
“5년 전 하스드루발 대장님께서 저를 거둬주시지 않았으면 전 아직도 그리스어 통역을 해서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하고 있을 겁니다. 저와 제 후손들은 자자손손 바르카 가문에 은혜를 갚겠습니다.”
리비-페니키아인인 아훈은 5년 전 처음 하스드루발이 주최하는 경매행사의 진행을 맡은 이후 바르카 가문으로부터 받은 수수료를 종잣돈으로 삼아 무역사업을 크게 벌였다.
그 후 그가 대귀족 못지않은 자산가가 되기까지는 채 3년이 걸리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아훈은 카르타고의 리비-페니키아인 사회에서 지도자 격 인물이 되었다.
하스드루발은 아훈에게 그를 부를 용건을 말했다.
“자네도 우리 해외파가 이번에 수페트 선거를 위해 내놓은 공약의 내용을 들었겠지?”
“물론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저희가 얼마나 열광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드디어 우리 리비-페니키아인들이 카르타고 시민이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저희에게 투표권이 없어서 아무 도움도 드릴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리비-페니키아인들은 대부분 카르타고 귀족의 서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귀족인 아버지의 지원으로 좋은 교육을 받고 하급 장교나 사업가로 성공하여 사실상 카르타고의 평민들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니키아인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국내파 정치인들 때문에 리비-페니키아인들은 여전히 시민권을 부여받지 못하고 있는 것을 늘 한스럽게 생각해왔다.
“사실 수페트 선거와 관련해서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네.”
“말씀만 하십시오 하스드루발 대장님! 제 자식들이 카르타고 시민으로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도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그럼 자네의 지인들에게 우리 해외파가 주최하는 토론회장의 경호를 부탁하네. 궁지에 몰린 국내파가 폭력사태를 일으킬지도 몰라서 걱정되는데 그렇다고 용병이나 무장한 병사를 동원해서 경비를 서게 하면 시민들이 겁을 먹고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고민 중이네.”
눈치 빠른 아훈은 하스드루발의 말을 금방 알아들었다.
“알겠습니다. 군대복무 경험이 있는 동료들을 구경꾼으로 가장시켜서 토론회가 열릴 때마다 시민광장 주변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아훈이 방문 밖으로 나간 후 하스드루발은 기지개를 한번 켜고 깃털 펜을 들고 빈 파피루스에 뭔가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력도발 대비는 이쯤 해두고 국내파가 우리 공약을 반박할 때 무슨 소리를 할지도 미리 생각해 둬야겠지.”
* * *
하스드루발은 아훈과 함께 경호대책을 세운 후 드디어 시민광장에서 정책토론회를 열었다.
구시가지의 주점에서 토론회를 열었을 때 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그들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두 해외파 수페트 후보자는 하스드루발의 제안대로 토론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시민들의 민원을 경청하기로 했다.
시민들은 사회자인 하스드루발에게 발언권을 얻을 때마다 보밀카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에게 자신의 고충을 얘기했다.
“제가 사는 6층집의 하수도가 터졌는데 집주인이 한 달째 수리를 해주지 않아서 냄새 때문에 살 수가 없습니다.”
“수확 철 직전에는 밀값이 너무 비싸서 먹고살기가 너무 힘듭니다. 제발 어떻게든 해주십시오.”
하스드루발은 서기를 시켜 시민들의 민원과 회의 내용을 모두 받아적게 했다.
말 주변이 부족한 하스드루발 기스코를 대신해 주로 보밀카르가 울상을 지으며 고충을 얘기하는 시민들을 다독였다.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제가 수페트에 당선되지 못하더라도 100인회 의원으로 있는 한 그 문제를 꼭 해결하고 말겠습니다.”
그렇게 민원접수가 끝나고 토론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대 한노가 이끄는 국내파 지지자 수백 명이 시민광장에 들이닥쳤다.
하스드루발은 그들을 보고 아훈이 미리 주변에 배치한 경호원들이 있음에도 경계심을 늦출 수가 없었다.
‘뭐지? 대 한노가 훼방을 놓을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데리고 온 사람 수가 너무 많은데? 저 인간 국내파 정치인들을 거의 다 데려왔잖아.’
시민광장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리자 대 한노가 점잖을 떨며 주변의 시민들을 바라보면서 우렁찬 목소리로 웅변을 시작했다.
“친애하는 카르타고 시민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바르카 가문과 해외파 정치인들의 달콤한 말에 속고 계십니다! 모든 시민이 의무교육을 받게 한다? 인신공양을 대신해 대규모의 신성대를 조직한다? 말은 좋지요! 그런데 여러분께서 간과하시고 계신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 듣기 좋은 정책을 시행할 예산은 어떻게 마련하지요?”
그의 말을 듣고 시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모든 시민의 아들들을 교육하려면 더 많은 신전을 지어야 합니다! 신성대도 마찬가지지요. 지금까지의 관습을 버리고 정규군인 신성대를 부활시키려면 역시 매년 막대한 돈이 필요합니다. 그 돈은 누가 낸다는 말입니까?”
대 한노가 말을 마치자 국내파가 평민들 사이에 미리 섞어두었던 끄나풀들이 해외파를 비난하며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해외파 정치인들이 우리를 속이려든다!”
“시민을 속여 수페트 자리를 독식하려 드는 보밀카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를 십자가에 매달아라!”
대 한노의 선동에 토론회장이 소란스러워졌지만 하스드루발은 국내파가 예산문제를 걸고넘어질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대책도 세워둔 상태였다.
그는 사회자석에서 내려와 대 한노에게서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 서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바르카 가문의 유명한 셋째 아들이 해외파 수장인 대 한노의 앞에 서자 그 자리에 있는 수천 명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면서 주변의 소란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스드루발은 주변이 조용해진 후 여전히 대 한노를 바라보며 결연한 목소리로 시민들에게 말했다.
“새로운 정책을 시행할 예산은 바르카 가문이 냅니다. 바르카 가문이 얼마 전에 카나리아 제도에 사탕수수 농장을 새로 건설한 건 다들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그 농장을 카르타고 정부에 기부하겠습니다. 농장의 연 수입은 5백 달란트 정도로 예상되니 아마 새로운 정책을 추진할 예산이 부족할 일은 없을 겁니다.”
하스드루발의 말에 시민들이 열광하며 환호성을 질러 댔다.
“와아! 역시 바르카 가문이다! 이제 우리 애들도 글을 배울 수 있겠구나!”
그러나 그는 아직 할 말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른손을 높이 들며 시민들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했다.
다시 주변이 잠잠해지자 하스드루발이 열띤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5백 달란트가 매우 많은 돈임을 알고 계실 겁니다. 이 돈만 있으면 전함 50척을 만들 수 있고 시민 3천 명이 일을 하지 않고도 1년 동안 먹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국내파 의원님들이 대농장을 경영해 매년 얻는 수입을 전부 합치면 얼마인지 아십니까? 무려 7천 달란트가 넘습니다!”
그 말에 많은 시민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국내파 의원들이 돈을 많이 벌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엄청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하스드루발은 시민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전 이 자리에 모이신 존경하시는 100인회 의원님들께 제안합니다. 연 수입이 10달란트가 넘는 모든 카르타고의 귀족들은 매년 수입의 10분의 1을 세금으로 바칩시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 카르타고에 내일 자식들에게 먹일 끼니를 걱정하는 부모를 더는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하스드루발이 말을 마치자 시민광장이 평민들이 질러대는 열화와 같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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