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 [57화] 국내파의 자멸
“또 바르카 가문의 애송이 놈에게 한 방 먹고 말았군.”
대 한노는 귀족에게 세금을 걷어 평민들을 위해 쓰겠다는 하스드루발의 말에 열광하는 시민들의 환호성에 파묻힌 채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최악에는 하스드루발과 해외파의 두 수페트 후보를 암살할 생각마저 하면서 이 자리까지 왔지만 그렇다고 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국내파 정치인 수백 명이 한꺼번에 비수를 들고 정적에게 덤벼들 생각은 없었다,
대 한노의 계획은 그가 미리 심어둔 끄나풀들이 해외파 지지자들을 도발해 양측 지지자들 사이에서 몸싸움이 벌어지면 국내파 정치인 중 하스드루발과 수페트 후보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 자가 혼란을 틈타 그들을 비수로 찌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귀족에게 세금을 걷겠다는 한마디에 광장에 있는 시민들의 지지는 완전히 해외파 쪽으로 기울어지고 말았다.
대 한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보밀카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를 보면서 자신의 옆에 있는 측근에게 말했다.
“저쪽을 봐라. 저 교활한 바르카 가문의 어린 뱀이 자기편 에게도 알리지 않고 함정을 파왔던 게 분명하다. 우리가 예산 부족 문제를 걸고넘어질 것을 예상하고 말이지. 지금은 최대한 빨리 이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다.”
사실 한 계파 수장 노릇을 수십 년 동안 해온 자가 아니더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하스드루발과 해외파 의원들을 암살하려 했다가는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분노를 살 거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모인 국내파 정치인 중에서 그런 당연한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자도 없지 않았다.
그런 자들 중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팔티바알이 품속의 비수를 만지작거리면서 먹잇감을 노리는 고양이처럼 서서히 하스드루발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는 부모를 잘 만난 덕에 성인식을 치르자마자 17세에 100인회 의원이 됐지만, 사회경험과 지식이 부족해 지난 2년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해 초조해 하고 있었다.
팔티바알은 국내파의 수장이 해외파에게 망신을 당한 지금 해외파의 수페트 후보를 죽이면 대 한노가 자신을 총애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함성을 지르며 보밀카르에게 돌진했다.
“이야아아아!”
대 한노는 자신의 무리 중에서 누군가가 비수를 꼬나잡고 보밀카르에게 달려드는 것을 보고 기겁하면서 소리쳤다.
“그만둬 이 미친놈아!”
그러나 이미 아드레날린에 뇌를 지배당한 팔티바알은 대 한노의 절박한 외침을 미처 듣지 못했다.
하스드루발은 보밀카르에게 달려드는 팔티바알을 보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멍청한 국내파 자식들! 네놈들의 실수 고맙게 받아 먹어주마!’
이미 전장에서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긴 하스드루발에게 제대로 된 군사훈련도 받아본 적 없는 팔티바알의 비수를 막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하스드루발은 멧돼지처럼 정면으로 보밀카르의 가슴을 찔러오는 비수를 든 손을 오른손으로 가볍게 잡아챈 다음 왼팔의 팔꿈치로 팔티바알의 턱을 강하게 후려쳤다.
“억!”
팔티바알은 턱이 깨지면서 정신을 잃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하스드루발은 팔티바알이 떨어트린 비수를 높이 들어 올린 후 천둥처럼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국내파 정치인들이 해외파의 100인회 의원을 살해하려 한다! 저들을 모두 체포하고 품속에 숨긴 비수를 빼앗아라!”
하스드루발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아훈이 미리 토론회장의 인파 속에 배치해 둔 리비-페니키아인 경호원 200명이 국내파 정치인들에게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국내파 정치인은 리비-페니키아인 경호원보다 수가 두 배 이상 많았지만, 노예에게 채찍을 휘두를 때 빼고는 무기를 다뤄본 적 없는 그들이 카르타고 육군 최고의 정예부대인 북아프리카 중장보병대에 복무했던 그들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제야 사태를 파악하고 분노한 시민들도 경호원들을 돕기 시작하자 국내파 정치인들은 무력하게 제압당하면서 품속에 숨겨두었던 비수를 빼앗겼다.
대 한노는 하나둘 체포되는 동료들을 허망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 2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국내파의 최후가 이렇게 허망할 수는 없다...”
그 때 하스드루발이 대 한노의 눈앞에 나타나 미소 지으며 말했다.
“더 험한 꼴 당하기 전에 그만 포기하고 품속의 비수를 버리시지요 대 한노 의원님. 아! 지엄한 국법에 따르면 100인회 의원을 살해하려고 음모를 꾸민 자는 모든 관직이 박탈되지요? 이젠 대 한노 ‘씨’라고 해야겠네?”
대 한노는 국내파를 파멸시킨 하스드루발이 자기 눈앞에서 깐족거리자 결국 이성의 끈을 놓고 말았다.
“이 가증스러운 자식!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네놈만은 죽이고 말겠다!”
대 한노가 고함을 지르며 품속의 비수를 꺼내 들고 하스드루발의 가슴을 세차게 찔렀다.
그러나 대 한노의 비수는 하스드루발이 튜닉 아래에 입고 있던 경번갑에 막히고 말았다.
대 한노는 그제야 하스드루발이 국내파의 습격에 처음부터 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그에게 저주를 퍼부으려 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의 주먹이 대 한노의 복부를 파고들었기 때문에 그럴 겨를이 없었다.
“커헉!”
대 한노는 입에서 침을 흘리며 도끼질 한 번에 넘어가는 썩은 고목처럼 시민광장 한복판에 쓰러졌다.
* * *
국내파 정치인들이 시민광장 한복판에서 해외파의 중진 100인회 의원인 보밀카르와 하스드루발을 암살하려 했다는 소식은 강풍을 등에 업은 들불처럼 빠르게 카르타고 시내에 번져나갔다.
이로써 그나마 성군 한노 대왕의 업적을 기억하여 그 후손인 대 한노를 지지하던 시민들조차 국내파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렸다.
수만 명의 시민이 체포된 국내파 정치인들을 가둬둔 감옥 주변으로 몰려와 그들을 처벌하라고 소리쳤다.
“대낮에 길거리에서 살인을 저지르려 한 국내파 놈들을 사형시켜라!”
“전쟁영웅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칼로 찌른 대 한노를 십자가에 매달아라!”
그때 하스드루발은 100인회의 의회 건물에서 해외파 100인회 의원들이 감옥에 가둬둔 국내파 정치인들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 위한 재판에 참여하고 있었다.
본래 카르타고에서의 재판은 수페트와 100인회 의원만 참여할 수 있지만 해외파 의원들은 이번 사건에서 큰 공을 세운 하스드루발의 참여를 특별히 허락하기로 했다.
로마의 재판제도와는 달리 카르타고에서는 피고인에게 중대한 죄를 범했고 이미 증거와 증인이 충분한 상황에서는 피고인에게 변론기회를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국내파 정치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먼저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해외파 100인회 의원 중에서도 최연장자인 아도니바알이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하스드루발 님. 그대의 재치가 아니었다면 보밀카르 의원님과 하스드루발 기스코 의원님을 지키고 국내파를 카르타고 정계에서 몰아낼 수 없었겠지요. 저 바렉바알의 아들 아도니바알이 해외파 동료들을 대표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 말을 듣고 하스드루발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고 내가 계파수장의 아들이어도 미리 상의도 없이 깜짝 정책발표 하는 건 선 넘었다고 뭐라 할 줄 알았는데 그냥 넘어가 주네. 정말 다행이다.’
그동안 해외파 정치인들은 국내파가 노예와 리비아인들을 착취해 대농장을 경영하는 걸 반대해 왔다.
그들이 성인군자라서 그랬던 게 아니라 평소에 국내파에게 착취당하던 노예와 속주민은 카르타고가 적국의 침략을 받을 때면 반란을 일으켜 외적에게 힘을 보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상인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뼛속까지 배어있는 해외파 정치인들은 자신의 수입에서 10%를 세금으로 바치는 것이 아깝긴 했지만, 그 대가로 국내파를 몰아내고 카르타고의 속주 정책을 개선해 나라의 우환을 제거할 수 있다면 오히려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마음 한편의 걱정을 던 하스드루발이 밝은 표정으로 아도니바알에게 대답했다.
“아도니바알 의원님의 과분한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상황이 급박 했다고는 하지만 해외파 선배 정치인 여러분께 상의드리지 않고 선거 후보자도 아닌 제가 시민들 앞에서 공약을 발표한 것에 대해서 사죄드립니다. 앞으로 경험이 부족한 제게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하스드루발의 말에 아도니바알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유능하신 분이 겸손하기까지 하시군요. 제 손자놈이 하스드루발 님을 반만 닮았어도 걱정이 없겠습니다. 그럼 여담은 나중에 하고 회의를 시작합시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보밀카르 의원님을 암살하려 한 국내파 일당 502명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입니다.”
젊은 해외파 의원인 야다밀크가 오른손을 들어 을 아도니바알에게 발언권을 얻은 후 동료 의원들에게 말했다.
“전례를 살펴보면 수페트와 원로원 의원, 그리고 100인회 의원을 살해하거나 살해하려 한 자는 모든 관직에서 박탈한 후 십자가형에 처하고 그 가족들은 재산을 몰수하고 하고 카르타고에서 추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피고인 502명을 모두 십자가에 매달아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스드루발은 그 젊은 의원의 말에 공감했지만 동의하지는 않았다.
‘그 많은 국내파를 한꺼번에 사형시키면 내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로마 원정이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 카르타고가 불바다가 되면 곤란하지.’
국내파가 부패한 정치인들이고 평민들 사이에서 별로 인기가 없긴 했지만, 그래도 200년 이상 카르타고에 뿌리 내려온 세력이었다.
그들은 지금 당장은 가족이 투옥되어 있고 분노한 시민들의 기세에 밀려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나 502명이나 되는 국내파 정치인들에게 십자가형이 선고되면 국내파 정치인들의 가족들이 죽기 살기로 힘을 모아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아직 정규군이 없는 카르타고는 반란군을 제때 진압하지 못하고 불길에 휩싸이게 될 게 뻔했다.
하스드루발은 해외파 의원들에게 조금 더 좀 더 완화된 처벌을 제안했다.
“야다밀크 의원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502명이나 되는 국내파를 한 번에 사형시키면 내전이 일어나 엘리사 여왕께서 카르타고를 세우신 비르사 언덕이 불바다가 될 수도 있습니다. 대 한노를 비롯한 국내파의 중진은 십자가형에 처하되 다른 피고인들은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연륜이 있는 해외파 의원 대부분이 하스드루발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 재산을 몰수한다 해도 고대의 행정력으로는 국내파가 국외에 보관하고 있는 재산까지 압류할 수는 없다.
아도니바알은 하스드루발의 의견에 따라 국내파에게 목숨을 부지하는 길을 열어주어 내전을 피하기로 마음 먹었다.
하스드루발이 발언을 마치자 아도니바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하스드루발 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다른 동료 의원님께서 다른 의견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아도니바알을 제외한 해외파 의원 50명은 침묵으로 하스드루발의 의견에 동의했다.
아도니바알은 동료 의원들의 면면을 한 번 씩 둘러보고 판결을 내렸다.
“그럼 만장일치로 100인회 의원에 대한 살인미수죄로 대 한노를 포함한 국내파 중진 열 명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하고 나머지 피고인들과 피고인들의 재산을 몰수 및 추방형을 선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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