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 [58화] 소포니스바와의 만남
십자가에 매달린 대 한노의 모습은 허망했다.
서지중해 최강의 해양대국이었던 카르타고의 최고 권력자였던 자가 시민광장 한복판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힘없이 죽어있는 모습에는 그를 증오해온 사람도 머릿속에 ‘인생무상(人生無常)’ 네 글자를 떠올리게 하는 처연함이 묻어있었다.
하스드루발은 비르사 언덕 위에 있는 보밀카르의 집 테라스에서 죽은 대 한노를 바라보며 눈시울을 조금 붉혔다.
그토록 증오했던 숙적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에는 끝이 있고 자신이 그토록 지키고자 애쓰는 카르타고도 언젠가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새삼스러운 진실이 눈물샘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저 인간이 죽으면 마냥 후련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네. 기원전 3세기에 있던 나라 중에서 멸망하지 않은 나라는 결국 하나도 없었지. 스키피오 아이밀리우스의 심정이 이제 좀 이해가 되는구나.”
그는 로마의 명장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3차 포에니전쟁이 끝난 후 화염에 휩싸여 재로 변해가는 카르타고를 보면서 조국 로마도 언젠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카르타고처럼 사라져 갈 것 아니냐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를 떠올린 후 그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하스드루발은 머릿속에 눌어붙어있는 잡념을 씻어내기 위해 카르타고의 서늘한 밤바람을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가 미리 준비해둔 포도주로 입술을 적셨다.
그 때 그의 등 뒤에서 갓 짜낸 비단처럼 부드러운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을 섞지 않고 포도주를 마시면 금방 취하실 텐데요.”
하스드루발이 귓불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그의 눈동자에 약혼자인 소포니스바가 비쳤다.
국내파의 폭주로 선거운동이 일찍 끝나버렸기 때문에 하스드루발은 예정보다 두 달 정도 빨리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카르타고의 밤바다처럼 잔잔하게 출렁이는 검고 긴 머리에 전신에 진주가루를 바른 것 같은 흰 피부, 그리고 조각 같은 이목구비와 몸매를 가진 그녀의 모습은 카르타고 최고의 미녀라는 명예로운 별칭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녀의 매력은 빼어난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이 세상에 위대하신 신들 말고 영원한 것은 없지요. 하지만 그 유한함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짧은 삶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면서 역사를 자아내는 것 아닐까요?”
하스드루발은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본 소포니스바에게 감탄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네요.”
소포니스바는 화사하게 웃으면서 그에게 대답했다.
“테라스의 창문이 활짝 열려서 찬바람이 들어오고 있는 걸 보면 시민광장에서 십자가형을 당한 죄인들을 보고 계셨을 텐데 하스드루발 님이 그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가지실 분은 아니시잖아요? 그런데도 침울한 표정으로 술을 마시고 계신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죠.”
소포니스바는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원래의 역사에서 약혼자였던 마실리 부족의 마시니사 왕자 대신 로마의 동맹을 맺고 카르타고를 공격하던 마사에실리 부족의 왕 시팍스와 결혼하게 된 그녀는 남편을 설득해 로마를 배신하고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게 한다.
그런 그녀의 노력에도 결국 카르타고와 마사에실리 부족이 모두 로마와 마실리 부족의 연합군에게 패배하자 당시 마실리 부족의 왕이 된 마시니사는 빼앗겼던 약혼녀 소포니스바를 되찾고 그녀와 결혼한다.
그러자 그녀가 마시니사 왕을 설득해 로마를 배신하게 할까봐 걱정하던 스키피오는 마시니사에게 소포니스바를 포로로서 로마에 보내라고 요구하고 그는 부인이 치욕을 당하게 할 수 없어 독을 먹고 자살하게 한다.
하스드루발은 자신도 모르게 비극적인 운명을 빗겨가게 된 절세미녀를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내가 뭐라고 천년 뒤의 일을 걱정하고 있냐. 저런 미녀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낳은 손자 손녀들이 별 탈 없이 살 수 있을 정도만 기반을 쌓는 데 집중해야지. 그 정도만 해내려고 해도 죽을힘을 다해야 할 텐데 말이야.’
그는 소포니스바와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그녀에게 포도주를 권했다.
“소포니스바 님 말씀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네요. 마침 바그라다스강 유역에서 빚은 좋은 포도주인데 같이 한잔 하시면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요?”
그러자 소포니스바는 조금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하스드루발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아차! 이 시대에 여자한테 한잔하자는 건 [우리 집에서 라면 먹고 갈래?]나 마찬가지지! 아무리 약혼한 사이라도 명문 귀족가문의 여자한테는 모욕적으로 들렸을 수도 있겠어!’
아니나 다를까 소포니스바는 하스드루발의 제안을 정중하게 인사하며 거절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제 아버지와 보밀카르 의원님의 회의가 슬슬 끝나가겠네요. 술자리는 다음 기회에 함께하시는 게 좋겠어요. 예를 들면 내년에 결혼식을 올리고 난 후 첫날밤 이라든가.”
하스드루발은 소포니스바의 뼈있는 말에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런 그에게 다가오더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면 다시 입을 열었다.
“저 그렇게 쉬운 여자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지금은 이 정도로 참아주세요.”
소포니스바는 까치발을 들어 하스드루발의 볼에 키스하고 그와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더니 그대로 뒤돌아 사뿐 사뿐 방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하스드루발은 얼굴이 불에 달군 쇠처럼 빨개진 채 중얼거렸다.
“결혼은 그저 인생의 무덤이라고 생각했는데... 한번 살아서 무덤 들어가 볼만하겠는데? 신혼생활 얼마 못 즐기고 다시 전쟁터로 나가야하는 게 안타깝다. 로마를 최대한 빨리 정복해야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군.”
* * *
하스드루발의 활약으로 카르타고에서 국내파가 추방된 지 어느덧 2개월이 흘렀다.
보밀카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갑자기 등장한 중도파 후보와 경쟁을 벌이긴 했지만, 압도적인 표차이로 수페트에 당선된 후 선거운동 기간 동안 내걸었던 공약을 모두 이행하기 시작했다.
하스드루발도 그런 매형과 미래의 장인을 돕기위해 좀 더 카르타고에 남아 본국의 내정을 더 다지기로 결심했다.
그는 카르타고 노바에 서신을 보내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후 직선제로 바뀐 100인회 의원직에 출마해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전체 103명의 의원 중 1위로 당선되었다.
그는 기원전 221년의 첫 100인회의 회의가 열리자 동료 의원들을 설득해 선거운동 기간에는 국내파의 견제 때문에 시행이 불가능 할 거라고 생각했었던 정책 두 가지를 제안했다.
“존경하는 동료 100인회 의원 여러분. 우리는 우리 손으로 무너뜨렸던 여러 북아프리카 속주 도시에 다시 성벽을 지어야 합니다. 또한 속주민의 세율을 연 수입의 10분의 1로 낮추고 속주민에게 참정권을 제외한 카르타고 시민에게 주어지는 모든 권리를 부여할 것을 제안합니다.”
카르타고는 지금까지 국내파의 주도로 피정복지의 성벽을 모두 무너뜨리고 속주민이 다시 성벽을 짓는 것을 금지해왔다.
평시에 연 수입의 25%, 전시에는 연 수입의 50%라는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는 속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도 금방 진압할 수 있도록 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외적이 침입했을 때는 방어시설이 없는 북아프리카의 속주가 속수무책으로 적에게 함락당하는 데다 반란을 일으킨 속주민이 적군에 합류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이런 단점을 개선하여 혹여 전쟁 도중 로마군이 북아프리카를 공격해도 카르타고의 정치인들이 바르카 가문의 도움 없이 본토를 방어할 수 있도록 하고 속주민에게 로마의 라틴시민권과 비슷한 지위를 인정해 그들이 카르타고에 소속감을 느끼도록 하고자 했다.
국내파 의원들이 사라진 지금 카르타고의 100인회에 그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의 다음 의견은 약간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밀은 시민들의 생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카르타고와 속주에서 생산되는 모든 밀을 정부가 사들여서 비축해 두었다가 춘궁기에 시민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파는 정책을 시행해야 합니다.”
그는 현대의 추곡수매제도를 카르타고에 도입할 것을 동료 의원들에게 제안했다.
추곡수매제도를 시행하면 일부 부자들이 수확기에 밀을 싼값에 사들였다가 춘궁기에 가난한 시민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
그러나 추곡수매제도는 장사로 이윤을 남기는 것을 중시하는 카르타고인이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정책이었다.
해외파 의원 중에도 평소 밀 사재기로 재미를 보고 있던 자들이 없지는 않았기 때문에 곳곳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격이 쌀 때 사서 비쌀 때 파는 것은 장사의 기본이다! 상인이 돈을 버는 길을 막는 건 카르타고의 전통에 어긋난다!”
“바르카 가문의 아드님께서 이번만큼은 실언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수페트와 100인회 의원을 겸직하고 있어 그 자리에 참석한 보밀카르가 처남의 편을 들었다.
“존경하는 동료 100인회 의원 여러분. 카르타고의 시민들은 국내파가 품속에 비수를 숨기고 저잣거리에서 우리 해외파 정치인을 살해하려고 할 때 용감히 나서서 그들을 제압했습니다. 이 자리에는 저와 함께 그 자리에 계셨던 분도 적지 않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안전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시민들의 생계를 보장할 정책을 그저 돈을 벌기 위해 반대하실 생각이십니까?”
보밀카르의 말에 추곡수매제도를 반대하며 목청을 높이던 몇몇 의원들이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았다.
하스드루발은 회의가 끝나고 큰매형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매형 정말 고맙습니다! 솔직히 국내파도 없는데 추곡수매제도를 반대하는 의원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보밀카르가 하스드루발에게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고맙기는. 난 처남이 아니었으면 두 달 전에 새파랗게 어린 국내파 애송이의 칼에 찔려 죽을 수도 있었는데 뭘.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난 처남이 생각해낸 정책에 찬성했을 거야. 추곡수매제도를 시행할 예산은 전에 시민들에게 약속한 대로 귀족에게 걷은 세금으로 마련하면 딱 좋겠어.”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이제 카르타고에 끼니 걱정 하는 시민이 많이 줄어들 거예요.”
“다 처남 덕분이지. 난 이제 집에 돌아갈 건데 처남은 어떻게 할 거야? 또 군사훈련?”
하스드루발은 큰매형의 질문에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그래야죠. 올해는 카르타고 노바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저와 함께 기마궁술을 연습하던 누미디아 기병들을 아예 카르타고로 불렀거든요. 먼 길 온 사람들을 헛걸음하게 만들 수는 없죠.”
보밀카르는 처남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그를 격려했다.
“뭐든 다 잘하는 데는 이유가 있구나.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마. 건강 해치면 큰일이니까.”
“그럴게요. 고마워요 매형.”
하스드루발은 보밀카르와 헤어진 후 이제는 궁기병이 되기 위해 등자를 받아들인 누미디아 기병들을 데리고 카르타고의 성문 밖으로 나갔다.
이미 일반적인 기마궁술에는 제법 익숙해진 하스드루발과 누미디아 기병 500명의 목표는 마상에서 편전을 다루는 것이었다.
애기살이라고도 불리는 편전은 통아 혹은 덧살이라고 부르는 반으로 쪼갠 나무대롱에 덧붙인 채로 활로 쏘는 짧은 화살로 일반적인 화살보다 뛰어난 관통력을 자랑하는 조선의 최종병기라 할 만한 무기이다,
편전은 잘못 다루면 화살이 팔에 박히는 사고를 당하기 때문에 굉장히 배우기 어렵지만 하스드루발은 어떻게든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누미디아 기병들의 존경을 받을 만큼의 기술을 쌓기로 다짐했다.
‘전생에 티브이에서 봤을 때는 편전이 스테인리스 쟁반도 관통했어. 제대로 배우기만 하면 나무로 만든 로마군의 스큐툼이나 사슬갑옷 정도는 그냥 뚫어버릴 거야. 앞으로 개전까지 3년 남았다. 좀만 더 고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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