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 [59화] 다시 카르타고 노바로
기원전 221년의 초여름 어느 날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은 쿠리아 호스틸리아에서 본래 예정에 없었던 회의를 열었다.
카르타고의 국내파 관계자 몇몇이 국내파가 해외파와 시민에 의해 추방당하고 대 한노를 비롯한 지도자급 인물들이 십자가형을 당한 것을 알려왔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가장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이하 푸블리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요의원들에게 카르타고를 압박할 것을 호소했다.
“카르타고의 해외파는 우리의 동맹인 국내파 인사들을 살해하거나 추방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카르타고에 대한 모든 정보망과 통제력을 잃었습니다. 카르타고가 다시 로마를 위협하지 못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 카르타고 100인회에 사절을 보내 추방한 국내파 관계자들에게 몰수한 재산을 돌려주고 그들을 다시 복권 시키지 않으면 로마와의 전쟁을 각오하라고 전해야 합니다.”
다른 로마 원로원 의원들도 대부분 점차 영향력이 커지는 카르타고와 바르카 가문을 견제해야 한다는 그의 의견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견제 방법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을 하는 의원이 많았다.
푸블리우스의 정치적 경쟁자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가 그의 말에 대답했다.
“이번에는 의원님의 말씀에 일부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스키피오 의원님, 우리 로마 원로원과 카르타고 국내파는 양국의 시민들이 모르게 은밀히 손을 잡은 사이였음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국내파의 복권을 카르타고에 강요할 명분이 없습니다.”
푸블리우스는 티베리우스의 말에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리며 약간 언성을 높였다.
“우리가 언제는 명분이 있어서 카르타고에게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빼앗았습니까! 지난 전쟁에서 7년 동안 한 번도지지 않은 하밀카르의 계파가 카르타고의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그 자가 우리에게 보복하기로 마음먹기 전에 힘으로라도 카르타고의 고삐를 휘어잡아 우리 로마에게 덤빌 생각을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 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푸블리우스에게 말했다.
“심정적으로는 스키피오 의원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강제로라도 카르타고의 내정에 관여할 여력이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로마는 오래전부터 갈리아와 일리리아 원정에 막대한 예산과 병력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지금 그 지역에 배치된 군단을 철수시켜 카르타고를 견제하는데 투입한다면 지금까지의 노력은 물거품이 될 겁니다.”
다른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파비우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파비우스는 원래의 역사에서 한니발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할 때 독재관과 집정관에 차례로 선출되어 로마군이 그의 군대와 싸우는 것을 피하면서 끈질기게 청야전술을 펼친 로마의 명장이다.
그는 타고난 신중한 성격답게 카르타고에서 벌어진 이변에도 로마가 현재 얻을 수 있는 정보 안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자 티베리우스가 파비우스의 말에 맞장구쳤다.
“파비우스 의원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게다가 얼마 전에 바르카 가문과 셀레우코스 제국이 동맹을 맺었다고 괜히 카르타고를 직접 압박하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미 일리리아 지역을 두고 마케도니아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지 않습니까?”
파비우스가 티베리우스와 눈을 마주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역시 티베리우스 의원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스키피오 의원님의 말씀대로 카르타고와 바르카 가문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도 찝찝한 일입니다. 바르카 가문의 본거지인 카르타고의 히스파니 속주 한가운데에 있는 우리 동맹도시 사군툼의 친 로마파 정치인들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고 바르카 가문의 움직임을 철저히 감시할 것을 제안합니다.”
파비우스의 말에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하고 원로원 회의가 끝났다.
회의가 끝난 후 푸블리우스는 힘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대문을 열고 들어오자 마당에서 그와 이름이 한 글자도 다르지 않고 똑같은 아들이 로마 기병의 검 스파타와 같은 모양으로 만든 나무 검을 휘두르며 검술 연습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나무 검을 휘두르는 15세 소년이 바로 원래의 역사에서 하스드루발과 한니발을 상대로 차례로 승리를 거두고 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승리로 이끈 명장 스키피오였다.
푸블리우스는 아버지가 돌아온 줄도 모르고 검술 연습에 몰두하는 아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우리 소(小) 스키피오가 오늘도 열심히 검술연습을 하는구나.”
스키피오는 그제야 푸블리우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집에 돌아온 아버지에게 인사했다.
“어? 아버지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연습하는 데 집중하다가 오시는 줄도 몰랐네요!”
“그래. 조금 전에 왔는데 네가 연습하는 모습을 잠시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단다. 낮에 가르쳐준 검술동작을 벌써 익혔구나.”
“뭐 그냥 원래 있는 동작을 따라 하는 거니까 어렵지 않더라고요.”
프블리우스는 그런 아들을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스키피오는 모든 면에서 뛰어났지만, 특히 한번 본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가 그대로 모방하는 재능은 천재적인 수준이었다.
방금 그가 연습하고 있던 검술도 배운지 몇 시간 만에 그토록 완벽하게 따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프블리우스가 아들의 등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어서 자라서 우리 스키피오 가문을 빛낼 장군이 되도록 해라. 언젠가 조국 로마가 네 힘을 필요할 때가 올 것 같으니까 말이다.”
* * *
로마 원로원이 사군툼의 친 로마파를 지원하며 히스파니아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을 때 하스드루발은 100인회 의원 임기를 마치고 소포니스바와 결혼한 후 함께 배를 타고 카르타고 노바로 돌아왔다.
두 사람이 탄 배가 카르타고 노바의 남쪽 해안선에 지어진 항구에 들어설 때 소포니스바가 높은 성벽을 보고 놀라면서 말했다.
“이야... 도시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은데 성벽 높이는 카르타고 못지않네요.”
하스드루발도 눈을 크게 뜨고 성벽을 올려다보면서 아내의 말에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소포니스바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남편의 옆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여기서 10년 넘게 사신 거 아니었나요?”
“그렇기는 한데 작년에 카르타고 노바를 떠날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아르키메데스 선생님 축성기술 솜씨도 정말 대단하시네.”
카르타고 노바는 동쪽과 남쪽은 바다로 가로막혀있고 서쪽은 석호(원래 바다였던 지역이 산호초나 퇴적물 때문에 바다와 고립되면서 생긴 염분농도가 높은 호수가 자리 잡은 덕에 북쪽만이 육지로 연결되어있어 방어하기 쉬운 천혜의 요새이다.
원래의 역사에서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노바 서쪽의 석호가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수심이 얕아져 걸어서 건널 수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특공대를 조직해 비교적 낮았던 북쪽 성벽을 넘어 순식간에 카르타고 노바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이제 하스드루발의 제안에 따라 아르키메데스가 카르타고 노바의 북쪽 성벽을 카르타고와 같은 높이인 13m로 증축하고 그 위에는 각종 투석기와 로마군의 스콜피오와 비슷한 소형 발리스타를 설치한 덕분에 카르타고 노바는 기습으로는 함락하기 어려운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다.
하스드루발이 배에서 내리자 하밀카르가 항구까지 나와 두 사람을 맞이했다.
하밀카르는 오랜만에 만나는 아들을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
“어서 와라 우리 작은 하스드루발! 지난 1년 3개월 동안 정말 고생 많았다!”
“아버지! 그동안 건강하셨죠? 건강해 보이셔서 맘이 놓이네요. 소개할게요. 제 아내 소포니스바에요.”
하스드루발이 배에서 내리고 있는 아내를 소개하자 모두의 시선이 소포니스바에게 쏠렸다.
카르타고를 넘어 북아프리카 최고의 미녀라는 명성에 걸맞은 그녀의 미모에 항구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스드루발은 항구에 있는 병사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면서도 뭔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아내를 바라보는 시선에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어쩌겠어. 내가 저놈들 입장이었어도 눈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었겠지. 나중에 연병장 20바퀴 도는 정도로 봐주자.’
소포니스바가 다소곳하게 시아버지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버님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아내 소포니스바입니다.”
하밀카르는 처음 만나는 셋째 며느리를 환영했다.
“반갑구나.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다. 과연 소문대로 미의 여신이신 아스타르테 못지않은 미인이구나. 앞으로 함께 잘 지내보자.”
세 사람은 항구에서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함께 저택으로 돌아갔다.
소포니스바는 바르카 가문 사람 모두와 인사를 나눈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특유의 친화력으로 바르카 가문 사람들과 금방 가까워졌다.
장남인 공정한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 노바에 있는 바알 함몬 신전의 신성대 지휘관이 되어 군사훈련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스드루발은 형 한니발과 동생 마고하고만 회포를 풀었다.
한니발은 하스드루발에게 마고와 함께 셀레우코스 제국에서 반란군을 진압했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반란군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후예를 자처하면서도 기병을 제대로 쓸 줄 모르더군. 게다가 적군의 주력인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 방진은 유기적으로 움직이기 어려운 약점을 이용하니 그리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었어. 우리 군에서도 더는 마케도니아식 장창보병은 쓰지 않는 게 좋겠어.”
알렉산더 대왕도 애용했었던 마케도니아식 장창보병은 길이가 약 5m가 넘는 창 사리사로 무장한 보병이다.
그동안 카르타고의 북아프리카 중장보병은 사리사로 무장하고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 방진을 사용해 적과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한니발은 아군과 비슷한 무장을 갖춘 적과 싸워봄으로써 로마와의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카르타고군 주력부대의 단점을 미리 깨달을 수 있었다.
마고는 수백 년째 카르타고의 정예보병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병종을 없애는 게 마음에 걸렸다.
“다른 대안 없이 그래도 괜찮을까? 그래도 사리사를 든 보병들이 그동안 꽤 많은 활약을 해왔는데.”
하스드루발은 그런 형제들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형 말이 맞아. 앞으로 북아프리카 중장보병의 무장을 바꿔보자.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경번갑을 입히고 지금까지 쓰던 것보다 튼튼한 원형방패와 팔카타를 쓰게 하는 건 어때?”
한니발은 하스드루발의 말에 동의했다.
“로마 군단병의 무장을 모방한 건가? 기동성과 방어력을 모두 갖출 수 있으니 괜찮은 방법이네.”
사실 하스드루발은 머릿속에 로마 군단병이 아닌 조선 초기의 정예보병인 팽배수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지만, 형제들에게 속내를 말할 수는 없었다.
그때 마고가 한니발에게 말했다.
“그럼 당장 훈련을 시켜야겠네. 참! 한니발 형, 셀레우코스 제국에게 답례로 받은 선물을 작은 하스드루발 형에게 보여줘야지.”
“아, 그렇지. 밖으로 나가자 하스드루발. 보여줄 게 있어.”
그는 한니발과 마고를 따라 저택 밖으로 나가 바르카 가문의 마구간으로 향했다.
하스드루발은 마구간에 도착하자마자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어? 코끼리가 왜 이리 많아? 아니 그보다 코끼리 덩치가 엄청 크네!”
한니발이 감탄하는 하스드루발에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왕이 반란진압을 도와준 답례로 인도코끼리를 백 마리 선물했어. 우리 카르타고의 코끼리보다 훨씬 크고 힘센데도 성격은 더 온순해서 다루기도 쉽더군. 로마와의 전쟁에서 분명 큰 활약을 할 거야.”
셀레우코스 제국은 오랜 세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도의 마우리아 제국과 친하게 지내면서 인도코끼리를 수입해 전투코끼리로 훈련시켜 왔다.
카르타고가 전쟁에 사용해온 코끼리는 현대에는 멸종한 북아프리카 숲 코끼리인데 로마의 검투사에게 검에 찔려 죽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다른 코끼리보다 덩치가 작고 힘이 약해 갑옷을 입히거나 등에 사람을 많이 태울 수 없었다.
반면 인도코끼리는 북아프리카 코끼리보다 훨씬 덩치가 크고 힘이 세서 중장갑을 입힐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을 등에 태울 수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중장갑을 걸친 인도코끼리가 로마군의 화살과 투창을 튕겨내며 적 보병진을 박살 내는 장면을 상상하자 가슴이 뛰었다.
‘이제 마지막 준비만 남았다. 로마 놈들이 갈리아와 일리리아 원정에 국력을 더 낭비할 때까지 우리는 힘을 비축하면서 때를 기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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