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 [60화] 폭풍전야
원래의 역사와는 달리 공정한 하스드루발 암살시도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스드루발은 큰형 주변에 수상한 낌새가 없다는 정보원의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하긴 원 역사에서는 켈트족 암살자에게 당하지만, 지금은 히스파니아의 에브로강 이남을 우리 가문이 다 평정했으니 켈트족이 감히 우리 큰형을 건들 생각을 할 수는 없었겠지.”
큰 근심을 던 하스드루발은 마음 놓고 카르타고 노바에서 형제들과 함께 치열하게 군사를 훈련하고 전함과 병기를 생산했다.
하밀카르는 아들들이 숙적 로마를 공격하기 위해 칼을 가는 동안 히스파니아 속주의 목젖이라 할만한 위치에 있는 로마의 동맹도시 사군툼을 확보하기 위해 친카르타고파 사군툼 정치인들과 열심히 교류하면서 하스드루발의 조언대로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 사는 켈트족인 보이족과 인수브레스족에게 은밀히 사절을 보내 동맹을 맺었다.
본국 카르타고 정부도 바르카 가문이 로마와의 전쟁을 시작했을 때 시칠리아를 공격하고 지중해를 넘어오는 로마군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전함을 생산하고 수군과 신성대를 훈련하면서 리비아 속주 여러 도시에 다시 성벽을 세우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렇게 카르타고와 바르카 가문은 하스드루발의 노력 덕분에 나날이 로마군보다 좋은 장비를 갖추고 혹독한 훈련을 받은 정예병을 양성해 나갔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로마를 앞지를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본국에서 온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들여다 본 후 한숨을 쉬면서 한니발에게 말했다.
“리비-페니키아인에게 시민권을 줬는데도 카르타고 시민권자가 15만 명이 안 되네. 로마는 동원할 수 있는 병사만 75만 명 정도인데 말이야.”
그는 로마군의 진정한 무서움은 압도적인 인구에서 나오는 엄청난 병력임을 잘 알고 있었다.
원래의 역사에서는 2차 포에니 전쟁을 거치며 로마군은 카르타고의 인구보다도 많은 무려 50만 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주력군이 증발할 때마다 같은 수의 병력을 충원해서 결국 한니발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몰아냈다.
그러나 한니발이 아무리 천재라도 미래의 역사지식이 없는 이상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로마인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가 큰 회전에서 몇 번 이기고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와 마을을 쉴 새 없이 약탈하다 보면 결국 백기와 올리브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우리에게 항복해올 거야. 로마의 동맹시도 대부분 로마연합에서 이탈할 거고 말이야.”
상대가 로마가 아닌 다른 지중해 세계의 국가였다면 한니발의 의견은 지극히 합리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원래의 역사에서 지중해 세계 최강대국 중 하나였던 셀레우코스 제국은 로마와의 전쟁에서 단 한 번 큰 패배를 겪은 후 다시는 로마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스드루발은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다.
“로마를 그리스계 국가하고 똑같이 생각하면 안 돼. 그리스인하고 달리 로마인들은 아주 집요한 구석이 있거든. 170년 쯤 전에 브렌누스 왕이 로마를 침략했을 때를 생각해봐. 로마의 일곱 언덕 중 카피톨리노 언덕만 빼고 전부 켈트족이 점령한 상황에서도 7개월이나 농성하던 인간들이라고.”
동생의 말을 듣고 한니발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 말도 일리가 있어. 로마군을 쳐부순 다음 로마 원로원과 강화 조약을 맺고 지중해를 되찾을 생각이었는데, 최악의 경우에는 로마의 일곱 언덕을 불바다로 만들어야 할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둬야겠군.”
한니발의 말을 듣고 하스드루발은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인류역사상 최고의 명장이 2차 포에니전쟁 대전략에서 가장 큰 오판을 눈치 챘군.’
그는 한니발이 자기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을 때 머릿속의 전략을 계속 설명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반드시 제해권을 확보해서 이탈리아 반도를 공격하는 우리 주력군이 해상으로 보급을 받아야 해. 하지만 본국의 군대가 시칠리아에 전초기지를 충분히 확보하기 전까지는 해상보급을 기대하지 말자.”
한니발은 이번에도 하스드루발의 말을 바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우리는 야만의 땅 갈리아를 지나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공격할 생각이잖아. 로마가 많은 전함을 보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시칠리아 전체에 해상봉쇄망을 구축할 수는 없어. 본국의 해군이 보급 정도는 바로 해줘야 해.”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에 말에 고개를 저었다.
“형. 카르타고 해군은 지난 20 년간 셀레우코스 제국의 반란을 진압할 때 적 수송선을 공격한 것 말고는 실전경험이 없어. 하지만 로마 해군은 겨우 4,5 년 전 그리스 일대를 공포에 몰아넣던 일리리아의 해적 떼를 소탕하면서 경험을 많이 쌓았다고. 아군을 너무 과대평가하지 마.”
원래의 역사에서 본국 카르타고 해군은 전략적 요충지인 시칠리아에 해군기지를 확보하지도 못한 채 무리하게 한니발에게 보급을 전달하고 이탈리아 반도의 해안도시를 약탈하려다가 그만 2차 포에니전쟁 초기에 로마 해군에게 대패해 거의 모든 전력을 잃고 만다.
그 후 전쟁이 15년이나 지속되는 동안 한니발은 본국으로부터 단 한 번 충분치 않은 해상보급을 받았을 뿐이었다.
하스드루발은 본국 카르타고의 해군과 육군 전력이 강해진 지금이라면 한니발이 이끄는 군대가 이탈리아 반도를 초토화 시키는 동안 본국의 해군이 시칠리아 해안도시를 치고 빠지는 전략으로 차근차근 실전경험을 쌓으면 적어도 시칠리아 남서부 정도는 본국의 카르타고 해군이 한니발의 도움 없이도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한니발은 동생의 말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지만 지금까지 하스드루발의 말이 틀렸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내키지는 않지만 네가 하는 말이니 믿어야겠지. 그래도 우리가 이탈리아 반도 안에 근거지를 마련할 때까지 본국의 해군이 시칠리아 서부 정도는 확보해 줘야 해. 히스파니아에서 이탈리아 반도까지의 보급선을 확보하는 건 시간도 오래 걸리고 로마군의 공격에 쉽게 노출되니까 말이야.”
그의 말에 하스드루발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야. 우리가 이탈리아 반도 남부를 점령하면 내가 카르타고로 건너가서 큰매형이 잘 키워둔 해군과 신성대를 이끌고 시칠리아를 완전히 점령하고 해상보급로를 완성할게. 그동안 아버지와 큰형은 해안선을 따라 이탈리아 반도로 진격하고 마케도니아가 북동쪽에서 공격하면 로마도 버텨내지 못할 거야.”
한니발은 동생의 말을 듣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그렇게 바르카 가문이 치열하게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하는 동안 세월이 흘러 어느덧 기원전 218년이 찾아 왔다.
바르카 가문은 히스파니아에 보병 15만 명과 기병 3만 기, 그리고 인도코끼리 100마리와 북아프리카 숲 코끼리 100마리로 구성된 대군을 거느리게 됐다.
해군도 꽤 강해져서 히스파니아에 전함 50척, 본국 카르타고에 전함 80척을 보유하게 되었다.
원 역사에서 2차 포에니전쟁 당시 카르타고가 보유했던 전함의 두 배에 가까운 전력이지만 로마도 카르타고가 해군전력을 늘리자 자극을 받고 전함을 더 건조해 현재 300척이 넘는 대함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바르카 가문은 돈이나 목재가 아니라 카르타고의 고질적인 문제인 인구 부족 때문에 당장은 더 이상의 전함을 보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 노바의 군항에 있는 신형전함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바로 아르키메데스의 불꽃을 뿜어댈 화염방사기를 장착할 갤리선 열두 척이었다.
사시사철 따듯한 카르타고 노바에도 약간 쌀쌀한 바닷바람이 부는 1월 말 어느 날 하스드루발은 아르키메데스와 함께 드디어 완성된 화염방사기 열두 개가 갤리선의 선미에 장착되는 것을 지켜보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선생님! 드디어 완성하셨군요! 그동안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선생님은 정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세요!”
그러나 아르키메데스는 하스드루발의 칭찬에도 불만을 터뜨렸다.
“그렇게 대단한 발명품을 왜 저렇게 작고 이상하게 생긴 배에 달고 난리야? 16단노선은 아니더라도 그 흔해 터진 5단노선에는 달아줘야 할 거 아니냐!”
하스드루발이 새로 만든 배는 노가 3열이고 길이가 50m를 훌쩍 넘는 고대 지중해의 일반적인 전함인 5단노선과 달리 노가 2열밖에 되지 않았고 보통 길이도 겨우 35m 정도였다.
“특히 저로 세로로 단 삼각돛! 저게 아주 마음에 안 들어! 내가 70년 가까이 살면서 배에 세로돛을 단 건 또 처음 보네!”
하스드루발은 장난감을 뺏긴 어린애처럼 툴툴거리는 아르키메데스를 보면서 미소 지었다.
‘천재 아르키메데스도 배에 대해서는 잘 모르나 보네. 하긴 트레뷰셋 만큼은 아니어도 꽤 시대를 앞서나간 물건이니까.’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르키메데스를 달랬다.
“이건 제가 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개발한 신형전함이에요. 제작방법을 개발하는 데만 십 년이 걸리고 이걸 다룰 수 있는 선원을 훈련하는데 또 3년 넘게 걸린 귀한 물건이죠.”
그러나 그 말을 듣고 아르키메데스는 하스드루발을 의심으로 가득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개발한 신형전함은 바로 서기 6세기에 처음 지중해에 등장하는 동로마제국의 주력전함 드로몬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었다.
드로몬은 얼핏 보기에는 고대 카르타고와 로마의 주력전함인 5단노선과 3단노선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물건임을 알 수 있었다.
고대의 갤리선은 마치 레고를 조립하듯 미리 제작한 부품을 끼워 맞추는 장부맞춤식으로 제작되었지만 드로몬은 마치 동물의 갈비뼈 모양과 비슷한 뼈대를 먼저 제작하고 그 위에 나무판을 덧대는 방식으로 제작되기 때문에 적 전함의 충각 공격에도 어느 정도 버틸 정도로 선체가 유연하고 튼튼했다.
게다가 신형전함에는 고대의 커다란 사각형 가로돛이 아닌 달리 삼각형 세로돛을 달아놓은 덕분에 역풍이 불 때도 준수한 속도로 항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장점이 큰 만큼 단점도 뚜렷했다.
5단노선보다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생산단가가 비싸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삼각돛은 사각돛보다 다루기가 훨씬 복잡하고 까다롭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런 이유로 하스드루발은 수년 전 아버지에게 부탁해 카르타고 최고의 선원을 엄선해 그들이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삼각돛 다루는 법을 익혀가며 신형전함에 익숙해지게 했다.
그는 오랜 고생 끝에 완성된 꿈의 전함을 보면서 희망과 불안을 함께 느꼈다.
‘분명 지중해 최강의 전함이지만 한 척이라도 잃으면 피해가 너무 커. 다른 것보다 삼각돛을 다룰 줄 아는 선원은 아직 카르타고 노바에 있는 수백 명 뿐이니까 말이야. 아르키메데스의 불꽃도 선생님이 제자 대여섯 명만 데리고 손으로 만드니까 아껴 써야하고. 이건 정말 결정적인 해전에만 투입해야겠다.’
아르키메데스는 혼자 감상에 빠져있는 하스드루발을 보면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저 이상하게 생긴 배 이름은 뭐냐?”
하스드루발은 드로몬 이외의 이름을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카르타고의 배에 ‘달리는 자’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이름을 붙이는 것도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지중해를 혼자 집어삼키려는 야심을 가진 괴물 로마를 물리치기 위한 배니까..., 고대에 가장 유명한 괴물 살해자라면 역시 그거지.’
하스드루발은 계속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는 아르키메데스에게 대답했다.
“멜카르트라고 짓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르키메데스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멜카르트면 그리스의 헤라클레스 말이군. 그래. 내 발명품을 달려면 그 정도 이름은 지어줘야지.”
하스드루발이 아르키메데스의 말을 듣고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는데 총독 관사를 지키는 병사 한 명이 숨을 헐떡이면서 두 사람을 향해 달려왔다.
하스드루발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병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병사는 간신히 숨을 고른 다음 그에게 대답했다.
“사군툼의 친 로마파 정치인들이 친 카르타고파 시민들을 학살했다고 합니다. 하밀카르 총독님께서 전 바르카 가문의 고급장교는 군사회의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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