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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62화 (62/201)

[ 62 ] [61화] 사군툼 공방전 (1)

사군툼의 친 카르타고파 시민이 학살당했다는 병사의 말을 듣고 하스드루발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사군툼이 있는 북쪽을 노려보았다.

‘로마의 앞잡이 놈들! 아버지께서 그렇게 피를 안 보고 좋게 해결하려고 하셨는데 결국 저질렀군! 원래의 역사대로 전원 노예로 팔려갈 때쯤에야 정신을 차리겠지.’

하스드루발은 페니키아어를 못 하는 아르키메데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급히 히스파니아 총독부로 달려갔다.

그가 총독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간 후 몇 분 지나지 않아 모든 형제와 바르카 가문의 고급장교가 집무실 한가운데 놓인 원탁에 둘러앉았다.

모든 바르카 가문의 장수들이 모이자 하밀카르가 눈을 부릅뜨고 두 팔이 떨릴 정도로 주먹을 꽉 쥐면서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평소에 서신을 주고받으며 지내던 사군툼 시민 한 명이 조금 전 카르타고 노바에 도착했다. 로마의 개들이 사군툼에 있는 우리 친구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학살과 약탈을 일삼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말에 한니발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이런 도발을 내버려두면 히스파니아의 모든 부족이 바르카 가문을 우습게 여길 겁니다! 지금 당장 군사를 일으켜 사군툼에 불을 질러 지도에서 지워 버려야 합니다!”

그러자 장남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도 한니발의 말대로 사군툼을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도시를 재로 만들어 버리는 건 좀 아깝네요. 사군툼은 좋은 위치에 자리 잡은 덕분에 중계무역으로 히스파니아 동부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사군툼의 친 로마파를 겁준 다음 협상을 해 도시를 떠나게 하면 그 좋은 위치에 지어진 도시는 우리 것이 될 겁니다.”

경제적 이득을 중시하는 카르타고인 다운 의견이었다.

오랫동안 공정한 하스드루발에게 영지 관리와 병참에 대해 배워온 마고도 큰형의 의견에 동의했다.

“저도 큰형과 같은 생각입니다. 사군툼의 친 로마파 놈들이 재산을 챙겨서 도시를 떠날 때 강도로 변장한 병사에게 그들을 약탈하게 하면 도시도 얻고 전리품도 많이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하스드루발은 그저 순하던 막내 마고가 꽤 음험한 전략을 생각해 내는 것을 보고 내심 놀라고 말았다.

‘마고만은 순수한 채로 남아 줬으면 했건만... 이 시국에 그런 걸 바라는 건 역시 사치구나.’

하밀카르는 세 아들의 말을 들은 후 하스드루발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마고의 말대로 하면 실리를 챙길 수는 있지만, 과연 친 로마파 놈들이 순순히 도시를 버리고 떠날지 모르겠구나. 작은 하스드루발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스드루발은 마음 같아서는 마고의 의견을 따르고 싶었지만 지금은 산적 흉내를 낼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돈보다 시간을 아낄 때입니다. 우리는 최대한 빨리 사군툼을 처리하고 로마로 진군해야 합니다. 사군툼을 점령하는데 시간을 너무 지체하면 우리는 이탈리아 반도에 발도 들이지 못하고 히스파니아에서 로마군과 싸우게 될 겁니다.”

하스드루발의 말을 듣고 하밀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며칠 전 보이족의 밀사가 앞으로 몇 달 후면 보이족이 인수브레스족과 함께 이탈리아 북부에서 반란을 일으킬 거라고 전해 왔다. 이미 몇 년 전 로마와 싸우고 항복했었던 보이족이 끌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겠지. 작은 하스드루발의 말대로 사군툼을 속전속결로 함락시키는 게 좋겠다.”

한니발의 군대가 배를 타고 이탈리아 반도에 상륙하려면 카르타고 해군이 로마의 대함대와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전면전을 치러야 했고 1차 포에니전쟁에서 로마 전함 수백 척을 바다 밑으로 가라앉힌 지중해의 변덕스러운 날씨에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다.

인구가 많은 로마와는 달리 주력군단이 지중해를 건너다 태풍을 만나 전멸하기라도 한다면 바르카 가문은 적과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쟁에서 지게 된다.

반면 로마군을 따돌리고 히스파니아를 벗어나 알프스에 빠삭한 보이족의 안내를 받으면서 알프스산맥을 넘는다면 예측 가능한 위험과 피해를 감수하고 적의 허를 찌를 수 있다.

그러나 이 전략은 로마군이 보이족의 반란에 발이 묶여 있을 때 빠르게 한니발의 군대가 빠르게 히스파니아를 벗어난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한니발의 군대가 육로로 히스파니아를 벗어나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로마군이 한니발을 막기 위해 배를 타고 이탈리아 반도에서 바르카 가문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히스파니아 북동부 해안에 상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더 적게 걸리기 때문이다.

하밀카르는 드디어 마음을 정하고 근엄한 목소리로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에게 명령했다.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당장 사군툼의 성벽 안에 숨어있는 로마의 개들을 끄집어내서 처단해라! 카르타고와 바르카 가문의 친구를 해치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전 지중해에 널리 알려라!”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아버지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병사와 병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원래의 역사에서는 한니발은 로마가 먼저 카르타고에 선전포고하도록 유도하려고 일부러 사군툼을 8개월에 걸쳐 천천히 공략했다.

바르카 가문이 먼저 로마에 선전포고를 했다가는 카르타고에 있는 국내파에게 자신을 반역자로 몰수 있는 명분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르타고에서 국내파가 일소된 지금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사군툼을 천천히 공략할 이유가 없었다.

두 형제는 최대한 빨리 이번 전투를 끝내기 위해 물자와 병력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니발이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보병 6만 명에 적 기병의 기습을 대비하기 위한 누미디아 궁기병 2천 기와 신성대 중기병 3천 기를 동원하면 한 달 안에 사군툼을 함락시킬 수 있을 거다.”

하스드루발이 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야. 트레뷰셋도 제일 큰놈으로 다섯 대쯤 가져가고 다른 공성 장비도 챙길게. 아깝긴 하지만 아르키메데스의 불꽃도 아낌없이 퍼부어야겠어.”

* * *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부지런히 원정을 준비해 기원전 218년 3월 초에 6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카르타고 노바의 성문을 나서 사군툼으로 향했다.

약 2주 정도의 행군 끝에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 앞에 그리 높지 않은 산자락에 이중으로 성벽을 두른 사군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 처음 출전하는 신성대 소속의 부관 한 명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산 위에 지어진 요새를 보고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드디어 사군툼이 보입니다. 꽤 튼튼해 보이는 요새로군요.”

하스드루발은 그동안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운 데다 100인회 의원 경력까지 있었기 때문에 이번 전투부터 기병대장이 아닌 장군으로서 전장에 서게 되었다.

그는 부관의 말에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저런 건 몇 년 전 한니발 장군님과 내가 함께 공략한 누만티아에 비하면 요새라고 부를 수도 없다. 여름이 시작되기 전에 얼른 함락시키고 카르타고 노바로 돌아가도록 하자.”

그러나 하스드루발의 격려에도 방금 그에게 말을 건 부관을 비롯한 카르타고군의 표정이 여전히 밝지만은 않았다.

하스드루발과 나란히 부대의 맨 앞에서 말을 타고 가던 한니발도 병사들이 유난히 겁을 먹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하게 병사들의 사기기 떨어져 있군. 아무래도 사군툼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로마를 겁내고 있는 모양이야.”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의 말을 듣고 나서야 병사들이 겁을 먹은 이유를 깨달았다.

‘그렇구나! 지금의 카르타고군은 대부분 시민권자이거나 시민과 비슷한 권리를 누리고 있어. 로마와의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패배하고 가진 걸 모두 잃을까 봐 무서운 거구나.’

원래의 역사에서 한니발은 대부분 시민권이 없는 병사들에게 로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면 카르타고 시민권을 준다고 약속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지금의 카르타고군은 하스드루발의 개혁으로 리비-페니키아인에게 시민권이 주어지고 원래 카르타고 시민인 신성대도 많이 포함되어있었다.

게다가 카르타고는 얼마 전 시민의 힘으로 국내파를 몰아내고 귀족정에서 그리스식 민주정 국가가 되고 추곡수매제를 실시해 주식인 밀의 가격이 안정되면서 지중해에서 평민들이 살기에 가장 좋은 나라가 된 참이었다.

또한 북아프리카나 히스파니아의 속주민 병사들도 여전히 참정권이 없고 카르타고 정부에 약간의 세금을 내야 했지만 그 이외에는 카르타고 시민과 완전히 동등한 권리를 누리게 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평화와 풍요를 잃고 싶지 않았다.

결국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사군툼의 목전에 도착했을 때 병사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오랫동안 바르카 가문을 섬긴 리비-페니키아인 병사 중에서 가장 선임인 병사 대여섯 명이 막 말에서 내린 총사령관인 한니발에게 몰려와 언성을 높이며 따졌다.

“한니발 장군님! 그동안 저희는 하밀카르 총독님께서 20년 도 전에 시칠리아에서 로마군과 싸우실 때부터 지금까지 바르카 가문을 섬겨왔습니다. 위대하신 바알 함몬께 맹세코 그동안 저희는 한 번도 바르카 가문의 명령을 거역한 적이 없지만, 이번만은 명령에 따를 수 없습니다. 사군툼을 공격하면 로마와 다시 전쟁을 벌여야 합니다! 그동안 바르카 가문과 카르타고 시민들이 이뤄온 모는 걸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요!”

40대 초중반의 베테랑 병사들은 1차 포에니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어 아무리 죽여도 메뚜기떼처럼 끝없이 몰려오는 로마군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한니발은 그런 리비-페니키아인 고참병들을 무섭게 노려보면서 말했다.

“언제부터 자네들이 지휘관이 되었지? 착각하지 마라. 너희는 수족이지 머리가 아니다. 수족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머리의 지시를 무시하면 잘라낼 수밖에 없지.”

말을 마친 한니발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맨 앞에 있던 고참병의 목을 겨누었다.

청춘을 전장에서 보내면서 여러분 죽을 고비를 넘긴 리비-페니키아인 고참병들도 한니발의 흉흉한 기세에 눌려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형의 모습을 보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마키아벨리가 로마사 논고에서 한니발 형을 공포와 경외심으로 군대를 완벽하게 통제한 장군이라고 적어놨었는데 몇 번을 봐도 맞는 말이야. 효과적이지만 형 말고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방법이지. 기왕이면 우리 병사들이 어느 장군 밑에서도 열심히 싸우게 하는 게 좋겠어.’

하스드루발은 당장에라도 검을 휘두를 기세인 한니발을 말렸다.

“형. 굳이 내가 병사들에게 한마디만 할게. 저자들의 처벌은 그때까지만 미뤄 줘.”

그의 말에 한니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검을 거두었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고참병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스드루발은 즉시 전군을 모아놓고 급하게 나무판자로 만든 단상 위에 올라 연설을 시작했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이여! 그대들에게 묻겠다! 우리는 왜 로마를 정벌하려 하는가?”

그의 외침에 병사들이 곳곳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복수!”

“빼앗긴 지중해를 되찾아야 한다!”

소란이 끊이지 않자 하스드루발은 오른손을 높이 들어 병사들을 조용히 시켰다.

“모두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바르카 가문이 막강한 로마를 공격하려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다! 바로 현재 우리가 가진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다!”

그 말에 모든 병사들이 숨죽이며 그의 말에 귀기울기이기 시작했다.

“로마는 전 지중해에 세력을 뻗쳐나가고 있다! 놈들은 갈리아와 일리리아를 완전히 집어삼키고 나면 반드시 히스파니아와 북아프리카를 노릴 것이다! 로마의 치하에서 카르타고 시민은 자유와 권리를 강탈당하고 노예처럼 살게 될 것이다!”

하스드루발은 잠시 말을 멈추고 병사들의 면면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카르타고 시민이여! 로마가 우리에게서 시칠리아를 빼앗은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민주주의의 파괴다! 로마는 시칠리아의 그리스 식민도시에서 평민으로 구성된 민회를 해산하고 귀족들에게 권력을 몰아주었다! 그대들이 불과 몇 년 전에 조국 카르타고에서 몰아낸 국내파와 같은 귀족 정치인들에게 말이다.”

하스드루발의 말에 카르타고 시민권을 가진 병사들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이번에는 속주 출신 병사들 쪽을 바라보면서 우렁차게 외쳤다.

“나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위대하신 바알 함몬께 맹세한다! 조국 카르타고의 존립과 시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로마를 물리치고 나면 그때까지 목숨을 바쳐 바르카 가문과 함께한 모든 속주민과 그의 가족 전원에게 시민권을 부여할 것이다! 모두 힘을 합쳐 괴물 로마를 쓰러뜨리고 민주공화국 카르타고를 지키자!”

하스드루발의 연설에 고무된 6만 명의 병사들의 심장에서 우러나온 외침이 전 지중해에 울려 퍼졌다.

“카르타고 민주공화국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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