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 [62화] 사군툼 공방전 (2)
하스드루발의 연설이 끝난 후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두 장군의 지시에 따라 하나의 생명체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니발은 가장 먼저 사군툼 주변에 목책을 세워 포위하도록 지시했다.
“사군툼의 성벽은 옆으로 길게 늘어진 모양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을 성벽으로 둘러싼 형태로 지어져 있다. 누만티아 때처럼 단단한 포위 요새를 지을 필요는 없지만, 목책을 둘러 적의 경기병이나 정찰병의 움직임을 막아야 한다.”
병사가 많았기 때문에 목책 공사는 불과 일주일 만에 마무리되었다.
그동안 하스드루발은 카르타고 노바에서 데려온 기술자 250명에게 초대형 트레뷰셋 다섯 대를 설치하게 했다.
그는 카르타고에 있는 6층 건물보다도 커다란 트레뷰셋이 완성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약탈전쟁을 연례행사처럼 벌여온 용맹한 아레바키족도 트레뷰셋 한 대의 공격에 얼마 못 버텼지. 드러누워서 밥 먹는 나약한 그리스 놈들이 트레뷰셋 다섯 대가 쏘아대는 화염탄에 얼마나 버틸지 기대되는군.”
* * *
바르카 가문이 포위망을 펼치며 숨통을 조여 오자 사군툼의 원로원 의원들은 의회건물 안에 모여 소란을 떨기 시작했다.
그들은 바르카 가문의 명장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천혜의 요새 누만티아를 겨우 몇 달 만에 함락시킨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군툼에서 가장 부유한 원로원 의원 클리투스가 절박한 목소리로 동료 의원들에게 외쳤다.
“지금 우리 사군툼의 성벽 바로 앞에 알렉산드리아의 등대만큼이나 거대한 투석기가 다섯 대나 지어졌습니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께서도 카르타고인들이 저 투석기 단 한 대만 가지고도 그 험한 요새도시 누만티아를 손쉽게 함락시킨 것을 잘 알고 계신 줄로 압니다. 로마에 지원군을 재촉하든 카르타고와 협상을 하든 당장 무슨 수를 내야 합니다!”
클리투스의 말에 안 그래도 소란스러웠던 사군툼 의회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기 시작했다.
“오오 전능하신 제우스시여! 저들의 끔찍한 전쟁무기를 위대한 번개로 태워주소서!”
“신께 기도하는 건 신관에게 맡기면 됩니다! 우린 회의를 하러 왔지 기도회를 열러 온 게 아니잖습니까!”
그 때 한 젊은 의원이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사군툼 원로원의 의장격인 알카에우스에게 소리쳤다.
“로마! 로마의 지원군은 대체 언제 오는 겁니까! 알카에우스 의원님! 그렇게 가만히 계시지 말고 말씀 좀 해주십시오! 겨우 두 달 전에 친 카르타고파를 숙청해도 로마가 우릴 지켜줄 거라고 호언장담하시지 않았습니까!”
알카에우스는 젊은 원로원 의원의 말에 아교로 붙여놓은 듯 잘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열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로마에 보냈던 사절이 어젯밤에 카르타고군의 포위망을 간신히 뚫고 돌아왔습니다. 지금 이탈리아 반도 북부의 켈트족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우리를 지원하려던 로마군단이 반란 진압에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로마 원로원은 바르카 가문에 항의하기 위해 카르타고 노바로 사절을 보냈으니 기다리라는 말만 하더군요.”
알카에우스가 말을 마치자 사군툼 원로원 의회 건물을 무거운 탄식이 가득 메웠다.
젊은 의원이 다시 따지듯 알카에우스에게 말했다.
“그럼 대체 이 일을 어찌한다는 말입니까! 우린 누만티아의 야만인들처럼 항복할 수도 없습니다! 카르타고인들은 우리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우린 이미 친 카르파고파 놈들을 전부 도륙 냈으니 말입니다!”
그 말이 끝난 후 사군툼 원로원 의원들은 소모적인 책임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기 답답했던 클리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동료 의원들에게 말했다.
“이대로 로마의 지원군만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께서 저에게 바르카 가문과 조약을 맺을 권한을 일임해 주신다면 카르타고군의 군영에 가서 적장 한니발과 정전협상을 하고 오겠습니다.”
그는 사군툼에서 악명이 자자한 정도는 아니더라도 대체로 재물 욕심이 많고 자기중심적이라는 평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카르타고군이 사군툼을 파괴하기라도 하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이 다름 아닌 그였기에 원로원 의원들은 그의 능력이나 동포애가 아닌 그의 탐욕에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알카에우스는 동료 의원들과 그리 길지 않은 논의를 한 후에 클리투스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사군툼 원로원을 대표해 클리투스 의원님에게 조약체결권을 일임하겠습니다. 부디 아테나 여신께서 의원님께 카르타고인을 설득할 지혜를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클리투스는 사군툼 원로원으로부터 받은 은 접시나 귀한 옷감 등의 귀중품을 가득 채운 수레 열 대를 끌고 카르타고군의 군영으로 향했다.
클리투스는 군영에 들어서서 주변을 둘러보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서로 말도 안 통하는 여러 나라와 부족출신의 병사가 섞여 있는 군대가 이렇게나 규율이 엄정 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저 투석기는 가까이서 보니까 더 무시무시하구나. 전염병이라도 갑자기 돌지 않는 한은 절대 로마에서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없겠어.”
그는 번쩍이는 경번갑을 입은 신성대 병사의 안내를 받으며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있는 막사에 들어선 후 두 형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했다.
“탁월한 군재로 전 지중해에 이름을 떨치고 계신 한니발 장군님과 하스드루발 장군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사군툼 원로원의 일원인 클리투스입니다.”
한니발은 의자에 앉은 채 클리투스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면서 말했다.
“바르카 가문의 친구를 길거리에서 가축처럼 죽인 살인자가 무슨 일로 나를 보러왔지?”
클리투스는 한니발의 위압감에 기가 눌려 고양이 앞의 쥐처럼 벌벌 떨면서 간신히 대답했다.
“친 카르타고파 시민을 해친 것에 대해 사군툼 원로원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 끔찍한 일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원로원의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일입니다. 바르카 가문과 사군툼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 약소한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클리투스는 말을 마치고 막사 밖에 있는 수레를 공손하게 손으로 가리켰다.
수레에 실린 재물은 전 지중해에서 부유하기로 유명한 바르카 가문의 아들들이라도 내심 놀랄 정도로 값진 것들이었다.
수레를 보기 위해 막사 밖으로 나온 두 형제가 재물에 관심을 느끼고 있는 것을 눈치챈 클리투스는 조금 용기를 얻어 말을 이어나갔다.
“저희 사군툼과 평화협정을 맺어주신다면 로마와 연을 끊고 바르카 가문의 속주 도시가 되어 매년 500달란트의 은을 바르카 가문에게 바치겠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클리투스가 내건 조건은 꽤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지중해 세계의 제왕들과 담판을 지어본 경험이 있는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클리투스와 사군툼 원로원이 이 위기만 모면하고 나면 다시 로마의 편에 설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한니발이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치면서 대답했다.
“사군툼 원로원이 한 가지 조건만 받아들인다면 전 사군툼 시민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클리투스는 한니발이 자신의 술수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말씀만 하십시오! 어떤 조건이든지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자 한니발이 냉소적인 미소를 보이면서 대답했다.
“사군툼으로 돌아가서 너희 동포들에게 각자 입을 옷 두 벌만 가지고 도시를 떠나야 한다고 전해라. 사흘 안에 전 재산을 도시에 남겨두고 떠나면 바르카 가문 병사들의 검에 사군툼 시민의 피가 묻을 일은 없을 것이다.”
하스드루발은 전생에 사료에서 읽었던 한니발의 말을 듣고 팔에 소름이 돋았다.
‘글로 읽을 때도 패기 넘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들으니 아주 상남자가 따로 없구나.’
그러나 이번에는 클리투스도 한니발의 카리스마에 주눅 들지 않고 고함을 질렀다.
“어림없는 소리! 내가 어떻게 모은 재산인데 옷 두벌만 가지고 전 재산을 너희한테 내놓으라고?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렇게는 못한다!”
클리투스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자 하스드루발의 머릿속에 번뜩 그럴싸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저 인간 말하는 거 좀 봐? 동포들이 전부 알거지가 되게 생겼는데 자기 재산 걱정만 하고 있네? 이건 이용해 먹을 수 있겠는데.’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한니발의 말을 전해 들은 사군툼 원로원은 그에게 재산을 내주느니 차라리 태워버리자며 모든 시민의 귀금속과 사치품을 광장에 모아 불을 붙여버린다.
그렇게 많은 재물이 재가 되었는데도 한니발은 8개월간의 공성전 끝에 사군툼을 점령한 후 상당한 전리품을 얻어 일부는 본국에 보내고 나머지는 군자금으로 사용한다.
그러니 바르카 가문이 사군툼을 시간을 오래 들이지 않고도 온전히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로마 정벌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스드루발은 클리투스를 이용해 전리품과 도시를 통째로 얻기로 마음먹고 외교사절의 앞임을 의식해 격식을 차려서 한니발에게 말했다.
“한니발 장군님. 허락하신다면 제가 사군툼의 사절에게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한니발은 동생이 또 뭔가 꾀를 낸 것을 직감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니발의 허락이 떨어지자 하스드루발은 사군툼 성벽 안에 세워져 있는 나무로 만든 망루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클리투스 의원님 저쪽을 보시지요.”
그는 클리투스가 자신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망루를 바라보는 것을 확인하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저 망루를 불태워버릴 겁니다.”
그 말에 클리투스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하스드루발이 병사들에게 외쳤다.
“저 망루에 화염탄을 발사해라!”
한니발이 이끄는 군대는 평소 지휘체계 확립이 잘 되어있었기 때문에 하스드루발의 명령은 곧바로 트레뷰셋을 운영하는 병사들에게 전달됐다.
곧 트레뷰셋 한 대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속에서 아르키메데스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거대한 공 모양 쇳덩이를 발사했다.
- 덜커덩!
투석기의 발사대를 떠난 불타는 쇳덩이는 운석처럼 날아가 하스드루발이 가리킨 망루의 상단을 정확히 맞췄다.
클리투스는 반으로 쪼개진 철구에서 엄청난 화염이 쏟아져 나와 망루가 화염에 휩싸이는 것을 보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손으로 닦았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클리투스와 눈을 마주치면서 말했다.
“우리 바르카 가문은 언제 우리의 등 뒤를 찌를지 모르는 사군툼 시민이 히스파니아 땅을 밟고 있는 것 자체가 불쾌합니다. 그렇지만 가족 하나 정도야 예외로 해도 별 상관없겠지요. 제 부탁을 들어주시면 클리투스 의원님 일가의 생명과 재산을 바르카 가문이 지켜 드릴 겁니다. 거절하시면 저런 화염탄이 사군툼의 성벽 안에 비처럼 쏟아질 겁니다.”
클리투스는 겁에 질려 한 겨울밤 알몸으로 거리에 나선 사람처럼 온몸을 떨면서 말했다.
“저... 저에게 대체 뭘 바라시는 겁니까?”
하스드루발은 담담한 목소리로 클리투스에게 대답했다.
“사군툼으로 돌아가서 평화협정이 체결됐다고 전해주셔야겠습니다. 그런 다음 사흘 뒤 깊은 밤에 경비병 몰래 남문을 열고 성벽 위에 불을 피워 신호를 보내세요. 그렇게 해준다면 약속대로 당신 가족의 생명과 재산을 꼭 지켜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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