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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64화 (64/201)

[ 64 ] [63화] 사군툼 공방전 (3)

클리투스는 동포를 배신하고 사군툼의 성문을 열라는 하스드루발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건... 그건 지금 당장 결정하기에는 너무 중대한 문제로군요. 부디 생각할 시간을 좀 주셨으면 합니다. 사흘 뒤에 다시 한번 찾아뵙고 답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하스드루발은 클리투스의 반응을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인간 역시 재산을 지킬 수 있다고 하니까 반쯤 넘어왔네. 이쯤에서 한번 몰아붙여야겠지.’

그는 일부러 정색하며 단호하게 클리투스의 청을 거절했다.

“바르카 가문이 사군툼을 점령하기 전에는 우리가 더 만날 일은 없을 겁니다. 다음에 나와 다시 만날 때 당신이 노예나 시체가 되어있을지, 아니면 여전히 사군툼의 대부호 클리투스로 남아있을지는 집에 돌아가서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시지요. 만약 우리와 한배를 탈 생각이라면 사흘 뒤 성문을 열고 당신의 집 대문에 자주색 천을 걸어놓으시면 됩니다. 그럼 우리 병사들이 그곳을 약탈할 일은 없을 겁니다.”

클리투스는 하스드루발의 말을 듣고 힘없이 말 등에 올라 군영 밖으로 빠져나갔다.

한니발은 점점 멀어져가는 클리투스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놀란 표정으로 동생에게 말했다.

“난 그동안 네가 이런 종류의 모략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오히려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겠는데?”

형의 말에 하스드루발이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우리의 전쟁과 관련 없는 죄 없는 민간인이 우리 전쟁에 휘말리는 게 싫은 거지, 적을 속여서 아군의 피해를 줄이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지금 사군툼에는 우리 가문의 친구들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거나 그런 짓을 방관한 사람밖에 없어. 그런 놈들에게 동정심을 가질 필요는 없지.”

* * *

클리투스는 침울한 표정으로 사군툼 원로원에 협상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의회 건물로 들어섰다.

그의 표정을 본 알카에우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존경하는 클리투스 의원님, 바르카 가문과의 협상은 어떻게 됐습니까? 조금 전에 망루 하나가 적의 투석기가 쏜 불덩이에 완전히 불타버렸습니다! 전군에 적의 공격에 대비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카르타고군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어서 이상하게 여기고 있던 참입니다.”

그때까지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클리투스는 얼떨결에 알카에우스의 질문에 거짓으로 대답했다.

“적장 한니발이 제 기를 죽이려고 제 놈들이 카르타고 노바에서 가져온 신형 투석기의 위력을 과시하더군요. 그래도 그럭저럭 얘기가 잘 풀렸습니다. 다만 전쟁배상금 액수를 두고 의견이 맞지 않아 사흘 뒤에 다시 만나 협의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사군툼 원로원 의원들이 밝은 표정으로 클리투스를 칭찬했다.

“정말 큰일을 해내셨습니다! 가정의 여신 헤라께서 당신의 가문에 축복을 내리시길!”

“일단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게 중요하니 그 야만인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줍시다! 빼앗긴 재산은 로마의 지원군이 히스파니아에 도착한 다음에 되찾아도 늦지 않습니다.”

클리투스는 앓던 이가 빠진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동료들을 보자 죄책감을 견딜 수가 없어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르타고인과 피 말리는 협의를 하고 나서 갑자기 긴장이 풀리니 피로감이 몰려오는군요. 죄송하지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알카에우스는 의회 건물을 나서는 클리투스에게 인사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방금 제 하인에게 클리투스 의원님댁에 좋은 포도주를 보냈습니다. 부디 댁에서 좋은 술과 음식을 드시면서 지친 심신을 다스리시기 바랍니다.”

클리투스는 자신에게 가슴속에 죄책감을 더하는 알카에우스에게 말없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도망치듯 자신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일을 대체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저들의 미소가 비수처럼 내 심장을 찌르는구나!”

클리투스가 울상을 지으며 자신의 저택 현관으로 들어서자 집사장이 머리를 조아리며 주인을 맞이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주인님. 외출하시기 전에 말씀하신 대로 생후 한 달이 지난 새끼돼지를 잡아 저녁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아니다. 지금은 영 식욕이 없다. 난 창고에 가 있을 테니 거기로 간단한 주안상이나 가져오도록 해라.”

집사장은 주인의 기분이 영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잽싸게 움직였다.

사군툼에서 가장 크고 호화로운 그의 저택의 창고는 전시장에 가깝게 여러 가지 사치품으로 장식된 공간이었다.

클리투스는 기분이 울적할 때마다 그가 오십 평생 살아오면서 모아온 막대한 재물을 감상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안락의자에 앉아 포도주를 마시며 마치 살아있는 사람 같아 보이는 정교한 조각상과 은화로 가득한 큰 상자 따위를 보자 마음속에서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 어차피 내가 미련하게 원로원 의원들에게 사실을 말한다 한들 다 같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불덩이에 타 죽거나 노예로 팔려가기밖에 더하겠나? 모든 사군툼인이 파멸하는 것보다는 한 가문이라도 살아남는 편이 현명하지. 신들께서도 나를 책망하지는 못하실 거야.”

* * *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클리투스와 헤어진 뒤 사흘째 되던 날 밤 북아프리카 중장보병과 신성대 병사 중에서 선별한 정예병 2천 명, 그리고 각궁으로 무장한 크레타 궁수 500명을 동원해 사군툼을 기습할 준비를 했다.

어둠을 틈타 움직이려면 그보다 수가 많아지면 적의 초병에게 발각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스드루발은 클리투스의 신호를 기다리면서 엄지손가락의 손톱을 깨물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이 인간이 오히려 함정을 파 놓고 우릴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여기서 정예병을 잃으면 아주 골치 아파지는데.”

한니발은 그런 동생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전 재산을 내놓으라고 했을 때 클리투스가 보인 탐욕스러운 눈빛은 아테네의 일류 연극배우라도 따라 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성문 쪽에 복병을 숨겨 놓는다고 해도 결국 몇 배나 수가 많은 우리 군대를 이겨낼 수는 없을 거야.”

하스드루발은 새삼 언제나 침착함을 잃지 않는 한니발이 존경스러워졌다.

‘난 역사 지식이 있어도 원 역사의 흐름을 틀려고 할 때마다 불안해 죽겠는데, 한니발 형은 완전 앞이 깜깜한 상태에서 로마를 거의 멸망시킬 뻔했으니 얼마나 대단한 거냐. 그래. 우리 둘이 뭉친 이상 이번 전쟁에 패배는 없다.’

동생이 평상심을 되찾자 한니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해가 완전히 떨어졌으니 계획대로 정예병 2천 명을 데리고 슬슬 출발할게. 사군툼의 남문을 확보하면 성벽 위에서 횃불을 흔들어서 바로 신호를 보낼게.”

“알았어. 내가 본대를 이끌고 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그때까지 다치지 않게 조심해.”

한니발은 자신이 입고 있는 갑옷의 가슴 부분을 주먹으로 가볍게 두드리면서 말했다.

“걱정 마. 그리스인들의 창칼이 새 갑옷을 뚫을 리가 없으니까 말이야.”

그가 입고 있는 것은 카르타고 노바의 대장장이들이 수년간의 연구 끝에 작년 말에야 개발에 성공한 서양식 두정갑인 브리간딘을 본떠 만든 신형 갑옷이었다.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는 비단을 사용해 두정갑을 만들었지만, 비단이 귀한 중세 유럽에서는 가죽옷의 안쪽에 쇳조각과 가죽 조각을 달아 갑옷을 만들었다.

일반적인 서양식 두정갑은 주로 쇠가죽으로 겉옷을 만들었지만 하스드루발은 장인들에게 장군과 고급장교용 갑옷은 특별히 쇠가죽보다 훨씬 튼튼한 코끼리 가죽으로 만들도록 지시했다.

하스드루발은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형에게 다시 한번 당부했다.

“물론 그게 지금은 신들의 물건을 제외하면 세상에서 제일 튼튼한 갑옷이긴 할 거야. 그래도 조심해. 그 갑옷이 창칼이나 화살은 막아도 몽둥이나 돌팔매까지 막지는 못할 테니까.”

한니발은 대답 대신 하스드루발의 어깨를 한번 가볍게 두드린 후 막사 밖으로 나갔다.

한니발은 갑옷과 무기에 반사된 달빛 때문에 적의 초병에게 위치를 들키지 않기 위해 병사들에게 철로 만든 병장기에 재를 바르게 한 후 사군툼으로 출발했다.

그가 거의 사군툼의 남문 쪽에 거의 도착할 즈음 클리투스는 남문의 수비병들에게 포도주와 고기를 하사해 군기를 흐린 다음 자신의 노예들에게 틈을 봐서 성문을 열고 성벽 위에서 불을 피우게 했다.

한니발은 기다리던 신호를 확인한 후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에게 속삭였다.

“드디어 내통자가 신호를 보냈다! 수비병을 제거하고 사군툼의 성문을 장악하라!”

부관들이 페니키아어와 그리스어로 명령을 전달하자 2천 500명의 정예병은 신속하지만 은밀하게 성문으로 접근했다.

드디어 성문 바로 근처에 다다르자 한니발이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무기를 들고 적을 섬멸하라!”

병사들은 우렁찬 함성으로 장군의 명령에 답하며 적을 향해 돌진했다.

“와아!”

한니발도 전열의 맨 앞에서 병사들과 함께 돌진하며 카르타고군을 보고 봉화에 불을 붙이기 위해 도망가던 적병을 쫓아가 등을 베어버렸다.

“크헉!”

적병의 단말마가 전투의 시작을 알리자 경번갑과 큰 방패, 외날검 팔카타로 무장한 북아프리카 중장보병 1천 명이 장군의 뒤를 따라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적병들을 베어 넘기고 방패로 적의 턱과 복부를 후려쳤다.

“아악!”

“남문이 뚫렸다! 모두 도망쳐!”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격을 받은 사군툼의 병사들은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한니발에게 남문을 빼앗겼다.

하지만 카르타고군이 수천 명이나 성문 안으로 들이닥친 것을 본 시민이 원로원과 병영에 적습을 알리면서 자다 말고 병영에서 뛰쳐나온 사군툼 병사 약 3천 명이 전열을 갖추지도 못한 채 장교에게 등을 떠밀려 대로로 나와 무작정 남문 쪽으로 돌진했다.

“적은 아직 우리보다 수가 적다! 바르카 가문의 본대가 들이닥치기 전에 남문을 탈환하라!”

그러나 그런 사군툼 병사들의 무모한 용맹이 무색하게도 그때는 이미 한니발이 성벽 위에 크레타 궁수를 배치한 후였다.

인도산 물소의 뿔과 대나무로 만든 각궁의 시위에서 떠난 500개의 화살이 대로를 가득 메우며 달려오는 사군툼 병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사군툼 병사들은 바로 옆의 전우가 수백 명이 지중해에서 주로 사용되는 나무로 만든 활의 사정거리보다 네 배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날아온 화살을 맞고 쓰러지자 그제야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려 화살을 막으며 천천히 다가오기 진군하기 시작했다.

사군툼의 장교 한 명이 크레타 궁수들이 쏘아대는 화살 비를 보며 울부짖듯이 외쳤다.

“적의 궁수들은 전부 헤라클레스의 화신이라도 된단 말이냐? 대체 어떻게 인간이 쏜 화살이 1 스타디온(약 180m)이 넘는 거리를 날아온단 말이냐!”

그 장교가 목에 화살을 맞고 쓰러질 때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6만 명의 카르타고군 본대가 사군툼의 성벽 안에 쏟아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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