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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65화 (65/201)

[ 65 ] [64화] 사군툼 공방전 (4)

하스드루발은 사군툼 성벽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카르타고군의 선두에서 말을 달리며 병사들에게 외쳤다.

“전군 아크로폴리스로 진격하라! 적이 방어태세를 갖출 시간을 주지 마라!”

고대 그리스인이 지은 도시는 대부분 도시 중앙의 언덕에 신전이나 의회 건물 등 주요시설을 지어놓고 성벽을 두른 아크로폴리스를 갖추고 있다.

하스드루발은 고대의 전쟁에서 도시 외곽 성벽이 돌파당해도 방어병력이 아크로폴리스로 후퇴해 오랫동안 농성하여 공격군을 괴롭힌 사례가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발이 느린 보병은 자신의 부관인 기스코에게 지휘를 맡긴 후 5m가 넘는 랜스로 무장한 신성대 중기병 3천 기를 이끌고 사군툼의 넓은 대로를 가득 메우며 아크로폴리스의 남문을 향해 질주했다.

하스드루발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사군툼의 장교들은 원로원의 명령을 받고 성문을 활짝 열어 아직 한니발의 공격에 당하지 않은 병사들을 아크로폴리스의 성벽 안으로 들이는 중이었다.

성벽 위를 지키던 초병 한 명이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내며 해일처럼 몰려오는 카르타고 신성대 중기병을 보고 성문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사군툼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남문 쪽! 거리 4 스타디온(약 720m)! 적 기병 다수!”

초병의 외침을 듣고 당황한 사군툼의 장교는 허둥대며 휘하의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성문을 닫을 시간이 없다! 아크로폴리스로 들어오고 있는 병사는 모두 창을 세워 적 기병을 막고 성벽 위의 궁수는 활을 쏴라!”

장교의 명령을 들은 사군툼의 궁수들은 급히 하스드루발과 신성대 중기병을 향해 활을 쏘아댔다.

그러나 사정거리가 50m도 안 되는 나무 활에서 발사된 화살은 목표물에 닿아보지도 못하고 힘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하스드루발은 다른 말보다 훨씬 크고 체력이 좋은 자신의 애마 페라리도 한 번에 먼 거리를 전력질주 하는 바람에 가쁜 숨을 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성문을 닫으려는 적을 목전에 두고 한숨 돌릴 시간 따위는 없었다.

“랜스 앞으로!”

신성대 기병들은 선두에서 외치는 장군의 명령을 듣고 일제히 오른쪽 겨드랑이 낀 랜스를 앞으로 내밀고 안장의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며 충격에 대비했다.

그러자 창을 꼬나잡고 성문을 막던 사군툼의 보병들은 자신들의 창보다 두 배는 더 긴 창을 들고 말과 사람이 모두 철갑을 두른 채 돌진해오는 적 중기병에게 겁을 먹고 비명을 지르며 전열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저런 걸 우리가 어떻게 막아!”

하스드루발은 그 모습을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미소를 지었다.

‘생각대로 됐어! 아직 이 시대에는 아직 랜스차징에 겁먹지 않고 방진을 유지할 수 있는 보병은 거의 없어!’

하스드루발과 3천 중기병이 혼란에 빠진 적 보병의 방진을 그대로 들이받자 랜스가 부러지면서 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콰과곽!

한 번의 돌격으로 사군툼 보병의 방진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자 신성대 중기병들은 어렵지 않게 아크로폴리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모든 아군 기병이 성문 안으로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큰소리로 외쳤다.

“지친 말에서 내려 검을 뽑아라! 아군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성문을 닫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신성대 기병들은 장군의 명령에 따라 일제히 말에서 내려 외날검 팔카타와 방패를 들고 아직 성문 주변에 남아있는 사군툼 병사들과 난전을 벌였다.

신성대 중에는 이번이 첫 출전이라 움직임이 서투른 병사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군툼 병사들은 이미 랜스차징을 맞고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었던 데다 리넨으로 만든 천 갑옷만 걸치고 있는 탓에 온몸에 경번갑을 두른 중무장한 신성대를 당해낼 수 없어 곧 사방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창칼에 찔리고 베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적이라니! 사군툼은 이제 끝났어! 모두 도망쳐!”

하스드루발이 성문을 제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부관 기스코가 보병 수만 명을 이끌고 아크로폴리스 안으로 들이닥쳤다.

원래의 역사에서 한니발이 8개월간 공성전을 벌인 끝에 함락시켰던 사군툼은 그렇게 불과 열흘 만에 바르카 가문의 도시가 되었다.

* * *

바르카 가문의 군대가 사군툼을 점령한 후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부하들이 전리품을 챙기고 포로를 포박하는 동안 한 원로원 의원의 저택에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그곳에서 두 형제는 전후처리에 대해 논의했다.

한니발이 먼저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포로는 전부 노예로 팔아버릴 거야. 이번에는 반대하지 않겠지?”

한니발의 말에 하스드루발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이번에는 어쩔 수 없지.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셨고, 앞으로 로마의 동맹국들이 로마연합에서 이탈하게 하려면 그럴 필요가 있으니까.”

사군툼은 마지막에는 바르카 가문에게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지난 십여 년 동안 로마를 믿고 여러 차례 카르타고 정부와 바르카 가문의 심기를 건드려왔다.

바르카 가문으로서는 그런 사군툼을 철저히 응징해 로마가 동맹국이 멸망하는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바르카 가문을 적대하면 어떤 운명을 맞게 되는지를 전 지중해에 알려 로마연합에 소속되어있는 도시국가들의 이탈을 유도할 필요가 있었다.

다음은 클리투스의 처우에 대해 논의할 차례였다.

이번에도 한니발이 먼저 입을 열었다.

“클리투스 덕에 손쉽게 사군툼을 점령하긴 했지만 겁이 많고 비겁한 자라 전황이 조금만 불리해져도 자기 동포들을 배신하듯이 금방 우리를 배신할 거야. 일단 우리 가문을 도운 건 사실이니 공개적으로 처리할 수는 없지만, 조용히 처치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

그러나 하스드루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클리투스는 분명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인간이지만 우리를 도운 건 사실이야. 아무리 은밀히 일 처리를 한다고 해도 그런 자가 비명횡사해버리면 로마의 동맹 도시의 유력자들은 분명히 우리를 의심하겠지. 게다가 그 자는 아직도 쓸모가 많아.”

“이미 사군툼을 점령했는데 클리투스를 써먹을 데가 있다고? 대체 어디다?”

“로마 원로원을 속이는 데 써먹을 수 있지. 지금까지의 정황을 보면 로마는 히스파니아에 직접 첩자를 심지는 않은 것 같아. 마케도니아나 셀레우코스 제국에 보낼 첩자도 부족할 테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대신 로마는 히스파니아 동부의 그리스 식민도시들과 동맹을 맺어서 우리 움직임을 감시해 온 게 분명해.”

한니발은 동생의 말을 듣고 활짝 웃으며 감탄했다.

“그렇구나! 사군툼은 난공불락의 요새까지는 아니어도 정공법으로는 열흘 만에 함락시킬 수 있는 도시는 아니야. 로마 놈들은 아직 우리가 이곳을 점령한 걸 모르고 있을 테니 클리투스를 이용하면 로마 원로원이 우리가 사군툼과 평화협정을 맺었다고 착각하게 할 수 있겠어! 사군툼은 우리 영토 한가운데 있으니 그렇게 빨리 눈치채지는 못할 거야.”

“바로 그거야! 클리투스는 원로원 의원이었으니까 사군툼 원로원의 인장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거야. 당장 그자에게 가짜 외교문서를 줘서 로마 원로원에 보내자. 그의 재산과 가족이 전부 여기 있는 이상 우리를 배신할 수는 없을 거야.”

한니발은 동생의 말에 맞장구쳤다.

“그렇겠지. 게다가 그런 일까지 하고 나면 다시는 로마 편으로 돌아설 수 없게 되고 말이야. 당장 행동에 옮기자. 그 방법으로 로마를 속인다고 해도 우리가 벌 수 있는 시간은 겨우 몇 주 정도일 테니까 말이야.”

* * *

사군툼이 바르카 가문에게 함락된 지 2주가 되는 날, 클리투스는 로마의 카피톨리노 언덕에 오르면서 한숨을 푹 쉬면서 중얼거렸다.

“바르카 가문 놈들... 누가 페니키아인 아니랄까 봐 나를 아주 철저히 써먹는구나. 이 언덕에 올라갔다 내려오면 모든 로마인이 앞으로 날 원수로 여기게 되겠지.”

클리투스는 잠시 로마 원로원에 사실을 밝혀버릴까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배신한 걸 알면 카르타고인들은 내 재산을 전부 빼앗아 군자금으로 써버리고 가족들은 노예로 팔아버리겠지. 그런 꼴을 살아서 볼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거야. 이제 정말 선택의 여지가 없구나.”

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그를 로마의 의회 건물인 쿠리아 호스틸리아에 들어갔다.

안그래도 사군툼 문제로 회의하고 있던 로마의 원로원 의원 중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그리 밝지 않은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클리투스 의원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파비우스 의원님. 오늘도 로마의 원로원은 많이 바쁜 모양입니다.”

“안 그래도 열흘 전에 로마를 방문하신 디오클레스 의원님께 카르타고인들이 사군툼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쯤은 디오클레스 의원님께서 사군툼에 거의 도착하셨겠군요.”

그 말을 들은 클리투스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간신히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디오클레스 의원은 지금쯤 아무것도 모르고 사군툼 근처의 항구에 정박했다가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에게 붙잡혀 노예로 팔려갔을 가능성이 컸다.

여기서 처신을 잘못하면 로마인에게든 카르타고인에게든 자신도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것이었다.

파비우스는 클리투스가 앞서 방문한 사절처럼 로마 원로원에 사군툼에 지원군을 보내 달라고 하소연하러 온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사군툼의 사정이 급한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로마도 당장 지중해 건너 히스파니아에 지원군을 보낼 여유가 없습니다. 이탈리아 반도 북부의 보이족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집정관이 직접 군단을 이끌고 그쪽으로 파견된 상태입니다. 곧 카르타고 노바에 바르카 가문에 항의하기 위해 사절을 보낼 예정입니다. 카르타고인들이 로마에 위상에 겁을 먹고 침략행위를 중단하기를 위대하신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기도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자 클리투스는 양심의 가책이 조금 가시는 것을 느꼈다.

그는 로마 원로원이 마음만 먹으면 지금도 한꺼번에 20만 대군 정도는 운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군툼은 그동안 로마만 믿고 히스파니아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인 바르카 가문과 십 년 이상 적대해 왔다.

클리투스는 충성을 다한 동맹국이 위기에 처했는데도 예산을 아끼기 위해 지원군을 보내기는커녕 아직 항의사절도 보내지도 않은 로마 원로원이 동포를 배신한 자신과 별로 다를 것도 없다는 생각을 하고 나자 왠지 마음이 개운해졌다.

그는 활짝 웃으며 파비우스에게 말했다.

“저는 지원군을 요청하러 온 것이 아니라 로마 원로원에 기쁜 소식을 전해 드리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바르카 가문은 전쟁배상금을 받고 사군툼에 대한 침략행위를 멈추기로 했습니다. 모두 서지중해를 지배하는 강대국 로마의 위상에 카르타고인들이 겁을 먹은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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