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 [67화] 에브로강 너머로 (2)
히스파니아 동부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던 마고는 알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타라코 해군이 생각보다 일찍 연락선을 띄운 이유는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의 기병이 예정보다 조금 일찍 타라코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두 형제는 마고가 타라코 항구 근처에 도착하기 이틀 전, 에브로 강을 건넌 후 말을 달리다 타라코 주변을 순찰하던 적 정찰대와 마주쳤다.
겨우 수십 명의 경보병으로 구성된 타라코의 정찰대는 2만기의 카르타고군 기병대에게 순식간에 전멸당해 버렸지만 그래도 두 형제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하스드루발은 인근의 숲으로 도망치던 적 정찰대의 마지막 한 명을 애마 페라리를 타고 쫓아가 활을 쏘아 맞혀서 쓰러트린 후 한니발에게 돌아와 말했다.
“이제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야겠어. 아무래도 타라코의 영역에 들어선 것 같으니까 말이야.”
“그래. 적 정찰대나 인근의 농부들이 우릴 먼저 발견하고 타라코 원로원에 우리가 에브로 강을 넘은 걸 알리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함대를 몰고 오는 마고보다 좀 더 먼저 도착하더라도 적의 파발부터 차단해야겠어.”
한니발은 동생과의 대화를 마치자마자 기병대를 향해 외쳤다.
“이제 380 스타디온(약 68km) 정도 남았다! 여기서 꾸물거리면 또 적 정찰대에게 발각될 수 있으니 지금부터 단숨에 타라코까지 행군한다!”
한니발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바르카 가문의 기병들은 흙먼지를 구름처럼 일으키며 말을 달렸다.
두 형제가 이끄는 기병대가 드디어 목적지 근처에 도착하자 타라코의 성벽 위에서 경계근무를 서던 초병들이 즉시 장교에게 알렸다.
“남쪽에서 약 2만 기의 적 기병이 몰려옵니다! 켈티베리안족이 도시 주변의 농가를 약탈하러 온 것 같습니다!”
고대의 문명국가들은 중세와는 달리 보병의 도움 없이 기병만으로 전투를 벌이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그런 경우는 수백 명 규모의 기병 정찰대가 우연히 적과 마주치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는데 등자가 아직 유럽에 전해지기 전에는 기마민족이나 유목민이 아닌 부족이나 문명국가가 기병만으로 대군을 이룰 만큼 많은 기수를 훈련 시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타라코의 초병이 먼발치에서 2만기의 기병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바르카 가문의 기병대를 기마민족인 켈트족의 약탈자로 오인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잘못된 정보 때문에 타라코 수비대를 지휘하던 장군은 치명적인 오판을 하고 말았다.
“분하지만 타라코에는 2만이 넘는 켈트족 기병을 물리칠 병력이 없다. 농민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서 성문을 닫아걸고 초병을 늘려서 경계를 강화하라!”
타라코의 장군은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기병대가 성벽 근처까지 다가온 이후에야 카르타고인들이 에브로 강을 넘어온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럴 수가! 바르카 가문이 로마와의 조약을 어기고 전쟁을 일으켰구나! 성문을 열면 적이 들이닥칠 테니 어서 연락선을 띄워서 카르타고인들이 군대를 이끌고 에브로강을 넘었다고 알려라!”
그후 타라코 해군은 급히 연락선 열 척을 띄웠지만 마침 마고가 도착한 마고의 함대에 모두 격침되거나 나포되고 말았다.
타라코 수비대는 그로부터 약 일주일 정도 더 농성을 벌였지만 하밀카르가 10만이 넘는 대군을 몰고 와 도시를 포위하자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타라코의 원로원은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 바르카 가문의 군영에 사절을 보내왔다.
하밀카르는 한니발과 하스드루발, 그리고 배에서 내린 마고 부부와 얼마 전 합류한 가정교사 실레노스를 지휘관 막사로 모이게 한 뒤 함께 타라코의 사절을 맞이했다.
타라코의 사절이 지휘관 막사에 들어서자 하밀카르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했다.
“지중해 전역에 불패의 명장으로 명성이 자자한 하밀카르 바르카 총독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밀카르도 타라코의 사절을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잘 오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계기로 바르카 가문과 타라코가 서로 검 대신 술잔을 맞대는 사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타라코의 사절은 자신을 환대하는 하밀카르의 말 속에 뼈가 있음을 눈치 채고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하밀카르 총독님의 말씀대로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해 주신다면 앞으로 저희 타라코는 로마와의 모든 관계를 끊고 바르카 가문과 우호를 다지겠다고 맹세하겠습니다. 부디 저희가 로마와 맺었던 동맹과 같은 조건으로 동맹을 맺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타라코의 원로원은 카르타고가 지난 수백 년 동안 속주민에게 가혹한 세금을 물리고 전쟁이 날 때마다 병사를 징집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들도 그 같은 신세가 되어 버릴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밀카르가 사절에게 대답했다.
“분명 로마는 속주에는 세금을 물리는 대신 전쟁이 나도 병사를 요구하지 않았고 동맹도시 에게는 세금을 걷지 않는 대신 로마가 전쟁을 벌일 때 보조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지원군을 보내게 한다고 들었는데... 내 말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저희 타라코의 원로원은 지중해 너머의 로마보다 지척에 있는 바르카 가문과 동맹을 맺는 것이 시민의 안전을 보호하는 길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위대하신 제우스께 맹세코 타라코는 바르카 가문과 함께 공동의 적에 대항해 싸울겁니다!”
하밀카르는 사절의 말을 믿기가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타라코를 사군툼처럼 점령해 버릴 수도 없어 난감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다 할 저항을 하지 않고 항복해온 타르코를 약탈하거나 점령해 버린다면 앞으로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이탈리아 반도에 발을 디뎠을 때 로마연합의 동맹도시들이 두 형제에게 성문을 여는 대신 결사항전을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의 고민을 눈치 챈 하스드루발이 사절 앞임을 의식해 격식을 갖추며 그리스어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총독님. 허락하신다면 제가 한 가지 제안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말해 보아라.”
“타라코와 동맹을 맺도록 하되 로마와는 조건을 약간 다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로마는 동맹도시와 함께 전쟁을 치르고 나서 전리품 중 절반은 무조건 자신들이 차지하고 나머지 절반은 전쟁에 참여한 여러 동맹이 나눠 갖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리품을 우리 가문과 타라코가 동원한 병사의 수에 비례해서 나눠 갖는 쪽으로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원래의 역사에서 한니발이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여러 번 대승을 거두었는데도 로마연합의 동맹도시 중 로마와의 동맹을 깨고 한니발의 편에 선 도시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스드루발은 그 이유를 로마의 동맹도시들이 로마인들에게 불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들이 카르타고보다는 로마와 동맹을 맺는 편이 이득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로마는 동맹도시와 힘을 합쳐 전쟁을 하고 나면 조금이나마 함께 싸운 동맹도시와 전리품을 나눠 가졌지만 카르타고는 속주민 병사들에게 그저 용병의 임금만 줬을 뿐이지. 게다가 원 역사에서는 그때까지도 인신공양을 했고 말이야. 그런 상황이면 나 같아도 로마 편에 붙어버리겠다.’
그래서 그는 타라코를 시작으로 로마와 동맹을 맺은 지중해의 도시국가들에게 로마보다 더 공정한 전리품 배분을 약속하여 원래의 맹주와의 관계를 끊고 바르카 가문과 동맹을 맺도록 유도하기로 마음먹었다.
‘로마의 동맹도시들은 전리품 분배방식과 시민권 문제로 불만을 참아오다 카르타고가 멸망한 지 겨우 60년 정도 후에 연합군을 꾸려서 로마와 전쟁을 벌였어. 그 점을 잘 이용하면 로마를 버리고 우리와 동맹을 맺는 도시국가가 늘어날 거야. 그래도 로마연합 붕괴까지는 어렵겠지만 말이야.’
하밀카르는 하스드루발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알아채고 대답했다.
“타라코 뿐만 아니라 우리 가문에게 저항하지 않고 성문을 여는 로마의 동맹도시에 모두 같은 제안을 할 생각이구나. 로마연합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말이야. 과연 그 방법이 효과가 있을 런지...”
그러자 한니발이 동생의 편을 들며 아버지에게 말했다.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해봐야 알겠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니발은 여전히 로마연합의 붕괴를 제1의 목표로 삼고 로마를 점령해야 한다는 하스드루발의 제안은 차선책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미래의 전리품 중 일부를 포기하는 대가로 로마의 동맹도시가 줄어들 가능성이 높아진다면 분명히 해볼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하스드루발의 제안은 타라코의 사절에게도 반가운 것이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저희 타라코로서는 더 바랄 게 없을 겁니다!”
사실 사절은 타라코군이 아직 로마군과 연합해 전투를 벌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좀 더 나은 전리품 분배방식이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협상이 결렬되어 타라코 시민들이 바르카 가문의 10만 이 넘는 대군을 상대로 결사항전을 벌일 각오까지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르카 가문이 로마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동맹을 맺어준다는 말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하밀카르는 두 아들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너희 두 사람의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자. 이번 전쟁의 주역은 다름 아닌 너희 두 사람이니까 말이야.”
그는 이번에는 타라코의 사절에게 말했다.
“두 아들의 의견대로 타라코와 동맹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바르카 가문이 양보를 한 만큼 타라코도 우리를 위해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타라코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침해하지 않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와 맺은 협정내용을 엠포리온을 비롯한 히스파니아에 있는 로마의 동맹도시와 부족들에게 널리 알려주셔야겠습니다. 바르카 가문과 관계를 맺으면 어떤 이득을 얻게 되는지 말입니다.”
사절은 타라코의 사절과 무역들이 하밀카르의 요구대로 다른 로마의 동맹도시를 방문해 카르타고와 바르카 가문을 칭송해대면 로마와의 관계는 더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곧 에브로 강 이북의 모든 그리스인이 만든 도시가 바르카 가문의 위대함과 관대함에 감탄하게 될 겁니다!”
하밀카르와 사절의 대화를 들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바르카 가문 사람들의 얼굴에 결연한 각오가 묻어났다.
하밀카르가 협정을 맺은 타라코의 사절이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막사 밖으로 나가자 한니발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제 더는 로마에 우리의 움직임을 숨길 생각이 없으시군요.”
“맞다. 어차피 10만이 훨씬 넘은 대군이 에브로강을 넘은 이상 로마도 곧 우리의 움직임을 알아챌 거다. 그렇다면 이제 그 상황을 이용할 방법을 찾아야지. 우리가 타라코와 관대한 조건으로 동맹을 맺은 사실이 하루라도 빨리 이탈리아 반도에 알려져야 그곳에 있는 로마의 동맹도시들도 우리와 로마의 동맹조건을 저울질하면서 고민해 볼 시간을 충분히 갖지 않겠느냐?”
하스드루발은 아버지의 생각에 동의했다.
“아버지 말씀대로예요. 게다가 그렇게 하면 아버지께서 지휘하는 군대가 로마의 이목을 끌 때, 우리 삼형제가 이끄는 군대가 은밀히 피레네를 넘을 수도 있겠지요.”
하밀카르는 하스드루발의 말을 듣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내 생각을 잘 맞췄구나. 이렇게 대놓고 도발했으니 이제 로마는 나와 내가 이끄는 군대의 움직임을 주시하겠지. 난 놈들이 우리 가문의 목적이 에브로강을 넘어 히스파니아 전역을 정복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할 생각이다. 그동안 너희는 피레네 산맥 남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보이족의 인솔자와 합류해서 로마의 눈을 피해 알프스로 가거라.”
한니발과 하스드루발, 그리고 마고는 아버지에게 말 대신 절도 있는 경례로 대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