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 [68화] 선전포고
타라코가 항복하고 난 후 바르카 가문의 세 아들은 아버지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한니발이 타라코에 이어 엠포리온을 공격하기 위해 떠나는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무운을 빕니다.”
하밀카르는 세 아들을 한데 모이게 한 후 차례로 한 명씩 안아주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이별이구나. 반드시 살아 돌아와야 한다. 위대하신 바알 함몬께서 너희를 지켜주실 것이다.”
작별인사를 마친 후 바르카 가문의 사람들은 숙적 로마를 공격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밀카르는 보병 7만 명과 기병 1만 기로 엠포리온을 포위하는 동안 한니발과 하스드루발, 마고 부부는 보병 6만 명과 기병 1만 2천 기, 인도코끼리 20마리를 이끌고 피레네산맥을 향해 북쪽으로 진군했다.
하스드루발은 친로마파 켈트족이 득실거리는 피레네 이남의 구릉지대를 바라보면서 형제들에게 말했다.
“지금까지는 최대한 피해를 줄여가면서 머리를 써서 적과 싸워왔지만, 이제는 이를 악물고 희생을 감수하면서 적진을 뚫고 나가야 해. 아무리 늦어도 올해 가을까지는 알프스에 도착해야 하니까 말이야.”
* * *
엠포리온은 타라코처럼 하밀카르에게 항복하는 대신 즉시 현대의 프랑스 남부에 있는 로마의 동맹도시 마실리아에 연락선을 띄워 바르카 가문이 에브로 강을 넘어 로마의 동맹도시들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마실리아의 원로원은 엠포리온의 사절이 가져온 소식을 즉시 해로를 통해 로마에 사절을 보내 알렸다.
로마 원로원은 그제야 바르카 가문이 사군툼을 함락시키고 에브로 강을 넘은 후 로마의 동맹도시와 친로마 성향의 켈트족 부족들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원전 218년 5월 초 회의를 열었다.
“당장 군단을 더 모집해서 히스파니아에서 건방진 바르카 가문을 몰아내고 북아프리카를 공격해야 합니다!”
분노로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성난 맹수처럼 소리쳤다.
그는 원래의 역사에서 한니발과 전면전을 펼치고도 몇 번이나 무승부를 내 ‘로마의 검’이라는 별칭을 얻는 맹장으로, 2차 포에니전쟁이 시작되기 전에도 그의 뛰어난 무력과 불같은 성정은 로마 시민 사이에서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유명했다.
그러나 신중한 성격과 특유의 지구전을 통해 원래의 역사에서 한니발을 이탈리아 남부에 고립시키면서 ‘로마의 방패’라는 별칭을 얻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그의 말에 반대했다.
“존경하는 마르켈루스 의원님. 바르카 가문이 감히 로마의 동맹도시를 공격한 지금, 저를 비롯한 이곳 쿠리아 호스틸리아에 계신 모든 동료 의원님 중 다시 한번 카르타고인에게 로마군의 무서움을 가르쳐줘야 한다는 의원님의 의견에 반대하실 분은 안 계실 겁니다. 하지만 의원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지금은 파두스 계곡에서 일어난 켈트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마르켈루스는 파비우스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신생아의 머리만큼 큰 주먹으로 애꿎은 탁자를 내리쳤다.
기원전 218년 봄이 시작되자마자 바르카 가문과 미리 내통한 보이족을 비롯한 켈트족이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 새로 건설한 식민지인 크레모나와 플라켄티아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그 부근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단은 ‘프라이토르’(집정관 대리) 루키우스 만루스가 지휘하는 1개 군단이 전부였다.
루키우스는 무모하게도 아무런 대책 없이 반란군에게 점령당한 식민지를 되찾기 위해 군단을 출동시켰지만, 켈트족에게 매복공격을 당해 궤멸적인 손해를 입고 말았다.
그 바람에 로마 원로원은 그해의 집정관 중 한 명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사군툼을 위협하는 바르카 가문을 공격하기 위해 모집한 시민군을 급히 또 다른 프라이토르인 가이우스 아틸리우스에게 맡겨 로마의 패잔병들이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 파두스 계곡으로 출동시켰다.
집정관 푸블리우스는 즉시 다시 새로운 군단을 모집했지만, 당시의 로마에는 직업군인이 없고 모든 병사가 시민군이었기 때문에 새로 뽑은 병사는 몇 달 동안의 기초훈련을 시킨 후에야 실전에 투입할 수 있었다.
마르켈루스는 탁자를 내려치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다시 한번 동료 의원들에게 소리쳤다.
“아무래도 우리 로마의 가장 위험한 적은 용맹한 적장이 아니라 무능한 아군 장수들인 것 같소! 적이 우리 동맹도시를 유린하고 있는데 한낱 야만인들에게 발목이 잡혀 구하러 가지 못하는 꼴이라니!”
2차 포에니전쟁 이전의 로마군은 지휘관이 짜낸 허술한 전략을 우수한 로마 군단병의 전술로 극복하고 승리를 거두는 경우가 많았고 이길 수 있는 전투에서 어이없이 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로마의 장수들이 압도적인 로마 군단의 힘으로 적을 정면에서 밀어붙여 승리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고도의 전략을 짜려고 노력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이런 군사문화가 수백 년 동안이나 이어져 내려온 결과 기원전 3세기의 로마에는 전술지휘 능력이 뛰어난 장수는 많았지만, 한니발처럼 전략 구상능력이 뛰어난 장수는 아직 없었다.
기원전 218년의 집정관 중 한 명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가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하는 마르켈루스에게 말했다.
“존경하는 마르켈루스 의원님. 의원님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우리 로마가 전쟁을 서둘러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탈리아 반도가 카르타고군에게 공격당할 위험이 없는 이상 전쟁의 주도권은 여전히 우리가 쥐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파비우스가 맞장구를 쳤다.
“저도 집정관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하밀카르는 분명 히스파니아 전역을 정복할 속셈일 겁니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님들께 먼저 하밀카르에게 사절을 보내 침략행위를 당장 중단한 후 에브로강 이남으로 회군할 것을 엄중히 경고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가 이를 거절하면 켈트족의 반란이 진압되는 데로 히스파니아를 공격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로마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파비우스의 의견에 찬성했다.
* * *
로마 원로원의 명령을 받은 사절단은 배를 타고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 마실리아를 거쳐 엠포리온으로 향했다.
하밀카르는 해군을 동원해 엠포리온 항구를 봉쇄하고 있었지만, 로마의 연락선을 통과시켜 주었다.
엠포리온 시내를 지나 하밀카르의 군영에 도착한 로마의 사절단은 언뜻 보아도 엄청난 수의 대군을 눈앞에 두고 약간 주눅이 들어버렸다.
사절단장이 한숨을 쉬며 동료 원로원 의원들에게 말했다.
“로마의 3개 군단과 맞먹는 대군이군요. 하밀카르가 피레네 이남을 전부 차지하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모양입니다.”
로마의 사절단은 그리스어를 할 줄 아는 북아프리카 출신 장교의 안내를 받으며 하밀카르의 막사로 들어갔다.
로마의 사절단장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인사도 하지 않고 하밀카르에게 다짜고짜 말했다.
“우리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는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하밀카르는 사절단장의 무례한 태도에 눈을 치켜뜨면서 대꾸했다.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지는 대충 예상되지만, 내 앞에서 그따위 태도를 보일 줄은 미처 몰랐군요. 지금 당장 막사 밖으로 끌어내고 싶지만 먼 길을 온 고생을 생각해서 일단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보긴 하지요. 어서 말해보시지요.”
“당신네 바르카 가문은 로마의 동맹도시인 사군툼을 함락시킨 것도 모자라 에브로 강을 넘어 우리 로마의 친구들을 위협하고 있지 않습니까! 로마 원로원과 카르타고 정부가 맺은 협약을 이렇게 일방적으로 어기다니, 페니키아인은 모든 언어를 할 줄 알지만,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 중에 믿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더니 옛말에 틀린 것이 하나도 없군요!”
그 말에 하밀카르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사절단장을 노려보며 그를 쏘아붙였다.
“우리가 먼저 협정을 어겼다고? 웃기고 있군! 우리 카르타고인들은 너희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성실하게 전쟁배상금을 갚아나갔다! 그런데 너희는 평화협정을 맺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에게서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두 섬을 강탈했지! 우리가 그 문제로 항의하니까 오히려 전쟁배상금을 1,200 달란트나 더 뜯어냈고 말이야! 너희 로마인은 불난 집에 쳐들어와 불을 끄고 있는 집주인에게 칼을 들이댄 강도나 다름없다!”
하밀카르의 호통에 로마 사절단 중 몇몇이 부끄러운 나머지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처럼 로마인 중에서도 로마가 카르타고로부터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빼앗은 과정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들이 없지는 않았다.
하밀카르의 분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게다가 로마 원로원은 우리 가문이 에브로 강 이남을 정복하는 것에 관여하지 않기로 약속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군툼과 동맹을 맺었다! 네놈들도 사군툼에서 에브로강까지 가려면 말을 타고도 며칠은 달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테지? 두 나라의 협정을 깬 건 바로 너희 로마인이다!”
로마의 사절단장은 말로는 하밀카르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겁박하기 위해 자신이 입고 있는 로마의 전통 복장인 토가의 천 자락을 양손으로 들춰 보이면서 소리쳤다.
“정말 고집불통이군! 그렇다면 당신이 선택하시오! 이 토가 안에는 평화와 전쟁이 모두 들어있소! 원하는 쪽을 고르시오!”
“내 대답은 막사 밖에 있다. 말로 듣는 것보다는 직접 너희의 두 눈으로 보는 게 나을 것 같군.”
말을 마친 하밀카르가 막사 밖으로 나가버리자 로마의 사절단도 서로 눈치를 보다가 그의 뒤를 따라나갔다.
하밀카르는 로마의 사절단이 모두 막사 밖으로 나오자 곁에 있던 부관에게 명령했다.
“엠포리온을 공격하라.”
그의 말 한마디에 바르카 가문의 7만 대군이 일제히 로마의 동맹도시 엠포리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밀카르가 지휘하는 병사들은 보안을 위해서 로마 사절단 앞에서는 하스드루발이 개발한 신무기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충분히 강력했다.
엠포리온의 성벽보다 높은 바퀴가 달린 거대한 공성탑 열대가 엠포리온의 성벽을 향해 거리를 좁혀나갔다.
에포리온 수비대는 공성탑을 파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카르타고군의 공성탑이 다가온다! 투석기로 공성탑을 파괴하라!”
엠포리온의 포병들은 고대의 투석기 오나거로 어린아이의 머리만 한 돌덩이를 쏘아댔지만, 명중률이 형편없었던데다 겨우 25kg 정도의 돌을 쏠 수 있었기 때문에 열대의 공성탑 중 한 대만이 파괴되고 나머지 아홉 대는 적병으로 가득한 성벽에 무사히 도착했다.
공성탑의 꼭대기에 있는 나무문이 열리자 바르카 가문의 정예병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나와 겁에 질린 엠포리온 병사들을 처치하여 순식간에 성벽을 장악했다.
카르타고인들이 교묘한 술책으로 히스파니아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있다고 알고 있던 로마의 사절단은 하밀카르가 오직 강력한 군사력으로 순식간에 엠포리온을 공략하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밀카르는 그런 로마의 사절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로마로 돌아가서 원로원의 쥐새끼들에게 전해라.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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