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 [72화] 알프스 횡단 (2)
애마 부케팔로스의 등 위에서 한니발은 고개를 들어 거대하고 무심한 알프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인간의 재채기에 작은 나뭇잎이 날아가고 아무런 살의 없는 행인의 발걸음에 작은 개미가 밟혀 죽듯이, 산길을 걷던 병사들이 무심하게 불어온 강풍에 비틀대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코끼리가 한여름에도 산봉우리를 하얗게 덮고 있는 고집 센 만년설 위에 쓰러져 얼어 죽는 모습을 상상하며 몸서리쳤다.
한니발은 근심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자신의 옆에서 말을 보이족의 부족장 마실루스에게 물었다.
“정말 저 험난한 산맥에 군대와 코끼리가 지나갈 길이 있습니까? 언뜻 보기에는 코끼리는커녕 말 두 마리가 나란히 지나갈 길도 없을 것 같군요.”
“알프스에는 군대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이 두 개 있습니다. 한쪽은 거리가 짧은 대신 지형이 험한 길이고, 다른 한쪽은 좀 돌아가긴 하지만 길이 그런대로 평탄한 편입니다.”
“족장님께서는 어느 길로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의 질문에 마실루스는 고개를 돌려 바르카 가문의 형제들을 따라오고 있는 병사들을 보면서 말했다.
“솔직히 한니발 장군님을 만나려고 알프스를 넘어올 때까지는 어느 길로 가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돌아가는 길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실루스의 말에 한니발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대답했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이 나약해 보이십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제 예상보다 카르타고군의 수가 훨씬 많아서 그런 겁니다. 지름길 쪽은 길이 험하기도 하지만, 가는 길에 저 많은 군대가 먹을 식량을 얻을 큰 마을도 없습니다. 하지만 좀 돌아가는 길을 택하면 알로브로게스족의 영역을 지날 때 보급품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이상하군요. 아버지께서 미리 보이족에 사절을 보내셨다고 들었는데, 우리 군의 규모를 모르고 계셨다니 말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하밀카르 총독님께서 보내신 사절에게 원정대의 규모를 전해 듣기는 했습니다. 다만 카르타고군이 론 강을 건너고 나서도 이렇게 많이 살아남을 줄 몰랐을 뿐이지요.”
마실루스는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바르카 가문이 론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친로마파 갈리아인들의 공격을 받고 수가 많이 줄어들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이 생각해 낸 작전이 성공하면서 강을 건너는 도중 병사를 한 명도 잃지 않았기 때문에, 한니발은 알프스 산맥을 넘을 길을 선택할 수 없게 되었다.
한니발에게 마실루스가 말해준 행군 경로를 전해 들은 하스드루발은 벅차오르는 감동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드디어 카르타고군이 알프스를 넘은 경로를 알게 됐구나! 전생에서부터 늘 궁금하던 거였는데! 물론 원 역사에서는 지금보다 병사가 훨씬 적었으니 다른 경로로 산맥을 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속이 아주 시원하네!.’
그는 전생에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은 지 2,200년이 넘은 후에도 역사가들이 카르타고군이 과연 어떤 경로로 알프스를 넘었는지를 명확히 밝혀내지 못한 것을 답답하게 여겨왔다.
그는 후세의 역사학도들을 자신이 겪었던 고문에 가까운 궁금증에서 해방해 주기로 마음먹고 자신의 바로 뒤에서 말을 타고 따라오고 있는 실레노스에게 말했다.
“실레노스. 우리가 어떤 길을 지나고 무슨 고개를 넘어서 알프스를 정복하는지 꼭 자세히 기록해줘. 궁금한 게 있으면 나에게 말하고. 한니발 형에게 통역해 달라고 해서 마실루스 부족장님께 물어볼 테니까 말이야.”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여기서 보고 듣는 건 하나도 빠짐없이 파피루스에 적어서 후세에 남기겠습니다.”
바르카 가문의 로마 원정대는 계속 론 강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다 북동쪽으로 흐르는 론 강의 지류인 이제르 강에 도착했다.
마실루스는 이제르 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한니발에게 말했다.
“이제르 강을 따라 이틀 정도만 더 행군하면 알로브로게스족의 영역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알로브로게스족도 보이족이나 인수브레스족의 동맹부족입니까?”
“아닙니다. 그자들은 워낙 호전적이고 폐쇄적이어서 같은 갈리아인 부족과도 교류를 잘 안 합니다.”
“그렇다면 알로브레스족의 마을을 약탈해서 보급품을 얻어야겠군요.”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최근 알로브로게스족의 왕이 죽은 후 그의 두 아들이 서로 자기가 왕위계승자라고 주장하면서 내전을 벌이고 있다고 하니, 그 틈을 이용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마을을 약탈할 수 있을 겁니다.”
마실루스의 말이 가장 변수가 적은 방법이긴 했지만, 한니발은 로마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전에는 불필요한 전투를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아니면 두 왕자 중 세력이 강한 쪽과 거래를 할 수도 있겠지요.”
* * *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로마 원정대는 론 강을 건넌 지점에서부터 여드레 동안 행군하여 알로브로게스족의 영역 근처에 도착했다.
그 곳은 서쪽에 흐르는 론 강과 남쪽에 흐르는 이제르 강, 그리고 동쪽에 버티고 있는 알프스 산맥이 자연 경계를 이루고 있어 인근의 갈리아인들이 ‘섬’이라고 부르는 비옥한 평야 지대였다.
한니발은 ‘섬’에 발을 들이기 전에 인근의 다른 갈리아인 부족에게 은을 조금 나눠주고 알로브로게스족의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었다.
해가 저물자 한니발은 숙영지를 짓고 밤을 보내면서 두 동생과 아우니아를 자신의 막사로 불러 보급품을 얻으면서도 병사를 잃지 않을 방법에 대해서 논의했다.
먼저 막내 마고가 형들과 아내에게 말했다.
“이 주변에 사는 갈리아인들은 하나같이 최근 알로브로게스족의 두 왕자 중 형인 브랑쿠스 왕자의 세력이 동생 쪽보다 더 강하다고 했어.”
남편의 말에 아우니아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브랑쿠스 왕자와 동맹을 맺고 동생 쪽을 쳐부순 다음 전리품을 얻으면 되겠네요.”
그 말에 하스드루발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전투를 벌이면 병력손실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게 될 거예요. 알프스를 넘고 나서 우리 병사들이 지쳐있을 때 로마군이 덤벼오면 끝장이니까 최대한 일정을 서둘러야 해요.”
그 말에 한니발이 찬성했다.
“하스드루발의 말이 맞다. 알프스를 넘기 전에 전투를 벌여서 병사들의 힘을 빼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지. 브랑쿠스 왕자한테는 갈리아 지방을 지날 때 해왔던 것처럼 금을 주고 보급품을 얻어내는 게 제일 좋을 것 같군.”
동생들과 아우니아가 자신의 말에 찬성하자 한니발은 즉시 브랑쿠스 왕에게 켈트어를 할 줄 아는 병사를 사절로 보내 브랑쿠스 왕자와 회담을 열기로 했다.
한니발은 브랑쿠스 왕자에게 그가 사는 저택으로 찾아가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브랑쿠스 왕자가 카르타고군이 가져온 물건을 전부 직접 보고 싶어했기 때문에, 회담은 한니발의 막사에서 열리게 되었다.
한니발은 브랑쿠스 왕자와 직접 대화를 할 수 있었지만, 총사령관인 그가 두 동생에게 통역을 해주는 것도 모양이 살지 않기 때문에 마실루스의 부하 중 한 명이 통역을 맡았다.
브랑쿠스 왕자가 호위병 두 명을 데리고 막사에 들어서자 한니발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잘 오셨습니다! 대 알로브로게스족의 왕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 한니발입니다.”
“켈트어를 아주 유창하게 하시는군요. 반갑습니다. 알로브렉스족의 왕 브랑쿠스입니다.”
하스드루발과 마고가 통역사를 통해 브랑쿠스 왕자와 인사를 나눈 후 한니발은 돌려 말할 것 없이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은접시 여러 개와 금으로 만든 장신구를 그에게 보여준 다음 말했다.
“사절을 통해 이미 전해드린 내용이지만, 저희는 로마의 일곱 언덕을 불태우기 위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행군하고 있습니다. 부디 이 재물을 받으시고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이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넘으면서 먹을 식량과 만년설을 막아줄 가죽 신발을 나눠주시길 바랍니다.”
“음... 한니발 장군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만, 알로브로게스족은 지금까지 외부인을 영토 안으로 들인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중대한 사항이니만큼 여러 부족장의 의견을 들어본 다음 결과를 통보해 드리겠습니다.”
브랑쿠스 왕자는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는 한니발이 마음에 들었던 데다 동생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 군자금이 더 필요하던 참이었기 때문에 한니발과의 거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그는 당장 군량이 필요하고 시간을 많이 지체할 수 없는 한니발의 사정을 이용해 바가지를 씌우기 위해 그를 애태우는 중이었다.
그런 브랑쿠스 왕자의 속셈을 눈치채지 못할 한니발이 아니지만, 하루라도 빨리 로마를 정벌하고 싶은 마음에 그냥 재물을 더 얹어주고 식량과 가죽 신발을 받아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그때 하스드루발이 통역사를 통해 브랑쿠스 왕자에게 말했다.
“어쩔 수 없군요. 이것만은 내놓지 않으려고 했습니다만... 저희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전설의 명검을 내놓도록 하겠습니다.”
“전설의 명검이라고요? 얼마나 좋은 검일지 궁금하군요! 지금 당장 볼 수 있을까요?”
하스드루발은 통역사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그의 표정을 보고 막사 안에 있던 신성대 병사에게 검 한 자루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그 검은 바로 하스드루발이 우츠 강철을 사용해서 만든 무기 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다키아의 팔크스였다.
브랑쿠스 왕자는 신성대 병사가 가지고 온 다키아의 팔크스를 보고는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검 날의 물결무늬는 분명 아름답지만, 날 모양이 검이라기보다는 낫에 더 가까워 보이는군요. 이렇게 괴상하게 생긴 물건이 전설의 명검이라고요?”
통역사에게 왕자의 말을 들은 하스드루발은 대답대신 다시 신성대 병사에게 튼튼한 원형 방패를 하나 가져오게 했다.
하스드루발은 병사에게 방패를 가슴 높이로 들게 한 후 다키아의 팔크스를 양손으로 잡고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사선으로 휘둘러 병사의 팔을 피해 방패를 베어버렸다.
- 투콱!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나무를 세 겹으로 덧대서 만든 두꺼운 방패가 두 동강이 나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브랑쿠스 왕자는 놀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뜨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잘려나간 방패 조각을 들어 단면을 살펴보았다.
“이렇게 튼튼한 방패를 두 동강 내다니... 게다가 단면도 아주 깔끔하군요! 우리 부족의 병사들이 보면 거인이 커다란 도끼로 잘라냈다고 해도 믿겠습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한니발 장군님께서 말씀하신 식량과 가죽 신발에, 만년설이 쌓인 지역을 통과할 때 병사들이 입을 방한복을 주시면 그 검을 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말 몇 마리도 주실 수 있을까요? 론 강을 건널 때 말 몇 마리가 다쳐서 곤란하던 참입니다.”
“물론입니다! 이런 명검을 가지고 있으면 알로브로게스족의 모든 부족장이 절 우러러볼 겁니다! 내일까지 말씀하신 물건을 전부 보내드리겠습니다!”
통역사의 말을 듣고 하스드루발은 브랑쿠스 왕자에게 공손하게 검을 건네주었다.
브랑쿠스 왕자 일행이 카르타고군의 숙영지를 떠나고 나서 한니발이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우츠 강철로 만든 다키아의 팔크스는 3천 자루 정도 더 가져오지 않았나? 알프스를 넘고 우리 군에 합류할 갈리아인에게 주려고 말이야. 나중에 브랑쿠스 왕이 알면 아주 노발대발 하겠구나.”
형의 말에 하스드루발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감히 카르타고인에게 바가지를 씌우려고 하잖아. 그런 꼴을 당해도 싸지. 갈리아인에게 바가지를 쓰는 카르타고인 같은 건 역사에 길이 남을 웃음거리라고.”
바르카 가문의 형제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실레노스는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펼쳐 그날의 감상을 적어 내려갔다.
‘카르타고 최고의 명장이자 저명한 정치가이며 지중해에서 가장 부유한 무역상인 하밀카르 바르카는 여러 가지 재능과 미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 중 전사로서의 용맹함은 차남 한니발이 물려받았고 상인으로서의 재능은 삼남 하스드루발이 물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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