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 [73화] 알프스 횡단 (3)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에게 금붙이와 좋은 검을 받아 기분이 좋아진 브랑쿠스 왕자는 카르타고군의 숙영지에 엄청나게 많은 식량과 술, 좋은 말 스무 마리를 비롯한 가축, 그리고 방한 장비를 보내왔다.
하스드루발은 숙영지 한가운데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식량을 보고 한니발에게 말했다.
“전에는 군량이 바닥날까 봐 고민이었는데 이제는 너무 많아서 고민이네. 오늘 하루 병사들을 쉬게 하면서 배불리 먹이자. 어차피 다 가져가지도 못할 테니까.”
“그게 좋겠다. 알프스에 오르기 전에 병사의 사기도 올릴 필요가 있기도 하니까.”
그렇게 기원전 218년 7월 15일 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모닥불 근처에 둘러앉아 평소에 먹던 밀가루에 채소를 대충 썰어 넣어서 끓인 묽은 죽 대신 돼지 통구이와 부드러운 빵을 먹고 벌꿀술을 마시면서 즐겁게 웃고 떠들었다.
늘 병사들과 같이 음식을 먹어 온 바르카 가문의 형제들도 오랜만에 잔치를 즐겼다.
모두가 웃고 떠드는 와중에 오직 한니발만이 모닥불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서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카르타고군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알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형의 옆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말했다.
“혼자 무게 잡으면서 뭐해?”
“낮에 동쪽으로 정찰을 보낸 누미디아 기병이 돌아오는 걸 기다리고 있어. 지금쯤 돌아올 때가 됐는데 조금 늦는군.”
“하루만 좀 쉬게 내버려두지. 어차피 우리 군대가 알프스 산맥까지 가려면 최소한 보름은 더 행군해야 하잖아. 그전에는 딱히 적이 매복할 만한 장소도 없을 텐데.”
그러자 한니발이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동생에게 대답했다.
“하스드루발. 명장의 요건 중 가장 중요한 능력이 뭘까?”
“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지휘력이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 그렇지만 지휘관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군.”
“그럼 뭐가 제일 중요한데?”
“정보수집능력과 상상력이다.”
한니발의 말을 듣고 하스드루발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서양 전쟁사의 최고의 전략가 한니발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비결이 담겨있는 한마디네.’
기원전 3세기까지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은 그저 힘과 힘이 부딪히는 단순한 전투가 주를 이루었고, 적은 수의 군대가 대군을 이긴 전투도 장수의 뛰어난 전술지휘능력에 의존해 좋은 결과를 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한니발은 적과 아군의 상태를 늘 세심히 관찰하고 카르타고군이 지나는 곳의 모든 지형을 머릿속에 넣어두었다가 모든 정보를 취합하여 늘 획기적인 전략을 짜내 더 강한 적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둬왔다.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이 전략의 천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떠올리며 잠시 풀어졌던 마음을 다잡았다.
‘요즘 작은 성공에 익숙해져서 내가 좀 풀어졌었네. 로마는 병사를 20만에서 30만 명쯤 잃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우리는 한 번만 크게 져서 주력군 5만 명만 잃어도 그걸로 게임오버다. 아직 카르타고 시민권자의 수가 적으니까 말이야. 이번 생에도 나는 실패할 권리가 없구나.’
하스드루발은 단 한 번의 방심으로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꿈을 위해 쌓아온 노력이 물거품이 됐었던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자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이번 생에 한 번이라도 큰 실패를 겪으면 꿈을 접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과 40만 카르타고인까지 목숨을 잃거나 폐허가 된 고향에서 쫓겨나 비참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는 정신을 흐리게 하는 벌꿀술을 땅에 쏟아버린 후 한니발에게 말했다.
“형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겠어. 우리가 명장이 되지 않으면 카르타고는 언젠가 로마인들의 손에 불타버리겠지. 앞으로는 행군 중에 나무 한 그루를 봐도 그 뒤에 병사를 몇 명 숨길 수 있는지 계산하면서 다닐게.”
한니발은 말없이 손을 뻗어 동생의 등을 두드렸다.
바르카 가문의 로마 원정대는 자정이 되었을 때쯤 잔치를 마치고 숙면을 취한 다음 해가 떠오르자 다시 알프스를 향해 행군할 채비를 마쳤다.
한니발이 피로를 씻어내고 생생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병사들에게 외쳤다.
“하루라도 빨리 알프스 산맥에 도착해야 겨울이 오기 전에 이탈리아 반도에 도착할 수 있다! 눈을 맞으면서 산길을 오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행군을 서두르자!”
* * *
바르카 가문의 로마 원정대가 알프스를 향해서 한창 행군하고 있을 때, 스키피오 부자가 탄 2단노선이 이탈리아 반도의 서해안에서 가장 큰 군항이 있는 도시 오스티아의 항구에 정박했다.
집정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수행원 한 명 없이 아들만 데리고 배에서 내리자마자 군항을 지키는 장교에게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보문제로 원로원에 보고해야 할 사항이 있다! 당장 이 도시에서 가장 빠른 말을 내와라!”
평소 근엄한 집정관이 허둥대는 모습을 보고 군항의 장교는 급히 말 두 마리를 구해와 스키피오 부자에게 건네주었다.
붉은 석양이 평온한 지중해를 덮어가고 있었지만, 푸블리우스는 바로 로마를 향해 출발하기로 마음먹고 아들에게 말했다.
“여기서 로마까지는 말을 타고 반나절 거리도 안 된다! 곧 해가 지긴 하겠지만, 어서 출발하자!”
“알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쿠리아 호스틸리아(로마 원로원의 의회 건물)에 가시는 동안 저는 집에 가서 가족들에게 소식을 알릴게요.”
“그게 좋겠다. 네 큰어머니에게도 소식을 알려주렴. 큰어머니께서 나만 로마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다른 사람의 입에서 듣게 하면 안 된다.”
“명심할게요. 아버지. 이제 어서 출발하시죠. 곧 해가 질 거예요.”
스키피오 부자는 쉴 새 없이 말을 몰아 로마를 향해 달렸다.
고대의 항구도시 오스티아에서 로마까지 넓은 포장도로가 깔려있었던 데다, 거리도 불과 31km 정도밖에 안 됐기 때문에 스키피오 부자는 몇 시간 만에 로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밤이 깊었지만, 푸블리우스는 세르빌리우스 성벽 안에 들어가자마자 원로원 회의를 소집했다.
쿠리아 호스틸리아에 원로원 의원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자리에 앉자 프블리우스가 동료들에게 말했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고 있습니다. 올해 안에 카르타고군이 이탈리아 북부를 공격할 겁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소식에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졸음 때문에 반쯤 감겨있던 눈을 번쩍 떴다.
도저히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던 한 의원이 조금 언성을 높이며 푸블리우스에게 따지고 들었다.
“집정관님께서 교활한 적장 한니발에게 속고 계신 것 아닙니까? 아직 여름이긴 하지만 갈리아인이 아닌 이상에야 수만 명이나 되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자 또 다른 의원도 의구심에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습니다. 그곳에 사는 산악 갈리아인들은 평지에 사는 동족들까지 교류를 꺼릴 정도로 포악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말을 데리고 넘는 것도 힘든 그 험난한 산맥을 코끼리를 데리고 넘는 게 말이나 됩니까?”
눈앞에 위기가 닥쳐올 때 현실을 부정하려 드는 자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푸블리우스는 그런 동료들을 보자 짜증이 났지만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적장 한니발이 론 강을 건넌 지점에서 북쪽에 있는 갈리아인의 마을을 약탈한 것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아직 그 마을에 남아있던 주민의 말에 따르면 카르타고군은 약탈을 마친 후에 계속 북쪽으로 행군했다고 합니다.”
푸블리우스의 말에 원로원 의원들은 걱정에 찬 목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이제 막 파두스 계곡에서 일어난 보이족의 반란이 진압되어 가는 참인데, 산 넘어 산이군요!”
“정녕 우리 로마에는 야누스 신전의 문이 닫힐 날이 오지 않는 것인가?”
푸블리우스는 동료 의원들이 혼란에 빠지자 다시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 저도 여러분처럼 처음 카르타고군이 알프스를 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허둥거릴 때가 아닙니다. 지금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병력은 보이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있는 2개 군단이 전부입니다. 적장 한니발을 막으려면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할 겁니다.”
푸블리우스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던 파비우스가 입을 열었다.
“일단 당장 연락선을 띄워 시칠리아에 계신 티베리우스 집정관님과 그곳을 지키고 있는 3군단과 4군단부터 다시 로마로 불러들여야 합니다. 적장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는 데 성공하면, 아마 한 달 후 정도에는 이탈리아 반도에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겁니다.”
그 말에 푸블리우스가 대답했다.
“그렇게 빨리 말입니까? 알프스와 이탈리아 북부 사이에는 우리와 동맹을 맺은 타우리니족이 살고 있습니다. 그 야만인들이 어느 정도 시간을 끌어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카르타고군이 도강을 방해하는 갈리아인을 물리치고 론 강을 건넜을 때를 생각하면 타우리니족에게 그다지 큰 기대를 거는 건 현명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푸블리우스를 비롯한 다른 원로원 의원들은 파비우스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푸블리우스는 잠시 고심하다 동료 의원들에게 말했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 아무래도 적장 한니발과 카르타고군이 막 알프스를 넘어 지쳐있을 때 공격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파두스 계곡에 파견된 1군단과 2군단을 다시 지휘해 한니발을 막겠습니다. 티베리우스 집정관님께서 지휘하시는 군단병과 힘을 합치면 지친 카르타고군을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 겁니다.”
* * *
로마 원로원은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위협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로마를 멸망의 위기로 몰아갈 것이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고 있었다.
한니발의 군대는 보병과 기병을 합쳐서 7만 명 규모였지만, 로마는 군단병과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동맹도시들의 보조병을 합치면 그 열 배가 넘는 병사를 동원할 수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스드루발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알프스를 넘어 아직 로마군이 방심하고 있을 때 아직 병사가 징집되지 않은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들을 습격해 잠재적인 적군을 줄여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계절이 여름이라도 알프스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마실루스의 안내를 받으며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이 들어선 협곡을 가로지르는 좁은 길의 한쪽은 거대한 벽처럼 보이는 산이고, 다른 쪽은 깎아지른 듯한 골짜기와 절벽이었다.
하스드루발은 애마 페라리가 가파른 산길을 걷느라 지쳐버리는 바람에 말에서 내려 좁고 가파른 고갯길을 걸어 올라가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지리산 종주는 이거랑 비교하면 집 앞에 있는 편의점 가는 수준이었구나. 정말 죽을 것 같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가혹한 야간 산악행군에 너무 지친 나머지 넋을 놓고 걷다 돌부리에 걸리거나 다리가 풀려 넘어졌다가 힘겹게 한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하스드루발은 그 모습을 보고 그나마 지금이 여름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겨울에는 이 정신 나간 산길에 눈까지 무릎 높이까지 쌓인단 말이지? 겨울에 알프스를 넘은 원 역사의 한니발 형이 진짜 존경스럽다.’
그러나 바르카 가문의 형제들이 마주하게 될 위험은 험난한 자연뿐만이 아니었다.
한니발은 적대적인 산악 갈리아인들의 공격을 피하고자 점점 지쳐가는 병사들을 더욱 다그쳤다.
“브랑쿠스 왕자가 이 협곡 근처에는 다른 갈리아인 부족조차도 야만인으로 여기는 포악한 부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날이 밝기 전에 적대 부족의 거주지를 지나가야 한다.”
그렇게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밤을 새워가며 가파른 고갯길을 꾸역꾸역 올라가자 먼발치에 보이는 산의 정상이 조금씩 눈앞으로 다가왔다.
하스드루발은 정상을 올려다보며 이를 악물고 점점 굳어가는 다리를 움직였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내리막길은 좀 편하게 갈 수 있겠지.’
그러나 드디어 고갯마루에 오른 하스드루발은 몰려오는 실망감에 거의 주저앉을뻔했다.
내리막길도 지금까지 지나온 길보다 더 가파르고 좁은 데다, 고갯마루 아래의 평야 지대에 자리 잡은 적대 부족의 큰 마을이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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