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 [74화] 알프스 횡단 (4)
한니발은 병사들을 산 정상에서 잠시 눈을 붙이게 한 후 다시 산악행군을 시작했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과정은 비슷한 경사의 고갯길을 올라가는 것보다 훨씬 위험했다.
사람이야 자세를 낮춰가며 조심스럽게 걸으면 좀 더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었지만, 말이나 등에 짐을 실은 노새가 그런 재주를 부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베리아족 중기병들이 타는 히스파니아 산의 덩치 큰 말은 산악지대에 익숙한 덕에 사정이 나았지만, 누미디아 기병들이 주로 타는 북아프리카산의 작은 말은 심심치 않게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고갯길 옆의 절벽으로 굴러떨어졌다.
- 히히히힝!
또 등 뒤에서 말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기병대장 마하르발이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흔아홉 마리...”
한니발은 형제들과 함께 대열의 선두에서 걸어가면서 옆에 있는 보이족의 부족장 마실루스에게 물었다.
“마실루스 부족장님. 우리가 정말 좀 돌아가지만 평탄한 길로 들어선 것 맞습니까?”
“확실합니다. 오늘 하루만 고생하면 이 가파른 내리막길은 해가 지기 전에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평야 지대를 지나고 나면 다시 만년설이 쌓여있는 고지대를 한 번 더 지나가야 하지만, 앞으로 이렇게 지형이 험한 곳을 지날 일은 없을 겁니다.”
“지름길 쪽은 여기보다 더 길이 험하단 말입니까?”
“그쪽으로 가면 여기보다 더 험한 산길을 일주일 내내 지나가야 합니다.”
마실루스의 말을 듣고 질려버린 한니발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하스드루발은 걸어도 걸어도 끝날 기미가 안 보이는 내리막길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여름에 알프스를 넘으니 왔으니까 망정이지, 겨울이었으면 진짜 지옥이 따로 없었겠다. 꽁꽁 얼어붙은 내리막길에 발이 미끄러져서 절벽으로 떨어지는 사람이 5분에 한 명씩 나왔겠어.’
원래의 역사에서 한니발은 알프스 산맥 초입에서 보병 3만 8천 명과 기병 8천 기, 그리고 30마리가 넘는 코끼리를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카르타고군이 겨울을 맞은 알프스를 넘었을 때 남아있는 병력은 보병 약 2만 명과 기병 6천 기, 그리고 코끼리 일곱 마리가 전부였다.
‘지금도 만년설이 쌓여있는 지역에 코끼리를 데려갈 생각을 하면 한숨부터 나오는데, 원 역사에서 한니발 형은 대체 겨울에 여길 어떻게 넘은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하네.’
그렇게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이 반나절 동안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자 끝이 없을 것 같은 내리막길도 점점 경사가 완만해지고 길도 조금씩 넓어졌다.
마침내 말 네 마리가 가로로 나란히 서서 지나갈 수 있을 만큼 걸을 수 있을 만큼 길이 넓어져서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큰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하며 한 숨돌리고 있을 때, 아우니아가 내리막길 아래쪽을 바라보더니 이내 눈살을 찌푸리면서 바르카 가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고갯길을 따라 약 30 스타디온(약 5.4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길옆의 바위 지대에 적이 매복해 있습니다.”
바르카 가문의 형제들은 아우니아가 천혜의 요새 누만티아가 세워진 험한 산에서 자란 덕에 시력이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내의 말을 듣고 마고가 형들에게 말했다.
“이번에도 론 강을 건널 때처럼 불꽃을 터뜨려서 매복해 있는 적군을 쫓아낼 수 없을까?”
하스드루발이 고개를 저으며 동생의 말에 대답했다.
“저번에는 코끼리를 우리 병사들하고 멀리 떨어트려 놓은 다음 히스파니아의 불을 터뜨려서 기수가 폭음에 놀란 코끼리를 진정시킬 시간이 있었어. 그렇지만 이 좁은 산길에서 불꽃놀이를 하면 우리 병사들 바로 옆에서 코끼리가 놀라서 날뛰기 시작할 거야.”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바위틈에 숨어있는 적은 활을 쏘거나 돌팔매로 맞추기도 어려울 텐데.”
동생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한니발이 입을 열었다.
“산악 갈리아인들은 평지에 사는 동족들하고는 달리 용병으로 고용되지 않는 이상 자기들이 사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까지 원정을 다니거나 하지는 않지. ”
하스드루발은 거기까지만 듣고도 한니발의 생각을 알아낼 수 있었다.
“우리가 론 강을 건널 때 형이 원래 쓰려고 했던 방법을 응용해보려는 거구나. 별동대를 보내서 적의 마을을 불태우고 바위 지대에 매복해 있는 적들을 당황하게 할 생각이지?”
“역시 한마디만 하면 내 생각을 바로 맞춰버리는구나. 다만 이번에는 적의 마을을 찾을 때까지 이 좁은 산길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을 거야. 본대가 계속 바위 지대로 행군하는 사이에 별동대는 최대한 빨리 수색을 하는 수밖에 없겠지.”
“그러다가 별동대가 아군 본대가 바위 지대에 도착할 때까지 적의 마을을 아직 찾아내지 못하면 어떻게 해?”
“그렇게 되면 일단 아군 본대는 기습해오는 적과 맞서 싸워야지. 그러는 동안 별동대가 잘 해내기를 바라면서 말이야. 난 산을 잘 타는 경보병 2천 명을 데리고 적의 마을을 찾아볼게. 너는 본대를 이끌고 바위 지대로 가고 있어.”
형의 대담한 말을 듣고 하스드루발은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을 추구하는 건 아버지와 꼭 닮았네. 그런데 또 따지고 보면 지금 상황에서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어.’
한니발이 말한 작전은 얼핏 보기에는 무모해 보였지만, 사실 지금 상황에서 바위 지대에 매복해 있는 적의 허를 찌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 때 아우니아가 한니발에게 말했다.
“한니발 아주버님. 이번에는 제게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어요. 전 철이 들 때부터 누만티아와 피레네 산맥 사이를 오가면서 산과 구릉에서 전투를 벌여왔습니다. 적어도 아레바키족 중에서는 산악지대에서 저보다 별동대를 잘 이끌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한니발은 누만티아 공방전을 벌일 때 아우니아의 공격적인 게릴라전에 보급선이 끊겨 고생했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럼 제수씨를 한 번 믿어보겠습니다. 우리 군에 아레바키족 출신 병사가 꽤 많으니 그들을 데리고 이 부근에 있을 적 부족의 마을을 습격해주세요.”
“맡겨만 주십시오. 곧 적의 마을이 불타면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아우니아는 마고와 결혼한 후 처음 단독으로 병사들을 지휘하게 되자 의욕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아레바키족 출신의 경보병 2천 명과 함께 고갯길을 벗어나 마치 산양처럼 빠른 몸놀림으로 바위투성이인 산지를 뛰어 내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스드루발이 형 한니발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도 움직여야지. 적이 숨어있는 바위 지대는 바로 아래에 있는 고갯길에 돌을 굴려서 공격하기 좋은 위치에 있어. 코끼리를 대열의 후방으로 옮겨서 낙석에 놀라서 날뛰지 못하게 하자.”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 이런 좁은 길에서 코끼리 20마리가 한꺼번에 날뛰기라도 하면 사망자가 천 단위로 나올 테니까 말이야.”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한니발의 명령에 따라 코끼리를 대열 후방으로 옮기고 대열의 맨 앞에는 산악전투에 능한 히스파니아 출신 켈트족 중보병을 배치했다.
로마 군단병의 방패 스큐툼과 모양이 비슷한 타원형 방패를 사용한다고 하여 스쿠타리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이들은 경(輕)보병과 중(重)장보병의 중간 정도의 장비를 갖춘 고대 켈티베리아인 특유의 중(中)보병이었다.
스쿠타리들은 전통적으로 고대의 중장보병들이 입는 무거운 철제 사슬갑옷 대신 청동으로 보강한 가죽 갑옷을 입어 기동성과 방어력을 모두 어느 정도 갖춘 다용도 보병이다.
하스드루발은 이들에게 전통적인 갑옷 대신 가죽옷 안에 경화 과정을 거친 가죽 조각을 덧댄 두정피갑을 입혀 준수한 기동성과 방어력을 모두 갖춘 정예병으로 만들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커다란 바위들 뒤에 숨어있는 적을 애태우기 위해 일부러 행군속도를 늦추어 천천히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마침내 바르카 가문의 군대가 바위 지대 초입에 다다르자, 카르타고인들이 어서 자신들의 밑으로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다 지친 갈리아인 병사 몇 명이 지휘관의 명령도 기다리지 않고 어린아이의 머리만 한 커다란 돌을 집어던졌다.
하스드루발은 커다란 돌 몇 개가 고갯길 옆에 빼곡히 늘어선 바위에 이리저리 부딪히면서 아군을 향해 굴러 오는 것을 보고 병사들에게 외쳤다.
“방패를 들어 올려 머리를 보호해라!”
그의 우렁찬 외침이 고요했던 알프스 산맥에 메아리치자 대열의 맨 앞에서 행군하고 있던 병사들이 번개 같은 반사신경으로 한쪽 무릎을 꿇어서 자세를 낮추며 방패를 들어 올려 머리를 가렸다.
- 터엉!
몇몇 병사들이 큰 돌덩이가 방패에 부딪히는 충격에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조금 다치기는 했지만, 그 중에서 치명상을 입은 자는 거의 없었다.
산악 갈리아인 부족의 지휘관은 자신들의 위치가 들키는 바람에 낙석공격이 효과가 없을 것을 알고 마음이 급해진 나머지 전 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어차피 적장의 목만 자르면 카르타고인들은 개미 떼처럼 흩어질 것이다! 적장 있는 적군의 대열 맨 앞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라!”
지휘관의 명령에 바위틈 곳곳에 숨어있던 산악 갈리아인 병사들이 일제히 튀어나와 울퉁불퉁한 바위 사이를 뛰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산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은 야만인 병사들이 굶주린 늑대무리처럼 덤벼드는 모습에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르카 가문의 형제들은 이미 적의 기습에 충분한 대비를 해둔 상태였다.
“적의 돌격에 대비하라!!”
한니발의 외침에 스쿠타리들이 특유의 커다란 타원형 방패를 들어 올리며 앞으로 나서 적의 돌격에 대비했다.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전방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사이 마고는 스쿠타리의 진형 바로 뒤에서 누미디아 궁수들을 통솔했다.
누미디아 궁수들은 크레타 궁수보다 힘과 기술이 부족해 장력이 강한 각궁이나 철궁을 다룰 수 없었지만, 갈리아인처럼 갑옷을 입지 않은 병사가 많은 적에게는 충분히 효과적인 공격을 할 수 있었다.
“사격 준비! 적이 사정거리에 들어 올 때까지 기다려라!”
전방에 있는 하스드루발이 적이 누미디아 궁수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곁에 있던 병사에게 깃발을 흔들어 마고에게 신호를 보내게 했다.
마고는 흔들리는 깃발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발사!”
그러자 4천 개의 나무로 만든 활에서 발사된 화살이 돌진하는 산악 갈리아인들의 머리 위에 빗발쳤다.
“끄악!”
그러나 산악 갈리아인들은 적지 않은 수의 동료가 옆에서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것을 보고도 방패를 들어 올리며 계속 스쿠타리의 방패벽을 향해 돌진해왔다.
드디어 양측의 병사들이 격돌하려는 순간, 드디어 바르카 가문의 형제들이 목 빠지게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왔다.
한니발은 아우니아가 산악 갈리아인의 마을을 불태우면서 나오는 메케한 연기 기둥을 보고 일부러 갈리아식 켈트어로 우렁차게 외쳤다.
“아군이 적의 본거지를 불태웠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그 순간, 하스드루발은 거세게 공격해오던 산악 갈리아인들이 자기들의 마을이 있는 위치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바라보느라 기세가 꺾인 틈을 놓치지 않고 치고 들어갔다.
“적이 주춤하고 있는 틈을 놓치지 마라! 모두 돌격하라!”
방어태세를 굳히고 있던 스쿠타리가 갑자기 공격해오자 안 그래도 기세가 꺾인 산악 갈리아인들은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이 휘두르는 매서운 검을 이겨내지 못하고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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