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 [75화] 알프스 횡단 (5)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산악 갈리아인의 매복 공격을 막아낸 후 드디어 알프스 산맥에 들어선 이후 처음 마주친 협곡을 넘었다.
모든 바르카 가문의 병사가 산 아래로 내려온 후 보이족의 족장 마실루스가 한니발에게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다음에 지나가야 할 계곡이 나올 때까지 평야 지대를 지나게 됩니다. 그동안은 조금 전처럼 적대적인 부족과 계속 충돌하게 되시겠지만, 그자들이 평야에서 장군님의 군대를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군요. 특히 우리의 등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저 거대한 ‘괴물’ 때문에 말입니다.”
“대 보이족의 부족장님께서 한낱 짐승을 두려워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제 눈에는 저 코가 긴 짐승이 전설 속에서 튀어나온 괴물로 보입니다. 이 주변에 사는 산악 부족들도 같은 생각이겠지요.”
말을 마치고 마실루스는 두려움에 떨리는 눈빛으로 대열의 중간쯤에서 말 그대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전투코끼리를 흘끔 바라보았다.
하스드루발은 한니발과 마실루스의 대화를 옆에서 계속 듣다 보니 갈리아식 켈트어 실력이 많이 좋아진 덕분에 마실루스의 말을 알아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야 코끼리가 무서울 수밖에 없겠지. 알프스 주변의 갈리아인이 쓰는 켈트어에는 아예 코끼리를 뜻하는 단어조차도 없으니까 말이야.’
바르카 가문의 형제들은 평야 지대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적대 부족의 마을을 발견했을 때, 마실루스의 말이 사실임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영역의식이 강한 산악 갈리아인들은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이 자신들의 땅을 밟자마자 마을 밖으로 몰려나와 행군을 방해하며 고함을 질러댔다.
“침입자 놈들! 확 머리를 잘라 삼나무 기름을 발라버릴라!”
“우리 땅에서 썩 꺼져라!”
한니발은 짐승 가죽을 뒤집어쓰고 무기로 방패로 두드리면서 전의를 불태우는 적군을 보고 마실루스에게 말했다.
“어디 부족장님의 말씀이 맞는지 한 번 확인해 보지요. 전투 코끼리 부대 출격 준비!”
한니발의 명령이 떨어지자 본대의 맨 앞을 지키고 있던 보병들이 좌우로 비켜 길을 텄다.
그러자 그 사이로 우츠 강철을 아낌없이 써서 만든 중장갑을 전신에 두른 거대한 전투코끼리 스무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통 카르타고군이 사용하는 전투코끼리는 덩치가 작아 기수 한 명만 등위에 태울 수 있었다.
그러나 덩치 큰 인도코끼리로만 구성된 로마 원정대의 전투코끼리는 기수 이외에도 등위에 설치한 상교에 활과 창을 든 병사를 세 명이나 더 태우고 있었다.
먼 발치에서 그 모습을 본 산악 갈리아인 부족의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며 조금씩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저게 대체 뭐지? 침입자들이 기르는 괴물인가?”
“저 괴물 위에 병사가 네 명이나 타고 있어!”
한니발은 스스로 목책을 두른 마을 밖으로 나온 적에게 도망칠 틈을 주지 않았다.
“전투코끼리 돌격!”
총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코끼리의 목 위에 올라탄 기수가 한 손에 들고 있는 나무 막대기로 코끼리의 옆구리를 가볍게 쳤다.
그와 동시에 움직이는 거대한 바위 덩어리 같은 전투코끼리 스무 마리가 고막을 찢을 듯한 우렁찬 울음소리를 내며 맹렬히 적에게 돌진했다.
- 뿌우우!
안 그래도 간신히 두려움을 억누르며 자리를 지키고 있던 갈리아인 보병들은 비명을 지르며 독수리를 만난 참새 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괴물이다! 사람 살려!”
코끼리는 육중한 몸집에도 전속력으로 달리는 사람보다 빨랐기 때문에 도망치는 적군을 어렵지 않게 따라잡았다.
성난 코끼리는 겁에 질린 갈리아인 병사의 등을 끝에 날카로운 칼날을 단 상아로 들이받고 절구처럼 굵은 발로 쓰러진 적병을 짓밟았다.
그때 도망치기 바쁜 산악 갈리아인 병사 중에서 겁 없는 병사 한 명이 도망치는 동료들 사이를 뚫고 코끼리의 바로 옆으로 다가와 손에 쥔 창으로 힘껏 찔렀다.
- 터엉!
겁 없는 병사가 내지른 창이 코끼리의 옆구리에 정확히 명중했다.
그러나 나무 장대에 쇠꼬챙이를 달았을 뿐인 조잡한 창은 카르타고 최고의 대장장이들이 만든 튼튼한 갑옷을 뚫지 못하고 부러져 버리고 말았다..
창을 맞아 화가 난 코끼리는 자신을 공격한 병사를 코로 휘감아 공중으로 던져버렸다.
“끄아아악!”
코끼리에게 던져진 병사는 10m 정도 되는 거리를 날아가다 머리부터 땅에 떨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고 말얐다.
마실루스는 그 모습을 보고 너무 놀란 나머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건... 덩칫값을 하는 정도가 아니군요. 짐승 스무 마리에게 족히 3만 명은 넘어 보이는 갈리아인 전사들이 겁을 먹고 도망치다니...”
바르카 가문의 형제들로서는 조금 우쭐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들도 예상을 뛰어넘은 코끼리의 활약에 놀라느라 그럴 틈이 없었다.
하스드루발도 코끼리가 채찍처럼 휘두른 코에 맞은 적병 세 명이 땅에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하는 걸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북아프리카 코끼리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하구나. 북아프리카 코끼리가 일반인이라면 인도코끼리는 격투기 선수 같네.’
한니발이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도 정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해가 되는군. 저런 코끼리를 몇 천 마리나 가지고 있는 나라와 싸우는 건 자살행위지.”
“뭐... 그 말도 맞긴 하지만, 인도코끼리라고 다 저 녀석들처럼 크고 강하진 않을 거야.”
인도코끼리는 카르타고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주로 사용하는 북아프리카 숲 코끼리보다는 훨씬 컸지만, 사하라 이남에 사는 아프리카 코끼리에 비하면 평균적으로 덩치가 작은 편이었다.
하지만 개체 간 체격 차이가 큰 인도코끼리 중에는 아프리카 코끼리만큼 거대하게 자라는 개체도 종종 태어났다.
한니발이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왕에게 선물 받은 인도코끼리는 제국에서 가장 덩치가 큰 녀석들이었기에 아프리카 코끼리만큼이나 크고 힘이 셌다.
전투코끼리의 활약에 힘입어 바르카 가문의 형제들은 전의를 잃은 산악 갈리아 부족을 손쉽게 몰아내고 그들의 마을을 약탈할 수 있었다.
기병대장 마하르발은 이번 전투로 얻은 전리품을 하나하나 직접 확인한 후 한니발에게 보고했다.
“한니발 장군님. 적 부족의 마을에서 노새 오십 마리와 말 서른두 마리를 얻었습니다.”
“협곡을 통과하면서 잃은 말과 노새를 어느 정도 보충할 수 있겠군.”
“노새는 제법 쓸만합니다만, 말은 영 시원찮습니다. 히스파니아산 말처럼 덩치가 크고 힘이 센 것도 아니고, 북아프리카산 말처럼 민첩한 것도 아닌 왠지 어중간한 녀석들 뿐입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짝을 잃은 누미디아 기병들에게 이번에 얻은 말을 나눠주도록 하게.”
한니발이 이끄는 로마원정대는 그 후로도 평야 지대를 지나면서 지나가는 길에 있는 적대 부족의 마을을 약탈했다.
곧 한니발이 괴물을 데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알프스 산맥 골짜기마다 파다하게 퍼져나가면서 그곳에 사는 거의 모든 산악 갈리아인 부족이 그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덕분에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아무런 위험이나 어려움 없이 평야 지대를 통과할 수 있었다.
나흘 간의 행군 끝에 바르카 가문의 군대가 평야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계곡에 도착하자 마실루스가 한니발에게 말했다.
“이 계곡의 입구를 지나면 케우트로네스족의 영역에 들어서게 됩니다. 지금까지 마주쳤던 부족 중 알로브로게스족을 제외하면 가장 세력이 강하고 호전적인 자들이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병사들을 하루 쉬게 해야겠군요. 케우트로네스족이 우리를 편히 보내줄 생각이 없다면 이번에는 꽤 힘든 전투를 치러야 할 테니까요.”
“그럴 겁니다. 이 샹베리 계곡은 초입은 넓지만, 시냇물을 따라 산에 올라가다 보면 점점 길이 좁아지지요. 그런 곳에서는 저 코끼리라는 괴물과 기병이 제대로 싸울 수 없을 겁니다.”
아직 점심을 먹을 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한니발은 병사들에게 일찌감치 숙영지를 짓게 한 다음 그날 하루 병사들을 잘 먹이고 푹 쉬게 했다.
마고 부부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이,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7월 말의 무더위를 피해 숙영지 근처에 있는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피로를 풀었다.
한니발은 푸른 숲이 우거져있는 샹베리 계곡을 바라보면서 형제들에게 말했다.
“정말 아름답다. 히스파니아에서는 주로 광산을 개발하느라 파헤친 산만 보아왔었는데,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아 녹음이 우거진 모습을 보니 가슴이 후련해지는군.”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마냥 계곡의 경치를 즐길 수는 없었다.
‘원 역사에서 카르타고군은 알프스를 넘는 도중 만년설이 쌓여있는 지역을 지날 때보다 오히려 이 계곡을 지날 때 제일 큰 손해를 입었지. 저 아름다운 경치에 속으면 안 돼.’
그렇게 온 종일 휴식을 취하면서 원기를 회복한 바르카 가문의 형제들은 다음 날 아침 해가 뜨자마자 곧바로 병사들을 이끌고 계곡의 초입에 들어섰다.
그렇게 계곡을 오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열의 선두에서 말을 다고 가는 한니발의 앞에 케우트로네스족 수 백 명이 나타났다.
한니발은 마실루스가 호전적이라고 말한 이 지역의 원주민들이 먼발치에 모여 있는 것이 보이자 곧바로 근처에 있던 부관 기스코에게 지시했다.
“아직 저 녀석들이 덤벼들 낌세는 보이지 않지만, 일단 임전 태세를 갖춰라.”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한니발의 명령에 따라 검과 방패 양손에 쥐고 조심스럽게 케우트로네스족의 무리에게 다가갔다가 그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알로브로게스족 다음으로 강성하고 호전적인 종족이라던 산악 갈리아인 부족민들의 손에 갈리아인 특유의 긴 장검 대신 형형색색의 꽃을 엮어 만든 화환이 들려있었기 때문이다.
케우트로네스족 무리의 맨 앞에 서 있던 있는 금발의 미남 청년이 두 팔을 벌리고 산뜻한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샹베리 계곡을 방문해주신 해방자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저는 케우트로네스족의 왕 카르빌리우스의 아들 쿠노라고 합니다! 뭣들 하느냐? 어서 귀한 손님들의 목에 화환을 걸어 드려라!”
쿠노 왕자가 명령하자 긴 금발 머리와 푸른 눈이 매혹적인 갈리아인 미녀들이 화환을 들고 나와 바르카 가문 부관들의 목에 걸어주었다.
전투를 치를 준비를 하다 뜻밖의 환대를 받아 내심 놀란 한니발이 애써 기쁜 표정을 감추며 쿠노 왕자에게 대답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바르카 가문의 장군이자 로마원정대의 총사령관인 한니발입니다. 그런데 저희를 ‘해방자’라고 부르신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탐욕스러운 로마인들은 점점 갈리아인의 부족을 굴복시키거나 멸망시키면서 이 알프스 산맥 쪽으로 세력을 넓혀오고 있어 제 아버지이신 카르빌리우스 전하께서는 근래에 늘 고민에 빠져계셨습니다. 그러던 차에 한니발 장군님께서 모든 갈리아인의 숙적 로마를 멸망시키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먼 길을 오셨으니, 저희로서는 한니발 장군님이 구원자이자 해방자인 셈이지요!”
아우니아에게 쿠노 왕자의 말을 전해들은 마고가 활짝 웃으면서 두 형에게 말했다.
“드디어 알프스 산맥에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우리에게 우호적인 부족을 만났네! 여기서는 북이탈리아도 그리 멀지 않으니 어쩌면 케우트로네스족 전사 중에서 우리와 함께 로마군과 싸우러 가겠다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러나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지나치게 친절한 쿠노 왕자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수상해. 뭔가 구린내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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