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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77화 (77/201)

[ 77 ] [76화] 알프스 횡단 (6)

하스드루발은 이상하리만치 자신들을 환대하는 케우트로네스족의 왕자 쿠노의 웃는 얼굴을 흘끗 본 후 페니키아어로 한니발에게 속삭였다.

“형. 뭔가 수상해. 저 느끼한 웃음 좀 봐. 뭔가 있어.”

“내 생각도 그래. 하지만 저자가 진심이라면 쓸데없는 전투를 피할 수 있어. 우리의 적은 로마인들이지 저 야만인들이 아니야.”

“나도 그건 알고 있지만, 최대한 조심하는 게 조심하는 게 좋겠어.”

하스드루발은 원래의 역사에서 한니발의 군대가 샹베리 계곡의 양쪽이 높은 산으로 막혀있는 좁은 길을 지날 때 적대적인 부족의 기습을 받고 많은 병사와 보급품을 잃은 것을 알고 있었다.

‘원 역사에서는 카르타고군이 좁은 계곡길을 지날 때 원주민에게 기습을 당한 적이 있다고 했었지. 그때 입은 손해가 알프스를 넘을 때 당한 것 중 가장 컸다고 하던데. 그 부근이 아마 여기쯤일 거 같군. 그나저나 한니발 형이 그런 기습에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닌데 좀 이상하다. 뭔가 이유가 있었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쿠노 왕자는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자신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더욱 화사한 미소를 지으면서 바르카 가문의 형제들에게 말했다.

“물론 지금까지 수많은 전장을 해쳐오신 한니발 장군님께서 말로만 평화를 논하는 자를 믿기는 힘드시겠지요. 약소하지만 우리의 해방자분들을 위한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말을 마친 쿠노 왕자가 눈짓하자, 그의 수행원들이 식량이 담긴 포대 가득 실려있는 노새가 끄는 수레 다섯 대를 한니발의 눈앞에 가져왔다.

한니발은 케우트로네스족이 가져온 수레에 다가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수레에 실려있는 포대 중 하나에 조그만 구멍을 뚫었다.

그는 단검을 다시 칼집에 넣은 후 구멍에서 조금씩 새어 나오는 밀가루를 손바닥에 받아 손가락으로 헤집어 가며 자세히 살펴본 다음 쿠노 왕자에게 말했다.

“톱밥이나 모래가 섞여 있는 것 같지는 않군요. 선물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저도 카르빌리우스 전하의 호의에 금과 은으로 보답하겠습니다. 하지만 서로 선물을 주고받은 정도로는 바르카 가문이 케우트로네스족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을 것 같군요.”

당시 유럽 전역에 퍼져 있던 여러 켈트족 부족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았던 켈트족 부족들이 예외 없이 공유해온 문화적 특성은 이웃 부족이나 나라를 약탈하는 것을 명예로운 부업으로 여기는 전통이었다.

한니발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케우트로네스족이 자신과 평화협정을 맺는 척하면서 바르카 가문의 군대가 계곡을 지나는 동안 배후를 습격해 보급품과 재물을 빼앗으려 들 수도 있다는 의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런 한니발의 생각을 예측한 쿠노 왕자가 다시 한번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그를 설득하려 했다.

“확실히 재물이 오가는 정도로 서로 간의 신뢰를 쌓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실 줄 알고 우리 제 막냇동생 아를렌과 다른 부족장의 아들들을 데려왔습니다. 샹베리 계곡을 지나는 동안 이 애들을 잘 돌봐주십시오. 계곡을 떠나실 때 이 아이들을 데리러 갈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쿠노 왕자가 점잖게 표현하긴 했지만, 한마디로 바르카 가문의 군대가 계곡을 지나는 동안 케우트로네스족이 공격하지 않겠다는 사실을 보증하기 위해 귀족 신분의 어린 인질을 제공하겠다는 말이었다.

말을 마친 쿠노 왕자는 다시 수하들을 시켜 어린 남자아이 다섯 명을 한니발의 앞에 데려오게 했다.

쿠노 왕자는 그 중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한 남자아이와 눈을 마주치면서 말했다.

“아를렌. 이분들은 우리를 로마의 위협에서 구원해주실 분들이란다. 카르타고군이 계곡을 지나는 동안 케우트로네스족 답게 씩씩하게 잘 있어야 한다. 나중에 데리러 갈 테니까 도망갈 생각하지 말고.”

“걱정 마세요 형님. 한니발 장군님 말씀 잘 듣고 착하게 잘 지내고 있을게요.”

대화를 마친 쿠노 왕자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아를렌을 꼭 끌어안으며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바르카 가문의 병사 중 고향에 어린 자식을 두고 온 자들이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한니발도 쿠노 왕자와 아를렌의 우애 깊은 모습을 보고 케우트로네스족에 대한 의심을 풀었다.

“쿠노 왕자님. 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십 년 넘게 전장을 떠돌면서 교활한 적을 자주 만났던 탓에 아직 젊은 나이에 의심만 늘었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장군이 신중해야 병사들의 마음이 편해지는 법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렇게 한니발 장군님을 뵈니 카르타고군이 그토록 강한 이유를 잘 알겠습니다.”

쿠노 왕자의 말에 갈리아 지역의 켈트어를 할 줄 아는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아직도 쿠노 왕자를 의심하고 있었다.

‘생각났다! 원 역사에서 한니발 형은 가짜 인질을 제공하는 원주민에게 속아서 마음 놓고 좁은 계곡 길을 지나다가 기습을 당했어! 지금도 원 역사대로라면 저 애들은 전부 부족장의 자식이 아니라 노예이거나 평민의 자식이겠지.’

그는 간신히 원래의 역사 내용을 기억해내긴 했지만, 아직 케우트로네스족이 한니발과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확신을 하지 못했다.

‘쿠노 왕자가 한 행동이 전부 연기였다면 완전 칸영화제 남우주연상 감이야. 게다가 알프스를 넘고 있는 우리 군대는 원 역사보다 수도 많고 무장상태도 좋아. 케우트로네스족이 진짜로 우리에게 겁을 먹고 길을 내주는 쪽으로 역사가 바뀌었을 가능성도 충분해. 이거 어떻게 하면 좋지?’

하스드루발은 그 짧은 순간 열심히 머리를 굴려 대책을 생각해내고 마고를 불러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고야. 부탁이 하나 있어.”

“무슨 일인데?”

“아무래도 저 쿠노 왕자라는 자가 영 의심스러워. 너나 나나 갈리아식 켈트어 발음이 영 안 좋잖아? 그래서 제수씨한테 대신 물어봐 달라고 하고 싶은 게 있어.”

“동생을 끌어안고 눈물 흘리는 게 전부 연기였다고? 형. 저자들은 갈리아인 전사들이지 아테네인 연극배우가 아니야. 게다가 우리 군대의 총사령관께서 한 부족의 대표와 대화하는 자리에 내 아내가 끼어드는 건 좀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을까?”

“쿠노 왕자 말고 아를렌 왕자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그건 크게 문제 될 건 없겠네. 그럼 뭘 묻고 싶으신지 알려줘 봐.”

하스드루발은 마고에게 아를렌 왕자에게 묻고 싶은 내용을 알려주었다.

그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마고가 말했다.

“그게 전부야? 별로 의미 있는 질문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지금까지 의미 없는 일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 한번 그냥 내 말 대로 해줘.”

“알았어. 형이 이러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까.”

마고는 아우니아에게 하스드루발이 해준 말을 전해주었다.

아우니아는 남편의 하스드루발의 부탁을 전해 들은 후 아를렌 왕자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아를렌 왕자님. 처음 보는 부족 사람들 사이에 있으려니 좀 긴장되시죠? 전 여기서 멀리 떨어진 누만티아라는 도시에 사는 아레바키족의 공주 아우니아라고 해요.”

“안녕하세요 아우니아 공주님! 공주님은 저처럼 갈리아인이신가 봐요. 우리 부족 말을 참 잘하시네요!”

“외할아버지께서 세노네스족 출신이시니 4분의 1 정도는 갈리아인이지요. 세노네스족은 갈리아 북부에 사는 용맹한 부족이에요.”

주인에게 야단맞은 강아지처럼 풀이 죽어있던 아를렌 왕자는 아우니아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반가워했다.

그는 갑자기 여러 인종이 섞여 있고 거칠어 보이는 남자들밖에 없는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과 며칠씩이나 같이 지내게 되어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자기와 같은 켈트족인데다 어머니와 비슷한 또래인 여자를 만났으니 아를렌 왕자의 긴장이 풀려버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엄마가 보고 싶어요.”

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꼬맹이가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자, 아우니아도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하스드루발의 지시를 잊지 않고 아를렌에게 말했다.

“분명 아를렌 왕자님의 어머니께선 부족의 전사들에게 샹베리 계곡에서 제일 큰 사슴을 잡아오게 해서 요리할 준비를 하고 계실 거에요. 아들이 돌아올 날만 기다리면서요. 아마 내 말이 맞을걸요?”

“아니에요! 엄마는 이 시간이면 마구간에서 말똥을 치우고 계실 거에요! 우리 가족이 모시는 전사님이 마구간이 더러우면 엄청나게 화를 내시거든요!”

아를렌은 엄마가 너무 그리웠던 나머지 큰 소리로 말했다.

그 자리에서 갈리아 지역의 켈트어를 알아들을 수 있던 자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어버렸다.

한니발은 쿠노 왕자의 계략을 알아차린 후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눈앞의 사기꾼에게 말했다.

“대 케우트로네스족의 왕 카르빌리우스 전하께서는 요즘 왕비님께 마구간 청소를 시키시나? 아무래도 아내보다는 말을 더 아끼시는 모양이군?”

쿠노 왕자는 그제야 본색을 드러내며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저 빌어먹을 천민 꼬맹이! 그렇게 교육을 시켰는데 기어코 일을 망치는구나! 모두 나를 지켜라! 어서 이 자리를 빠져나가야 한다!”

쿠노 왕자는 자신의 말에 올라타기 위해 도망가려고 했지만, 그의 발보다 한니발의 손이 더 빨랐다.

한니발은 재빨리 오른손을 뻗어 갑옷 대신 평상복을 입고 있는 쿠노 왕자의 멱살을 잡고, 탄탄한 근육에서 뿜어져 나오는 괴력으로 그를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이 있는 쪽으로 던져버렸다.

한니발에게 던져진 쿠노 왕자는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수레에 얼굴을 부딪치면서 코가 부러지고 말았다.

“끄어어억!”

쿠노 왕자가 위기에 빠지자 케우트로네스족의 전사들이 그를 구하기 위해 용감하게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그러나 그들이 덤벼들기 전에 하스드루발이 이미 코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쿠노 왕자의 목에 단검을 들이대고 있었다.

동생이 생각대로 움직여 준 것을 확인하고 한니발이 케우트로네스족 전사들에게 말했다.

“네놈들의 반응을 보니 저자는 진짜 왕자가 맞나보군.”

한니발의 말에 케우트로네스족의 전사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자가 대답했다.

“쿠노 왕자님은 카르빌리우스 전하의 후계자이시다! 그 분을 해쳤다가는 너희 카르타고인들도 살아서 이 계곡을 지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 말에 한니발의 다시 한번 차갑게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뒤쪽에 서 있는 코끼리를 가리키며 케우트로네스족의 전사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훌륭한 인질을 죽일 리가 있겠나? 가서 너희들의 왕에게 전해라. 우리가 샹베리 계곡을 지나는 동안 화살 한 개라도 날아오면 그토록 아끼는 후계자가 저 괴물에게 산 채로 잡아먹힐 거라고 말이다.”

마침 한니발이 가리킨 코끼리가 코를 공중으로 치켜들며 우렁차게 울부짖었다.

- 뿌우우우우!

케우트로네스족 전사들은 한니발의 군대에 패배하고 마을을 잃은 피난민들에게 전투코끼리의 위력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때 하스드루발이 형 한니발의 어깨를 톡톡 쳤다.

한니발이 뒤를 돌아보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벌벌 떨고 있는 아를렌을 안고 있는 하스드루발이 눈에 들어왔다.

한니발은 한숨을 한 번 푹 쉬고는 다시 케우트로네스족 전사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저 아이들의 가족을 우리에게 데리고 와라. 아이의 가족들이 내 앞에 왔을 때 조금이라도 다쳐있으면 쿠노 왕자에게 똑같은 대우를 해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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