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 [77화] 알프스 횡단 (7)
쿠노 왕자가 붙잡히는 바람에 케우트로네스족 전사들은 어쩔 수 없이 한니발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갈리아인 전사들이 모두 물러가자 한니발은 흘러내린 코피에 턱수염이 흥건히 젖은 쿠노 왕자를 한번 흘끗 본 다음 병사들에게 말했다.
“저자를 치료해주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혀라.”
그 말에 하스드루발이 대답했다.
“죽을 정도의 상처는 아닌데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상품에 흠집이 나 있으면 비싼 값에 팔 수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감히 형에게 사기를 치려 한 괘씸한 놈이잖아.”
“지휘관이 이성보다 감정을 따르면 아군을 사지로 내몰게 된다고 실레노스에게 배웠잖아?”
한니발의 말에 실레노스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에 하스드루발도 그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고대에는 몸값을 받거나 아군 포로와 맞교환하여 전쟁포로를 풀어 주는 것이 상식이었다.
하스드루발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지만, 그는 죄 없는 어린아이들을 미끼로 쓴 쿠노 왕자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알로브로게스족과 거래한 사례도 있으니 길만 내주면 우리가 얌전히 지나가면서 재물도 주는 걸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전리품 좀 더 얻어보겠다고 불쌍한 애들을 미끼로 써? 속은 줄 모르는 상태에서 케우트로네스족에게 기습을 당했으면 화가 난 병사들이 얘들을 십자가에 매달자고 했겠지.’
그렇게 하스드루발이 속을 끓이고 있는 사이 케우트로네스족의 왕 카르빌리우스의 신하들이 가짜 인질로 끌려온 아이들의 가족 수십 명을 데리고 와 한니발에게 넘겨주었다.
아이들의 가족 중 붉은 머리카락을 한 젊은 여자 한 명이 아를렌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달려오며 소리쳤다.
“아를렌! 무사했구나! 어디 다친 데 없지?”
“엄마? 엄마! 너무 보고 싶었어요! 으앙!”
갈리아인 모자가 서로 얼싸안고 굵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눈시울을 붉혔고, 더러는 대성통곡을 하는 병사도 있었다.
한니발은 주변이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침착하게 카르빌리우스 왕의 신하들에게 말했다.
“이제 가봐라. 너희들의 영역이 끝나는 지점에서 왕자와 몸값을 교환하도록 하자고 너희의 왕에게 전해라. 우리가 행군하는 동안 쿠노 왕자의 몸무게와 같은 양의 황금을 준비해와라.”
그러자 카르빌리우스 왕의 신하 중 가장 신분이 높은 자가 한니발에게 앓는 소리를 해댔다.
“쿠노 왕자님은 날씬한 편이긴 하시지요. 그래도 키가 크신 편이라 체중이 2달란트(약 68kg)가 훨씬 넘으십니다. 아마 사흘이면 계곡을 지나실 수 있을 텐데, 그 안까지 그 많은 금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그럼 자네들의 사정을 좀 고려해주겠네.”
“정말이십니까? 뭐라고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이렇게 하지. 사흘 동안 모을 수 있는 만큼만 금을 모아와라. 그럼 우리는 너희가 모아온 금과 쿠노 왕자의 무게를 저울로 달아보겠다. 금이 왕자의 체중보다 가벼우면 그만큼 왕자의 몸을 잘라낸 다음 너희에게 넘겨주도록 하겠다.”
카르빌리우스 왕의 신하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한니발은 조각처럼 굳어버린 케우트로네스족의 귀족들에게 호통쳤다.
“그렇게 멍청히 서 있을 시간이 있나? 그만 너희의 왕에게 돌아가라! 가서 자식이 사지 멀쩡하게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으면 금을 충분히 준비해 두는 게 좋을 거라고 전해라!”
카르빌리우스 왕의 신하들은 산을 쪼갤 듯한 한니발의 일갈에 정신을 차리고 부리나케 말 등에 올라 도망치듯 한니발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쿠노 왕자는 한니발과 신하들의 대화를 듣고 나서 공포에 울부짖기 시작했다.
“한니발 장군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항하지 않는 자의 몸을 산채로 잘라내다니요! 너무 끔찍하지 않습니까!”
“내 생각에는 부모 곁에서 잘 자라고 있는 애들을 강제로 데려다 미끼로 써서 죽게 만드는 게 더 끔찍한 일인 것 같은데?”
한니발의 말에 쿠노 왕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하염없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하스드루발은 그 모습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형은 다 생각이 있었구나... 확실히 이 방법이면 저 괘씸한 인간을 벌주면서도 몸값도 많이 받아낼 수 있겠네.”
“뭘. 나보다는 네 활약이 훨씬 더 대단했다. 네가 저 가증스러운 자의 속셈을 간파해내지 못했다면 좁은 계곡 길을 지나다 적의 기습을 받고 큰 손해를 입었겠지. 대체 어떻게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낸 거야?”
“그냥... 아를렌하고 쿠노 왕자가 별로 안 닮았더라고.”
한니발은 동생이 또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굳이 그것이 뭔지를 캐묻지는 않았다.
한바탕 소동이 마무리된 후 바르카 가문의 군대는 다시 계곡에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나아갈 준비를 했다.
행군을 시작하기 전에 하스드루발이 한니발에게 말했다.
“쿠노 왕자를 코끼리 등에 태우고 대열의 맨 앞에서 가게 하자.”
“왜? 묶어서 수레에 태우는 쪽이 여러모로 더 편하지 않나?”
“갈리아인 중에는 다혈질인 사람이 많아. 카르빌리우스 왕은 아마 우리를 공격할 생각을 접었겠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복수하고 싶은 자들도 없지는 않을 거야.”
“과연! 네 말대로 하면 무턱대고 우리를 공격하려는 자들도 코끼리에 겁을 먹어서 도망가거나 왕자가 다칠까 봐 우리를 공격하는 걸 꺼리겠구나! 당장 그렇게 하자.”
한니발은 하스드루발의 말대로 쿠노 왕자를 코끼리의 등에 태워서 대열의 맨 앞에서 세웠다.
그렇게 사흘 동안 행군한 끝에 바르카 가문의 군대는 무사히 케우트로네스족의 영역을 빠져나와 카르빌리우스 왕에게 몸값을 받고 쿠노 왕자를 풀어주었다.
한니발은 몸값으로 받은 금붙이를 병사들이 수레에 싣는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생각보다 양이 적군. 내가 그 인간을 너무 몰아붙였나? 사흘 동안 살이 그렇게 많이 빠져버릴 줄은 몰랐네.”
형이 쿠노 왕자의 몸값을 받는 동안 하스드루발은 마고 부부와 함께 가짜 인질로 끌려온 아이들의 가족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카르빌리우스 왕의 잔혹한 화풀이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나기로 한 갈리아인들은 하스드루발과 마고에게 감격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바르카 가문의 형제분들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저희 모두 지금쯤 카르빌리우스 왕에게 죽고 말았을 겁니다!”
“신들께서 바르카 가문을 축복하실 겁니다! 꼭 로마 원정에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마고는 아직 아우니아의 통역을 해줘야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었지만, 하스드루발은 지난 며칠간 아를렌과 대화를 하는 동안 갈리아 지역의 켈트어 실력이 많이 는 덕분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너희들도 무사히 새로운 터전을 찾길 바란다. 보이족의 부족장이신 마실루스님의 말씀으로는 여기서 동쪽으로 며칠만 가다보면 바르카 가문과 동맹을 맺은 인수브레스족의 영토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하더군. 한니발 장군님의 인장이 찍힌 서신과 재물을 좀 줄 테니 그걸 인수브레스족의 부족장님께 전해드려라. 그럼 그분께서 너희를 거둬주실 거다.”
그 말에 갈리아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하스두루발에게 거듭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때 아를렌의 아버지 브라단이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부디 알프스를 넘을 때까지 제가 바르카 가문의 길 안내인 노릇을 하게 해주십시오. 아들을 구해주신 은혜를 꼭 갚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미 마실루스 부족장님께 안내를 받고 있어서 괜찮네. 마음만 받겠네.”
“마실루스 족장님도 이탈리아 북부와 갈리아를 오가시면서 종종 알프스를 넘으셨다고 하니 이 근방의 지리에 밝으실 겁니다. 하지만 저도 벌써 15년 넘게 사냥꾼 노릇을 하면서 알프스의 지리를 전부 꿰고 있어 없는 것보다는 도움이 될 겁니다.”
아우니아도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알프스 산맥에서 30년 가까이 살아온 사람이라고 하니 마실루스 부족장님보다 이 근처의 지리에는 더 밝을 수 도 있을 것 같네요. 한 번 도움을 받아보시지요?”
산에 익숙한 아우니아가 그렇게 말하자 하스드루발도 브라단의 도움을 받아보기로 했다.
“제수씨 말이 일리가 있네요. 브라단이라고 했나? 그럼 우리 군대가 만년설이 쌓여있는 지역을 벗어날 때까지만 부탁하겠네.”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 * *
만년설이 뒤덮인 알프스는 역동적이지만 고요했다.
출렁이는 파도가 그대로 얼어붙은 듯한 산맥에 잡티 한 점 없는 새하얀 눈이 차분히 쌓여있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동시에 경건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아... 이게 눈이구나.”
한니발은 만년설로 뒤덮인 협곡을 보면서 나직이 감탄을 자아냈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 반응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아 7만 명이 넘는 장정이 하나같이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처럼 태어나서 처음 보는 하얀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른 바르카 가문의 사람들이 새로운 경험에 감동을 느끼고 있을 때 하스드루발은 전생의 추억에 잠겨있었다.
‘와... 이게 얼마 만에 보는 눈이냐. 내 나이가 스물넷이니 24년 만이네.’
대부분 북아프리카나 히스파니아 출신인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 중에는 추운 날씨를 경험해본 적 있는 자가 거의 없었지만, 알프스의 만년설은 그런 그들도 잠시나마 추위를 잊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갈리아인 안내인들은 저 아름다운 눈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마실루스가 만년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한니발에게 말했다.
“눈을 너무 오래 보고 있으면 시력이 나빠집니다. 다행히 브라단이라는 자가 지름길을 알려줘서 일정을 단축할 수 있게 됐으니 서둘러 이 지역을 벗어나야 합니다.”
“제가 그만 넋을 놓고 말았군요. 알겠습니다. 어서 출발하시지요.”
한니발의 명령에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눈의 유혹을 떨쳐내고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그 후 그들이 새하얗고 아름다운 눈을 증오하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두 코끼리의 앞길에 쌓여있는 눈을 치워라!”
하스드루발의 외침에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이 검과 창 대신 삽을 들고 허리까지 쌓여있는 만년설을 치우며 제설의 고통에 몸부림쳤다.
하스드루발은 그 모습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코끼리는 겁이 많아서 위험이 느껴지는 곳에는 절대 가려고 하지 않지. 인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녀석들이니 차가운 눈이 많이 쌓여있는 곳을 위험하다고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야.’
수만 명의 병사가 거의 세 시간 이상 눈을 치우고 난 다음에야 코끼리들은 찬물에 발가락부터 담가 보는 어린아이처럼 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병사들의 고통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계절이 한여름이다 보니 하루 중 가장 날이 더울 때는 알프스의 빙하가 조금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산봉우리에서 흘러내린 물이 만년설에 섞이면서 진창같이 변해버렸다.
‘시발! 행군 경로가 꼭 우유를 부어서 숟가락으로 휘저은 팥빙수처럼 되어 버렸잖아! 군인에게 눈은 하얀 쓰레기일 뿐이라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네. 그나마 계절이 여름이라 이틀 정도만 이런 길을 걸으면 되니까 천만다행이지.’
하스드루발은 병사들과 코끼리가 지치지 않게 하려고 그동안 아껴왔던 고열량식을 틈만 나면 먹였다.
덕분에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는 병사들은 식사 시간에만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생전에 아침 점심으로 이 비싼 아몬드를 먹는 날이 올 줄은 몰랐어.”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꿀은 추위 때문에 굳어버려서 영 먹기가 불편하네. 그래도 맛있긴 하지만.”
하스드루발의 노력 덕분에 바르카 가문의 군대가 만년설이 쌓인 협곡을 지나는 동안 영양이 부족해 저체온증으로 쓰러지는 병사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로마 원정대가 온 힘을 다해 마지막 협곡을 지나자 드디어 한니발의 역사적인 알프스 횡단은 막을 내렸다.
한니발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북이탈리아의 평원을 보며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는 저 험난한 알프스를 정복하고 드디어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이제 우리가 정복해야 할 건 무엇이냐!”
바르카 가문의 병사 7만 명의 마음이 담긴 외침이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평원을 가득 메웠다.
“로마! 로마! 로마!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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