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 [78화] 타우리니족과의 조우 (1)
기원전 218년 8월 초, 바르카 가문의 로마 원정대는 파두스 강변에 발을 디뎠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전성기를 맞아 잘 영근 태양이 뿜어내는 한여름의 뙤약볕을 맞으며 이탈리아 북부의 넓은 초원 위를 행군했다.
그들이 쓰고 있는 철제 투구 밖으로 쉴 새 없이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려 입가를 간지럽혔지만, 지친 기색을 보이는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이탈리아의 한여름 날씨가 그들의 고향인 북아프리카나 히스파니아의 초여름 날씨 수준인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지만, 무엇보다 큰 손실 없이 험준한 알프스를 정복했다는 자부심이 그들의 가슴을 가득했기 때문이다.
보이족의 부족장 마실루스가 한니발의 등 뒤를 따라오고 있는 병사들을 보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한니발에게 말했다.
“정말 대단하군요! 저 험한 알프스를 7만이 넘는 대군이 넘는 동안 낙오자가 천 명도 안 나오다니요! 그것도 적대적인 산악 부족의 저항을 견뎌내면서 말입니다!”
“신들께서도 우리가 로마를 정복하길 바라고 계신 모양입니다. 우리의 앞길을 이렇게 밝게 비춰주고 계시니 말입니다.”
“동감입니다. 특히 한니발 장군님과 하스드루발 장군님의 활약을 보고 있자면 신들께서 바르카 가문과 함께하고 계신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극찬을 들은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의 마음은 마냥 편하지만 않았다.
알프스를 넘는 과정에서 아주 적은 손실만 입은 것은 분명히 큰 성과였다.
문제는 그 손실이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의 예상보다도 훨씬 적었다는 점이다.
하스드루발은 결의에 찬 얼굴로 당당하게 진군하는 병사들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며 한니발에게 은밀히 속삭였다.
“형. 저 많은 병사를 먹일 군량을 어떻게 구하지? 약탈만으로는 좀 부족할 것 같은데.”
“그러게 말이다. 솔직히 나도 알프스를 넘으면서 최소한 1만 명은 낙오할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말이야. 어쩌면 군대를 둘로 나누어 각자 다른 곳의 마을을 약탈하면서 이탈리아 남부로 진군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두 형의 대화에 마고도 끼어들었다.
“그게 최선일 것 같기는 한데, 유능한 부관이 별로 없어서 그것도 좀 불안해. 지휘체계가 흐트러져서 로마군에게 부대가 각개격파 당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생의 말에 동의했다.
하스드루발는 로마 원정 도중 본국과 히스파니아에서 보급을 받을 수 있게 되기 전까지 부족한 군량을 충당하기 위해 둔전을 일구어 밀과 순무를 재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이탈리아 반도 내에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영토를 확보하고 나서야 실행할 수 있었다.
그 때 뭔가를 생각해낸 한니발이 마실루스에게 물었다.
“마실루스 부족장님. 혹시 이탈리아 북부에 바르카 가문과 동맹을 맺고 보급품을 지원해 줄 갈리아인 부족이 있을까요?”
“한니발 장군님께 조금이나마 식량을 나눠줄 군소부족은 제법 많을 겁니다. 하지만 이 많은 병사들에게 지속적으로 보급품을 댈 수 있는 큰 부족은 우리 보이족과 인수브레스족, 그리고 타우리니족 정도겠지요. 아니... 이제는 타우리니족 뿐이겠군요.”
마실루스는 오늘 아침 한니발을 찾아온 보이족의 사절에게서 보이족과 인수브레스족의 연합군이 보름 전에 벌어진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대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두 부족은 이번 전투의 패배로 세력이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바르카 가문의 군대에 보급품을 나눠줄 여유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한니발이 부족의 운명을 걱정하는 마실루스를 위로했다.
“위대하신 바알 함몬께 맹세코 바르카 가문이 로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다음 보이족과 인수브레스족의 재건을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꼭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군요. 참, 아마 타우리니 부족을 설득하기는 힘드실 겁니다. 그자들은 최근 갈리아인의 긍지를 버리고 로마의 개가 되어버렸다고 하니까요.”
“마실리아 주변의 갈리아인 부족처럼 말입니까? 곧 타우리니족의 영역에 들어서는데 곤란하게 됐군요.”
“협상을 하시는 것보다는 타우리니족의 도시를 약탈하는 게 장군님께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알프스를 넘었으니 전 이만 제 동족들에게 돌아가겠습니다. 전사가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상황일 테니까요.”
“이대로 저와 함께 하시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정말 아쉽군요.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켈트족의 신들께서 보이족과 부족장님을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한니발은 마실루스에게 감사의 뜻으로 금으로 만든 장신구가 들어있는 가죽 주머니와 식량, 그리고 좋은 검 한 자루를 선물한 후 그와 헤어졌다.
하스드루발은 수하 네 명과 함께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며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마실루스의 모습을 보면서 한니발에게 말했다.
“보이족과 인수브레스족이 로마와 전쟁을 벌이지 않았으면 우리는 알프스를 넘자마자 로마군과 전투를 벌였을 수도 있었겠지. 빨리 이 부근의 갈리아인과 동맹을 맺지 않으면 이번 전쟁에서 이기기 어려울 거야.”
“네 말이 맞아. 일단 타우리니 부족과 협상을 해보자. 협상 타결 가능성이 적긴 하겠지만, 현재 이탈리아 북부에서 세력이 가장 강한 부족이니까 시도는 해볼 가치는 있어.”
“뭐? 아.... 하긴 타우리니족이 친로마 부족이라도 우리가 협상시도도 안 해보고 공격하면 다른 갈리아인 부족들이 우릴 너무 두려워하긴 하겠다.”
원 역사에서 타우리니족은 한니발의 동맹 제의를 거절하고 로마로 가는 길을 내주기를 거부하다가 카르타고군의 공격에 멸망한 부족이다.
하스드루발은 역사 지식에서 비롯된 편견 때문에 타우리니족과 협상조차 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을 마음속 깊이 반성했다.
‘원 역사에서 알프스를 갓 넘은 카르타고군은 수도 적고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고 하지. 나라도 로마 대신 쫄쫄 굶어서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있는 병사 2만 6천 명을 데리고 있는 장군하고 동맹을 맺으려고 하지는 않았을 거야. 지금 우리 군대는 원 역사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하니까 타우리니족을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몰라.’
바르카 가문의 형제들은 대화를 마친 후 전군을 이끌고 파두스 강을 따라 동쪽으로 행군했다.
한니발은 20km 정도를 나아간 후 병사들에게 강가 옆에 숙영지를 짓게 한 다음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자마자 한니발은 형제들과 부관 전원을 자신의 막사로 불러 군사회의를 열었다.
“이제 10 스타디온(약 1.8km) 정도만 더 가면 타우리니 족의 영역에 들어선다. 최근 로마와 동맹을 맺은 부족인 만큼 어쩌면 파두스 강변의 모든 타우리니족의 도시와 마을을 파괴해야 할지도 모른다. 마하르발. 회의가 끝나면 바로 기병 500기와 함께 행군 경로에 적의 복병이 없는지 정찰을 하고 오게.”
“알겠습니다. 장군님.”
회의가 끝나자마자 기병대장 마하르발은 누미디아 궁기병 500기를 이끌고 숙영지를 나섰다.
하스드발은 마하르발과 함께 정찰을 나가서 주변의 지형을 미리 익히고 싶었지만, 역사의 교훈을 떠올리며 자중하기로 했다.
‘원 역사에서 로마의 검 마르켈루스도 얼마 안 되는 기병만 데리고 정찰을 나갔다가 우연히 거길 지나던 누미디아 기병대와 마주치는 바람에 허무하게 죽었지. 지휘관이 쓸데없이 몸을 막 굴리면 안 된다.’
그의 예상이 어느 정도 들어맞았는지, 정찰을 나갔던 마하르발의 기병대는 마침 그곳을 지나던 타우리니족의 기병 300기의 공격을 받고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하지만 등자와 각궁으로 무장한 누미디아 궁기병이 말을 타고 도망가다 등 뒤의 적을 활로 쏘는 파르티안 샷(Parthian shot)을 구사하며 적 기병을 농락한 덕에 마하르발은 단 한기의 아군 기병도 잃지 않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는 그날의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을 챙길 수 있는 만큼 챙긴 후 포로들을 데리고 숙영지로 돌아온 다음 한니발에게 보고했다.
“한니발 장군님. 정찰 임무 수행 도중 타우리니족의 기병 300기와 교전을 벌여 승리했습니다. 적 기병 중 150기를 사살했고 102기는 도주했으며 적의 기수 48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자네가 먼저 공격한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타우리니족 기병이 먼저 저희를 발견하고는 돌진해 왔습니다.”
“그랬군. 아군이 수가 더 많았다고는 하지만, 사상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니 정말 잘해주었네.”
“별말씀을요. 저는 검을 뽑을 틈도 없이 누미디아 궁기병들이 순식간에 적을 물리쳐버렸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하스드루발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누미디아 궁기병들을 적 기병과의 전투에 투입해본 적이 없어서 조금 불안했는데, 갈리아 기병을 아무 피해 없이 물리칠 정도면 로마군의 기병 정도는 쉽게 이길 수 있겠네!’
갈리아인은 누미디아인과 함께 기원전 3세기의 지중해 세계를 대표하는 기마민족이었다.
갈리아 기병은 마상 전투 기술이 뛰어나고 좋은 말을 탔기 때문에, 농경민족인 로마의 기병보다 월등히 강했다.
하스드루발은 이번 전투로 갈리아 기병을 상대로 뛰어난 활약을 보인 누미디아 궁기병이 특별히 불리한 지형에서 전투를 벌이지 않는 이상 로마 기병에게 패할 일은 없다고 판단했다.
한니발도 하스드루발과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에 매우 기뻐했다.
“그거 좋은 소식이군! 그럼 어디 다 같이 마하르발이 붙잡은 포로들을 보러 가보자.”
바르카 가문의 형제들과 장교들은 한니발의 뒤를 따라 지휘관 막사 밖으로 나가 타우리니족 포로들이 묶여있는 숙영지 한가운데 있는 공터로 향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던 한니발은 포로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이 자들이 타우리니족인게 확실한가?”
“이미 통역사를 통해 대화를 나눠보았습니다. 확실합니다.”
“그렇다면 타우리니족은 우리와 함께할 수 없는 족속들이군. 모두 전투를 준비하라. 앞으로 한 달 안에 타우리니족의 도시 투린을 함락시킨다.”
마하르발이 잡아온 타우리니족의 포로들은 대부분 20대 초중반 정도로 젊은 귀족 출신 갈리아인 전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차림은 갈리아인보다 로마인에 더 가까워서 전원이 수염을 말끔히 밀고 갈리아인의 전통복장인 바지 대신 로마군의 것과 비슷하게 생긴 튜닉을 입고 있었다.
로마는 고대 국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역사 내내 피정복민 중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될만한 나라나 부족을 자신들의 문화에 동화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 일환으로 로마는 라틴어를 배우고 로마식 이름으로 개명한 피정복민의 지배계층이 로마 시민권을 얻고 로마 원로원에 진출하는 것을 허용했다.
많은 현대의 역사학자들이 이 같은 방식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왔지만, 하스드루발은 도저히 로마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름은 잘 기억 안 나지만 친일파 중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의회 3선 의원까지 해 먹은 인간도 있었다지. 로마의 방식은 일제의 창씨개명이나 내선일체 정책과 너무 닮았어. 일제가 로마의 방식을 참고했겠지. 그저 로마는 동화정책에 집중해서 크게 성공했고 일제는 멍청하게 수탈과 동화정책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계속 독립투사들의 저항에 부딪힌 것뿐이야.’
바르카 가문의 남자들은 상업민족 페니키아인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비옥한 북아프리카에서 편안하게 농장을 경영하는 대신 조국과 가문의 존망을 걸고 자신들에게서 지중해를 강탈한 강대국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그런 그들의 눈에는 자기 부족의 정체성을 버리고 수염을 민 갈리아인들의 모습이 너무나 구차하고 혐오스러워 보였다.
한니발은 경멸과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포로들을 내려다보면서 병사들에게 말했다.
“이 자들의 목을 벤 다음 땅에 묻어버려라. 십자가형에 처할 때 쓸 나무가 아까운 자들이니까 말이다.”
바로 그때 숙영지의 입구를 지키던 병사 한 명이 한니발에게 달려와서 말했다.
“한니발 장군님께 보고드립니다. 방금 타우리니 부족의 사절단이 이곳에 찾아왔습니다. 오늘 전투에서 마하르발 대장에게 사로잡힌 포로 석방에 대해서 한니발 장군님과 협의하고 싶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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