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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80화 (80/201)

[ 80 ] [79화] 타우리니족과의 조우 (2)

타우리니족에서 사절단이 왔다는 병사의 말을 듣고 한니발이 굵은 눈썹을 사납게 꿈틀거리며 말했다.

“전투가 끝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포로를 돌려받지 못해서 안달이란 말이냐? 이 로마의 개들이 부족 내에서 신분이 꽤 높은 모양이군. 일단 내 앞에 데리고 와라. 일단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어보도록 하지.”

총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병사는 다시 숙영지의 입구로 돌아가 타우리니족의 사절단 열 명을 바르카 가문의 형제들 앞으로 데려왔다.

사절단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풍성한 흰 수염을 기른 대머리 노인이 부족을 대표해 한니발에게 인사했다.

“강대한 바르카 가문의 한니발 장군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 늙은이는 타우리니족의 장로 쿠노벨리누스라고 합니다.”

“용건을 말하라.”

아직 서른 살도 안 된 새파랗게 젊은 한니발이 나이 지긋한 쿠노벨리누스 장로를 하대하자, 그를 호위하고 있는 타우리니족 전사들이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쿠노벨리누스 장로는 여전히 공손한 태도로 한니발에게 말했다.

“제가 노구를 이끌고 한니발 장군님을 찾아온 이유는 다름 아니라 장군님께서 저기 꿇어앉아 있는 제 손주를 비롯한 저희 타우리니 부족 젊은이들의 몸값을 여쭤보기 위해서입니다. 젊은 치기에 사자를 승냥이로 착각한 어리석은 젊은이들을 용서해 주신다면 저희 부족도 충분한 성의를 보이겠습니다.”

“올해 여름에 수확한 봄밀을 두고 투린을 떠나라. 그럼 네 손주와 포로들을 풀어주겠다.”

타우리니족이 수도로 여기는 도시를 넘기라는 말에 쿠노벨리누스 장로도 더는 참지 못하고 눈에 핏대를 세우며 노성을 질렀다.

“투린은 우리 타우리니족의 심장과도 같은 곳이다! 너는 정녕 우리 부족을 멸망시키기 위해 찾아온 괴물이란 말이냐!”

그러나 한니발은 장로의 호통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한쪽 입꼬리를 추켜올리며 이죽거렸다.

“여기 타우리니족이 있다고? 알프스를 넘어오면서 그 지역에 사는 부족민들에게 타우리니족은 긍지 높은 갈리아인 부족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네 손주의 꼴을 좀 봐라. 덩치를 보면 성인식을 치른 지 3년은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수염이 없어서 턱이 엉덩이보다 더 매끈하구나.”

그 말에 원정길에 갈리아식 켈트어를 배운 히스파니아 출신 켈트족 병사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하! 엉덩이 턱! 엉덩이 턱이래!”

“켈트족의 긍지를 버린 로마의 개들은 썩 꺼져버려라!”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이 조롱하며 웃음을 터뜨리자 타우리니족 포로들은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하스드루발은 그 모습을 보고 아직 타우리니족을 설득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포로들이 부끄러워하는 걸 보니까 타우리니족이 로마 문화에 감화돼서 로마화를 서두르고 있는 게 아니구나. 이 살벌한 분위기만 어떻게 진정시키면 다시 대화를 나눠볼 여지가 있겠는데.’

그러나 하스드루발의 기대와는 달리 그 자리의 분위기는 점점 더 험악해져만 갔다.

히스파니아 출신 켈트족의 조롱에 타우리니족 전사들도 고함을 지르며 맞받아쳤기 때문이다.

“우리라고 좋아서 귀한 자식을 저 꼴로 만든 줄 아느냐? 저 젊은이들은 곧 로마에 유학 보낼 거라 어쩔 수 없이 저런 몰골을 한 것뿐이다! 이제 이탈리아 반도에서 로마를 거스르면 부족이 멸망하게 된단 말이다!”

“너희 켈티베리아인들이 우리 갈리아인을 욕할 자격이 있느냐? 평소에도 바지를 입지 않고 아랫도리 썰렁한 튜닉을 입고 다니는 카르타고의 개들이!”

그 말을 들은 히스파니아 출신 켈트족 병사들이 웃음을 멈추고 입술을 깨물며 타우리니족 전사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하스드루발은 그 모습을 보고 타우리니족과 우호관계를 다지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켈트족은 어디에 살든 하나같이 자존심이 강한데 갈리아인과 켈티베리아인 사이의 관계가 만나자마자 완전히 틀어져 버렸네. 이제 어쩔 수 없이 원 역사에서처럼 타우리니족을 공격할 수밖에 없겠다.’

바로 그 때 그 자리에서 벌어지던 일을 가만히 보고 있던 아우니아가 한니발에게 갈리아식 켈트어로 말했다.

“한니발 장군님. 허락하신다면 제가 타우리니족의 사절에게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한니발은 이제 페니키아어를 할 줄 아는 아우니아가 타우리니족이 듣게 하려고 일부러 갈리아식 켈트어를 사용한 것을 알아챘다.

“좋습니다. 아우니아 공주님. 무슨 말씀을 하실 생각이신지 궁금하군요.”

“감사합니다.”

한니발의 허락을 맡은 후 아우니아가 서로 노려보며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두 켈트족 집단 사이에 섰다.

타우리니족 전사 한 명이 그녀를 보고 소리쳤다!

“저년도 켈트족이면서 튜닉을 입고 있군! 카르타고의 암캐는 우리 눈앞에서 썩 꺼져라!”

아레바키족 출신 병사들이 자기 부족의 공주가 모욕을 당하자 허리춤에 찬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한니발이 그들을 고리눈을 뜨고 노려보자 분을 삭이면서 무기에서 손을 뗐다.

아우니아는 자신을 모욕한 타우리니족 전사를 매섭게 쏘아보며 차분하지만 당찬 목소리로 따졌다.

“우리 아레바키족은 바르카 가문에 아첨을 하려고 튜닉을 입는 게 아니다. 선조께서 한겨울에도 얼음이 얼지 않는 무더운 히스파니아의 기후에 적응하시기 위해 수백 년 전에 통풍이 잘되는 튜닉을 입기로 하셨기 때문에 튜닉은 우리 켈티베리아인의 전통복장이다. 젊은이들에게 수염을 밀게 한 너희 타우리니족의 드루이드는 지배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는 선조의 전통을 버려도 된다고 가르치나 보지?”

아우니아를 모욕했던 타우리니족 전사는 그녀의 일침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자 다른 타우리니족 전사가 다시 아우니아에게 소리쳤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너희 부족이 우리랑 다를 게 뭐냐? 우리가 로마인에게 굴복했듯이 너희도 카르타고인에게 굴복한 건 똑같은데!”

“물론 우리도 처음에는 바르카 가문과 검을 맞대다 힘에서 밀려 관계를 맺게 됐다. 하지만 내 아버지이신 아레바키족의 왕 타르반투 전하께서는 바르카 가문의 가주이신 하밀카르 총독님께 아레바키족의 문화와 언어를 존중한다는 약조를 받은 다음 동맹을 맺으셨지. 너희들이 한니발 장군님과 켈트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만 봐도 내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다.”

그 말에 타우리니족 전사들은 모두 ‘그러고 보니?’라고 쓰여있는 듯한 표정으로 한니발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군이 적에게 참패하여 포로로 잡힌 상황이라 머리에 피가 쏠리는 바람에 한니발이 유창한 켈트어로 말하는 것을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카르타고인이 통역사 없이 사업상 별 교류가 없는 갈리아인과 대화를 하는 장면은 분명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아우니아는 타우리니족 전사들의 마음이 흔들린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로마인들은 어떠냐? 그들이 타우리니 부족의 전통을 존중해 주던가? 지금이야 로마에 유학 갈 젊은이들만 수염을 밀고 라틴어를 배워도 되겠지! 하지만 이 상태로 몇십 년만 지나면 타우리니족 중 켈트어를 할 줄 아는 이가 몇 명이나 남겠나? 이대로라면 너희의 후손은 우리 켈트족의 천둥의 신 암비사그루스 대신 로마인들의 신 유피테르의 신상 앞에서 절을 하게 될 것이다!”

아우니아의 말에 타우리니족 전사들은 화가 난 나머지 얼굴이 불에 달군 쇠처럼 벌게졌지만, 그녀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타우리니족 전사들도 애써 현실을 부정해 오긴 했지만, 언젠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전통과 문화가 로마의 것으로 완전히 대체되고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완전히 후손들의 가슴속에서 잊혀 버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내심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수치심에 입을 다물어버린 수하들 대신 쿠노벨리누스 장로가 입을 열었다.

“아레바키족의 아우니아 공주님이라고 하셨나요? 저희도 공주님께서 말씀하신 점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7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서 대체 어떻게 이긴다는 말입니까? 로마를 점령했었던 전설적인 왕 브렌누스가 되살아오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브렌누스 왕의 후손인 내가 보증합니다. 바르카 가문과 카르타고는 반드시 로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겁니다.”

“브렌누스 왕의 후손이시라고요? 그분은 세노네스족 출신 갈리아인이지 켈티베리아인이 아닙니다.”

“외조부님께서 브렌누스 왕의 후손이십니다. 아시다시피 세노네스족은 이탈리아 북부에 살다가 60여 년 전에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갈리아 북부로 쫓겨났지요. 제 외조부님께서는 그 후 세노네스족에 친로마파 귀족이 늘어나는 것을 참지 못하시고 갈리아를 떠나 히스파니아로 망명하셨습니다.”

“외조부님의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브리시우스의 아들 드루스탄이십니다.”

아우니아의 말을 듣고 쿠노벨리누스 장로는 잠시 눈을 감고 추억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브렌누스 왕의 후손이셨군요. 세노네스족이 로마군과 마지막 결전을 벌일 때 저도 지원군으로서 그 전투에 검을 들고 전장에 서서 드루스탄 부족장님 곁에서 함께 싸웠었습니다. 이탈리아 북부의 갈리아인이 로마인에게 핍박받고 있는 시기에 브렌누스 왕의 후손이 로마를 공격하기 위해 대군과 함께 나타나다니... ”

그때 하스드루발이 쿠노벨리누스 장로의 마음이 흔들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한니발에게 허락을 구한 후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7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히스파니아에서 출발해 갈리아의 숲을 지나고 알프스를 넘어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동안 발생한 전사자와 낙오자는 다 합쳐서 겨우 천 명 정도였지요. 신의 가호가 없이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있겠습니까? 오늘 타우리니족이 브렌누스 왕의 후손과 만나게 된 것도 다 신께서 정하신 운명임이 분명합니다. 우리와 함께 로마를 정복합시다! 그게 바로 신의 뜻에 따르는 길입니다.”

갈리아인들은 대부분 인간의 삶은 모두 신이 정한 대로 흘러간다고 믿는 운명론자였다.

하스드루발은 아우니아와 쿠노벨리누스 장로의 우연한 만남을 타우리니족이 운명으로 믿게 되면 바르카 가문과 동맹을 맺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살고 죽는 건 신이 정하는 거니까 갑옷 같은 거 필요 없다면서 발가벗고 전쟁터에 나가는 걸 명예롭게 생각하는 민족이니까 오늘 일에 뭔가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을 거야. 운은 띄워놨으니 이제 좋은 대답이 있기를 기다려 봐야지.’

쿠노벨리누스 장로는 결국 하스드루발의 미끼를 물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장군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군요. 투린에 돌아가서 부족장 회의를 소집해 바르카 가문과 동맹을 맺는 것에 대해 논의해 보겠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한니발도 타우리니족에 대한 공격을 유보하기로 하고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포로를 모두 풀어주었다.

쿠노벨리누스 장로는 타우리니족의 대도시 투린으로 돌아가 부족장 회의를 연후 다시 바르카 가문 군대의 숙영지로 돌아와 회의 결과를 한니발에게 전달했다.

“부족장 회의에서 바르카 가문의 동맹을 맺자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브렌누스 왕의 후손이신 아우니아 공주님이 바르카 가문의 병사 1만 명과 함께 이탈리아 북부에 남아 로마군이 우리를 공격할 때 함께 싸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우리는 한니발 장군님의 군대에 꾸준히 보급품을 전달하겠습니다.”

그렇지않아도 한니발은 가능하다면 히스파니아에서 이탈리아반도까지 이어지는 보급선을 확보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에 병력을 일부 남겨 요새를 건설하고 거점을 확보할 생각이었다.

거기에 더해 보급품을 제공 해줄 동맹까지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그가 놓칠 리 없었다.

“타우리니 부족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지중해 전역이 로마의 위협에서 해방되는 날까지 바르카 가문과 타우리니 부족 간의 우정이 계속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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