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81화 (81/201)

[ 81 ] [80화]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집정관님께 보고드립니다. 닷새 전 타우리니족이 우리 로마를 배신하고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다고 합니다.”

정찰병의 보고를 들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손등에 굵은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두 주먹을 꽉 쥐며 소리쳤다.

“바지 입는 야만인 놈들! 동맹을 맺고 1년도 안 지났는데 벌써 우릴 배신한단 말이냐! 그래서 카르타고군은 지금 어디쯤을 지나고 있고 규모는 얼마나 된다고 하더냐!”

“적군은 닷새 전 알프스 산맥 근처에 있는 타우리니족의 도시 투린에 입성했고 그 이후로는 동향을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계속 동쪽으로 진군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적의 규모 또한 적어도 4만 명이 넘는다는 것 이외에는 확실히 알 수가 없습니다.”

“적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정확한 규모도 알 수 없고 우리 영토에 발을 들이기 전에 요격할 수도 없으니 정말 답답하구나.”

기원전 218년 8월 중순 스키피오 부자는 보이족과 인수브레스족의 반란을 진압한 로마의 1군단과 2군단과 파두스 강변에서 합류했다.

프블리우스는 본래 불과 며칠 전 큰 전투를 치른 병사들을 쉬게 하고 전투 중에 발생한 결원을 보충한 후 카르타고군을 상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로마군단이 한숨 돌릴 틈을 벌어줘야 할 타우리니족이 한니발의 편으로 돌아서 버리는 바람에 황급히 투린에서 동쪽으로 100km 정도 떨어져 있는 플라켄티아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푸블리우스는 플라켄티아에 도착한 후 가능하면 한니발의 군대를 로마연합의 영역 밖에서 물리치고자 했다.

그러나 투린 인근의 거의 모든 갈리아 부족이 대부족인 타우리니 부족이 카르타고의 편으로 돌아섰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군을 적대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전략은 점차 틀어지기 시작했다.

당장 푸블리우스가 서쪽으로 보내는 소규모 정찰대로는 갈리아인의 방해 때문에 적의 전력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스키피오는 아직 실전경험이 없었지만, 아버지가 지휘하는 군대가 적장 한니발이 짜 놓은 각본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을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주변에 다른 병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공식직함으로 부르면서 말했다.

“집정관님. 제 짧은 소견으로는 카르타고군의 규모와 움직임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함부로 적진으로 군대를 움직이면 적의 계략에 빠질 위험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렇다면 셈프로니우스 집정관님께서 지휘하시는 3군단과 4군단이 도착할 때까지 이곳 플라켄티아에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요?”

“네 말도 일리가 있다만, 그러다 카르타고군이 동쪽으로 조금만 더 진군하면 우리 로마연합의 영토가 전장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전투의 승패와 관계없이 갈리아인의 영토에서 전투를 벌여도 됐을 거라며 동맹도시들이 원로원에 항의할 빌미를 주게 되겠지. 게다가 적장은 겨우 29살 먹은 신출내기 장수가 아니더냐? 너무 걱정마라.”

당시의 로마법에 따르면 29세가 되지 않은 자는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군대의 지휘관이 될 자격이 없었다.

집정관 푸블리우스는 로마인의 상식을 기준으로 카르타고군의 기세가 대단하긴 하지만, 적장 한니발이 아직 총사령관으로서의 경험이 부족한 풋내기라고 예단하고 있었다.

스키피오가 다시 아버지에게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 찰나, 정찰을 나갔던 로마 기병대의 장교 한 명이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집정관 막사에 들어와 푸블리우스에게 보고했다.

“집정관님께 보고드립니다! 기병대장 라엘리우스 휘하의 기병 300기가 숙영지에서 서쪽으로 200 스타디온(약 36km) 떨어진 곳에 있는 숲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적 카르타고군 기병대 500기와 마주치는 바람에 교전을 벌였습니다.”

“그래서 전투 결과는 어떻게 됐나?”

“우리의 승리입니다! 아군도 기병 130기를 잃어 피해가 작지 않았지만, 적은 200기가 넘는 기병을 잃고 도망쳤습니다!”

장교의 보고에 푸블리우스를 비롯한 로마군 장교들의 표정에 눈에 띄게 밝아졌다.

막사 한가운데 놓인 책상 앞에 앉아있던 푸블리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휘하의 로마군 장교들에게 말했다.

“카르타고군의 기병이 강하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지만 부풀려진 소문이었군! 적보다 기병이 열세인 것이 걱정되어 지금까지 미적거렸지만 이제 더는 지체할 이유가 없다! 숙영지를 서쪽으로 280 스타디온 떨어진 곳으로 옮긴다! 전장은 우리 로마가 아닌 갈리아인의 영토가 될 것이다!”

스키피오는 아버지의 말에 환호하는 로마군 장교들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 *

바르카 가문의 세 형제는 정찰을 보냈던 누미디아 궁기병 500기 중 피폐한 몰골로 살아 돌아온 280기가 투린으로 돌아온 것을 보고 로마군이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다가왔음을 알았다.

한니발은 타우리니족과의 약조를 지키기 위해 마고와 아우니아에게 신성대 중장보병 4천 명과 히스파니아 출신 켈트족 중보병 4천 명, 그리고 누미디아 궁수 2천 명을 남겨 북이탈리아의 타우리니족 영토를 로마군으로부터 지키고 둔전을 일구기로 했다.

히스파니아에서 데려온 병사 중 1만 명을 북부 이탈리아에 주둔시키느라 생긴 공백은 한니발의 군대가 로마군과의 일전에서 승리한 후 갈리아인 병사를 모집해 메꾸기로 했다.

로마 원정대의 핵심전력인 기병은 후방에 남겨둘 수 없었지만, 한니발이 인근 갈리아 부족 기병 2천 기를 용병으로 고용하여 마고와 아우니아의 부대에 배치해서 문제를 해결했다.

바르카 가문의 형제들은 서로 얼싸안으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마고가 눈시울을 붉히며 두 형에게 말했다.

“지중해 최강이라는 누미디아 기병들이 저렇게 처참하게 지고 돌아온 걸 보니까 로마군이 예상보다 훨씬 강한 모양이야. 형들은 절대 지지 말고 몸조심해야 해. 내가 밀하고 순무를 많이 길러서 형들에게 꼭 가져다줄게.”

하스드루발이 울먹이는 막내의 등을 두드리며 대답했다.

“그래. 다치게 않게 조심할게. 너무 걱정하지 마. 제수씨하고도 인사할 시간이 있었으면 좋을 텐데. 벌써 브렌누스 왕의 후손이라고 여기저기 불려다니느라 얼굴도 못 보고 헤어지려니 아쉽다.”

한니발도 자신보다 키가 작은 마고의 어깨를 두드리며 막내를 격려했다.

“너도 이제 지휘관으로서 경험을 쌓을 때가 됐다. 히스파니아 동부 해안에서 함대를 지휘했을 때처럼만 하면 충분히 잘해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순무는 조금만 가져다줘도 돼.”

마고와 작별인사를 마친 후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로마군과 마주치게 될 것으로 예상되는 포강의 지류인 티키누스 강 으로 향했다.

한니발은 또 다른 로마의 집정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가 지휘하는 3군단과 4군단이 시칠리아를 떠나 이탈리아로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을 독려하며 행군을 서둘렀다.

“로마놈들과 마주치게 될 지점은 강행군할 경우 이틀에서 사흘 사이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로마군에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티키누스 강 너머에 진을 치고 있는 적의 수를 줄여두어야 한다!”

한니발은 군대를 20km 이상 행군한 후 해가 지기 시작할 즈음에 물을 구하기 쉬운 강변에 숙영지를 짓고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모두 자신의 천막에 들어가 잠을 청할 시간이었지만 하스드루발은 찝찝한 마음을 씻어내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대체 한니발 형이 왜 누미디아 기병들을 일부러 사지로 내몰았을까. 숲에서는 궁기병이 제대로 싸울 수 없다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누미디아 궁기병들은 하스드루발의 훈련 덕분에 마상에서 활을 자유재로 다루는 정예기병이 됐지만, 기동성을 중시하는 전통 때문에 갑옷을 입는 것을 꺼렸고 근접무기는 짧은 검이나 작은 손도끼만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근접전에 취약했다.

게다가 그들이 선호하는 북아프리카산 말은 민첩하고 다리도 빨랐지만, 평야 지대에서 나고 자란 덕분에 숲이나 산지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누미디아 궁기병들은 지형이 거친 지역에서는 갖춘 실력의 절반도 발휘할 수 없었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는 한니발이 500기나 되는 누미디아 궁기병을 적과 마주칠 확률이 높은 숲이 우거진 지역에 보내 죽게 만든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안 되겠다. 고의든 실수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어. 당장 형한테 가서 따져봐야겠어.’

그는 마음을 정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한니발의 막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날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한니발이 막 자리에 누웠을 때 하스드루발이 그를 찾아왔다.

“형. 들어갈게.”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어서 들어와.”

형의 대답이 들려오자 하스드루발이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한니발은 자리에서 일어나 등불을 들고 있는 동생의 얼굴을 바라본 후 일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하스드루발의 눈빛이 평소와는 다르게 했기 싸늘했기 때문이다.

하스드루발이 자신의 눈빛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한니발에게 말했다.

“형. 오늘 아침에 대체 왜 그랬어? 왜 누미디아 기병들을 사지로 내몰았어?”

“그럴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게 무슨 헛소리야? 오늘 죽은 누미디아 기병들은 히스파니아에서부터 우리 가문을 위해 싸워온 전우들이라고. 왜 우리 병사들이 아무 이유 없이 죽어야 하는데?”

한니발은 자신을 몰아붙이는 동생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답지 않은 질문이구나. 당연히 적 지휘관에게 미끼를 던지기 위해서지.”

“적 지휘관에게 미끼를 던진다고? 그럼 혹시 로마의 집정관이 우리 기병이 약하다고 생각하게 하려고 아군을 220명이나 죽게 했다는 말이야?”

“그래. 지금 티키누스 강 동쪽에서 진을 치고 있는 적군의 지휘관은 대대로 명장을 배출해온 스키피오 가문에서도 명성이 대단한 자라고 하더군. 우직한 정공법을 좋아하는 적 지휘관은 우리가 강을 건너는 걸 저지하면서 지원군을 기다릴 생각일 거야.”

“적장을 기병대끼리의 전투로 유도하려고 하는 거구나!”

한니발은 동생의 대답을 듣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의 미소를 보고 나서 원 역사에서 한니발이 로마군을 상대로 처음 승리를 거둔 전투를 떠올렸다.

‘티키누스 전투가 이렇게 설계된 거였구나. 아군을 몇백 명이나 희생시켜서 말이야. 내 형이지만 정말 대담하면서도 섬뜩한 발상이다.’

티키누스 전투는 원 역사에서 한니발과 스키피오의 아버지 푸블리우스가 각각 지휘하는 기병끼리 정면으로 충돌한 소규모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한니발은 큰 승리를 거두고 푸블리우스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히지만, 스키피오가 용감하게 아버지를 죽음에서 구해냈다고 전해진다.

한니발은 이미 머릿속에 로마의 숨통을 조여갈 계획을 세세하게 세워두고 차근차근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한니발은 자신의 의도를 알아채고 기겁하고 있는 동생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오랜 전우를 220명이나 잃은 건 진심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가장 적은 희생을 치르고 우리의 앞길을 막는 적을 제거할 방법이라고 판단했어. 하스드루발. 지휘관에게는 최대한 많은 아군을 살리기 위해서 충직한 병사를 사지로 보내야만 하는 때도 있는 법이다.”

하스드루발은 아직도 한니발의 말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원 역사에서 한니발의 군대가 그토록 강했던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알았어. 더는 따지지 않을게. 누미디아 기병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전투에서 로마의 집정관을 반드시 처치하자.”

“그래. 그래야 이다음에 저승에서 기다리고 있는 누미디아 기병들을 볼 낯이 있겠지.”

하스드루발은 한니발과의 대화를 마치고 막사 밖으로 나오면서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다짐했다.

‘집정관인 아버지 스키피오도 제거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아직 애송이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반드시 처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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