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 [81화] 한니발 라이징!(1)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다음 날 아침이 밝자마자 병사들을 독려하며 이틀 더 행군한 끝에 현대에는 이탈리아 북부 지방도시인 로멜로(Lomello)가 있는 티키누스 강 근처에 도착했다.
마침내 바르카 가문의 군대와 로마군이 티키누스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진영을 맨눈으로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는 정도까지 가까워지자 로마군 병사들은 북이탈리아 평원의 지평선을 가득 메운 적군을 보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뭐야 저 대군은! 알프스를 넘어왔다며! 우리보다 훨씬 많잖아!”
“오 유피테르 신이시여! 보이족과의 혈투가 끝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저희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신다는 말입니까!”
푸블리우스가 이끄는 로마의 1군단과 2군단은 보이족과 인수브레스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도중 발생한 결원을 보충하지 못한 채 다시 한니발의 공격을 막기 위해 숨돌릴 틈도 없이 출동하는 바람에 보조병을 합쳐도 수가 2만 명을 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강 건너에 진을 친 적의 수가 언뜻 보아도 6만을 가볍게 넘어가니 사기가 높기로 유명한 로마의 군단병들도 불안에 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많은 전장에서 활약해 집정관 자리까지 오른 푸블리우스가 그런 병사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리가 없었다.
푸블리우스는 병사들을 연병장에 집합시킨 후 연설을 시작했다.
“자랑스러운 로마의 병사들이여! 무엇을 그렇게 걱정하고 있는가! 불과 며칠 전 우리는 카르타고군과의 첫 접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것도 적의 장기라는 기병끼리의 전투에서 말이다! 저들은 출신이 다른 병사들을 긁어모으는 바람에 서로 대화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오합지졸일 뿐이다!”
며칠 전의 벌어진 전투는 겨우 수백 명 규모의 기병대끼리 벌인 단기접전이고 로마군도 130기의 기병을 잃었기 때문에 대승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것이었다.
그러나 명장을 배출하기로 유명한 스키피오 가문에서도 가장 뛰어난 장군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집정관의 열정적인 연설은 위축되어있던 로마군 병사들의 가슴에 조금씩 용기를 불어넣었다.
푸블리우스는 병사들이 자신의 연설에 조금씩 반응하는 것을 느끼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게다가 눈앞의 적은 우리가 이미 한 번 물리쳤던 자들이다! 23년 전 전함 한 척 없던 우리 로마는 해양대국 카르타고를 상대로 저들의 무대인 바다에서 연전연승하며 시칠리아를 쟁취했다! 우리의 눈앞에 있는 적은 우리에게 힘도 쓰지 못하고 패한 자들의 자손이다! 건방지게 육지로 올라온 카르타고의 물개들에게 다시 한번 지중해의 지배자가 누구인지 알려주자!”
그가 연설을 마치자 많은 병사가 우렁찬 함성으로 집정관의 열정에 화답했다.
“와아아아아아!”
그러나 병사들의 성원에도 푸블리우스는 연병장 맨 뒤에 서서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고참병들을 보고 중얼거렸다.
“역시 프린키페스와 트리알리들은 설득하지는 못했나.”
평균 나이가 40세가 훌쩍 넘는 로마 군단의 최고참병인 트리알리 중에는 1차 포에니전쟁에 참전해 시칠리아에서 하밀카르가 지휘하는 카르타고군과 전투를 벌였던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 로마의 대군이 고작 2만 명 정도인 하밀카르의 군대와 거의 7년 동안이나 싸우면서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카르타고의 명장 하밀카르가 로마에 복수하기 위해 작정하고 키운 아들들이 6만이 넘는 대군을 몰고 눈앞에 나타났으니 로마군의 고참병이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스키피오도 로마 군단의 주축인 트리알리가 주눅이 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집정관님. 우리 로마군 전술의 핵심은 신병인 벨리테스와 하스타티가 먼저 적과 싸워 힘을 빼놓으면 경험 많은 병사들이 마무리 짓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아직도 프린키페스와 트리알리의 사기가 낮아 보이고 적의 수는 우리의 배가 넘으니 티키누스 강 동쪽에서 적의 도강을 막으면서 셈프로니우스 집정관님의 지원군이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는 게 현명할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봤다. 알프스를 넘은 적이 이렇게나 많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구나. 당장 티키누스 강을 따라 목책을 쌓고 스콜피온(로마의 야전용 소형 발리스타)을 설치해서 방어를 굳혀야겠다.”
그때 로마군 숙영지의 망루 위에서 경계 근무를 서고 있던 병사 한 명이 큰소리로 외쳤다.
“적 기병 약 6천 기! 숙영지 서쪽에서 접근 중!”
스키피오가 병사의 외침이 들려온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겨우 기병 6천 기로 강 건너에 있는 2만 명을 공격한다고? 적장 한니발이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을 텐데?”
푸블리우스도 아들과 마찬가지로 초병의 경계경보를 믿을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하군. 아무래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
푸블리우스는 말을 마치고 곧바로 아들과 호위병들을 데리고 숙영지 주변에 세운 목책 밖으로 나가 티키누스 강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에 적장 한니발이 직접 지휘하는 바르카 가문의 기병대 약 6천 기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마치 말을 타고 산책을 하듯이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스키피오 부자를 호위하던 병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분노하며 소리쳤다.
“발칙한 카르타고놈들! 수가 좀 많다고 우리를 조롱하고 있구나!”
“집정관님! 이런 수모를 언제까지 견뎌야 하겠습니까! 적장이 우리를 비웃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역정을 내는 부하들과 달리 푸블리우스는 적장이 여유롭게 강변을 거니는 모습을 보고 개선식을 하는 장군처럼 환하게 웃었다.
“올해 처음 지휘관 자리에 앉은 새파란 애송이가 젊은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만용을 부리는구나! 신들께서 우리에게 적장의 목을 벨 기회를 주신 게 분명하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너무나 여유로운 적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느껴져 아버지에게 말했다.
“집정관님. 적장 한니발은 교활한 자라고 들었습니다. 혹시 함정을 파놓고 우리가 공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네 신중함이 언젠가 네 발목을 잡을까 봐 걱정되는구나. 이 부근은 복병을 숨길 곳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넓은 평야 지대다. 우리도 기병만으로 적을 공격하면 카르타고군 본대에서 출발한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적장의 목을 벨 수 있을 거다.”
“그 작전이 성공하려면 우리 기병이 적 기병을 압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푸블리우스는 장남의 말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나도 그 점은 잘 안다. 우리 기병은 로마 기병과 보조병으로 징집한 갈리아 기병을 다 합쳐도 4,200기밖에 안 되지. 하지만 며칠 전 우리 로마 기병 300기가 자칭 지중해 최강이라던 누미디아 기병 500기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걸 보면 충분히 해볼 만한 전투다. 게다가 어차피 우리에게는 적의 도전을 외면할 수 없는 사정이 있지.”
“마지막에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적장이 저렇게 대놓고 도발을 해오는데 전투를 피하면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북이탈리아의 갈리아 부족 전체가 우리에게서 등을 돌리고 말 거다. 지금 우리 군 숙영지에 보조병으로 와있는 갈리아 병사들까지 말이야.”
스키피오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제야 집정관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갈리아인은 결투를 피하는 자를 경멸하죠. 그렇지 않아도 병력이 부족한 마당에 아군은 줄고 적은 늘어나는 상황을 두고만 볼 수는 없다는 말씀이군요.”
“그 말대로다. 이제 알았으면 전투를 준비해라. 너도 기병으로서 전장에 섰으니 로마를 위협하는 적을 물리쳐서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하지 않겠느냐.”
“알겠습니다. 집정관님. 전쟁의 신 마르스께서 우리 로마군을 지켜주실 겁니다.”
대화를 마친 스키피오 부자는 4,200기의 기병과 경보병인 벨리테스 1천 명을 이끌고 티키누스 강을 건넜다.
* * *
하스드루발은 누미디아 궁기병을 지휘하기 위해 애마 페라리의 등 위에 올라 한니발과 함께 출전했다.
하스드루발은 티키누스 강에 놓인 가교를 건너는 로마군 기병대를 보면서 한니발에게 말했다.
“정말 이런 노골적인 도발에 걸려드네. 저 대단하신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집정관님께서 말이야.”
“미끼를 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계했으니까.”
한니발은 동생의 말에 담담하게 대답한 후 서서히 덤불 속에 숨어 다가오는 먹잇감을 노리는 야수처럼 로마군 기병대를 응시했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한니발의 옆얼굴을 보면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저 아버지 스키피오도 만만한 인물은 아닌데 한니발 형의 손바닥 위에서 제대로 놀아나는구나.’
원 역사의 하스드루발은 히스파니아에서 군대와 보급품을 모아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 있는 형 한니발에게 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때 하스드루발을 히스파니아에 묶어둔 1등 공신이 바로 푸블리우스와 그의 형 그나이우스였는데 스키피오 가문의 두 형제는 하스드루발을 무려 6년 동안이나 히스파니아에 묶어둔다.
원 역사의 하스드루발이 당대의 카르타고인 사이에서는 한니발에 버금가는 장군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푸블리우스는 분명 로마가 자랑할 만한 유능한 무장 중 한 명이었다.
하스드루발은 이번 일을 계기로 2차 포에니전쟁의 진행 방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무리 미래의 역사 지식이 있어도 아직은 전략구상에서나 전술 지휘에서나 한니발 형을 따라갈 수가 없구나. 여기서부터는 한니발 형에게 배턴을 넘기고 나는 형의 전략에 플러스알파를 만들어 내는 데 집중해야겠다. 그러면서 한니발 형의 전략과 전술을 배워야겠어.’
로마군 기병대는 강을 건넌 후 천천히 바르카 가문의 기병대를 향해 다가오자 한니발이 하스드루발과 기병대장 마하르발에게 명령했다.
“난 이베리아족 중기병 4천 기와 함께 정면에서 적을 공격하겠다. 하스드루발은 마하르발은 뒤에 있는 누미디아 궁기병을 1천 기씩 맡아서 이베리아족 중기병 바로 뒤에서 따라오다가 교전이 시작되면 좌우로 흩어져서 적의 후방을 공격해라.”
“알았어. 너무 무리하지 말고 몸조심해.”
“알겠습니다. 장군님.”
한니발은 하스드루발과 마하르발이 후방의 누미디아 궁기병에게 간 것을 확인하고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전군 천천히 적에게 접근하라.”
그의 명령을 듣고 전열에 맨 앞에서 말을 탄 기수(旗手)가 깃발을 흔들자 바르카 가문의 기병 6천 기가 한발 한발 적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적과의 거리가 100m 이하로 좁혀지자 이베리아족 중기병들은 하나같이 평소에 즐겨 사용하는 5m가 넘는 랜스 대신 가져온 길이 2m 정도의 평범한 마상용 창을 움켜쥐었다.
적장이 멀리서도 잘 보이는 커다란 신무기를 보고 경계심을 갖지 않게 하려고 한니발이 취한 조치였지만, 오랜만에 위력이 낮은 구식무기를 사용하게 된 기병들은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그런 이베리아족 기병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전열의 맨 앞으로 위치를 옮기며 이베리아족 중기병들에게 외쳤다.
“모두 창과 방패를 들어라! 오늘의 사냥감은 로마의 집정관이다! 집정관의 목을 잘라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갈리아인에게 누가 북이탈리아의 패자(霸者)인지 알려주자!”
총사령관의 호기로운 외침에 이베리아족 중기병들이 긴장을 잊고 전의를 불태우며 함성을 질렀다.
“로마를 쳐부수자!”
“죽은 전우들의 원수를 갚자!”
마침내 적과 아군의 거리가 50m 이내로 좁혀지자 한니발이 우레같은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외쳤다.
“자! 이제 사냥을 시작하자!”
그의 외침이 티키누스 강변에 울려 퍼지자마자 거대한 흑마 부케팔로스를 탄 한니발과 그 뒤를 따르는 6천 기의 기병대가 먹구름을 찢고 나오는 벼락과 같은 기세로 로마군을 향해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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