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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86화 (86/201)

[ 86 ] [85화] 하밀카르 라이징!(1)

“내 새끼들이 무사해야 할 텐데... 알프스를 넘었다는 풍문을 들은 후로는 감감무소식이니 정말 답답하구나. 카르타고인으로 태어나서 이토록 바다를 원망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하밀카르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새로 도착한 서신을 하나하나 읽다가 로마로 원정을 떠난 세 아들의 소식이 없음을 알고 한숨을 쉬었다.

그가 자신과 세 아들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무심한 지중해를 원망하고 있을 때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티키누스 강 변에서 푸블리우스가 이끄는 로마 기병대를 물리친 후 로마가 파두스 강변에 새로 지은 식민지 플라켄티아 근처까지 진군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 원정을 떠난 바르카 가문의 형제들은 아직 이탈리아 반도 안에 항구도시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히스파니아에 있는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할 수 없었다.

“마실리아에 도사리고 있는 로마군을 어떻게든 물리쳐야 한니발에게 보급품을 전달할 수 있을 텐데. 적장이 만만치가 않구나. 만만치가 않아.”

기원전 218년 9월 초 현재.

하밀카르는 스키피오의 삼촌인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가 지휘하는 로마군 5군단에게 발이 묶여 히스파니아에서 이탈리아 반도를 잇는 육상 보급망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적장 그나이우스가 로마 해군이 바르카 가문의 해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한 점을 이용해 히스파니아 동부해안 해안지대를 습격하고 도망치기를 반복하고 있어 적의 해적질을 방어하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불패의 명장 하밀카르가 이토록 고전하게 된 이유는 원 역사에서 하스드루발을 히스파니에서 6년이나 괴롭힌 그나이우스가 유능한 장군인 탓도 이었지만, 무엇보다 로마가 1차 포에니전쟁이 끝난 후에도 꾸준히 해군력을 강화해 온 탓이 컸다.

반면 카르타고는 하스드루발이 카르타고에서 국내파를 완전히 제거하기 전까지는 국내파의 방해 때문에 수병을 충분히 양성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원 역사만큼은 아니더라도 두 나라의 해군력에는 아직 적지 않은 격차가 있었다.

“돈이 넘쳐나면 뭐하나. 히스파니아 원정사업도 끝났으니 배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노련한 수병을 훈련하려면 아직도 몇 년은 더 걸릴 테니 곤란하게 됐구먼.”

그때 하밀카르의 등 뒤에서 집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뒤를 돌아보니 장남인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공정한 하스드루발은 하밀카르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들뜬 목소리로 하밀카르에게 말했다.

“아버지! 동생들이 이탈리아 북부에서 로마의 집정관이 지휘하는 기병대와 싸워서 크게 이겼다고 합니다! 적장도 그 전투에서 사살됐다고 하네요!”

“그게 정말이냐? 역시 내가 로마의 늑대들을 물어 죽이라고 키운 사자 새끼들다운 활약이구나! 그런데 그 소식을 대체 어디서 들었느냐? 아직 한니발이 소식을 보내오기에는 시기가 좀 이른 것 같은데 말이다.”

“사업상 로마에 자주 가는 그리스인 상인에게 들었습니다. 실레노스와 잘 아는 사이이고 저도 몇 번 본 사람이라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밀카르는 수천 킬로미터 밖에서 세 아들이 활약하고 있다는 소식에 대단히 기뻐했지만, 한편으로는 더욱 초조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 로마 원정대가 곧 남쪽으로 진군하겠구나. 한니발이 이탈리아 반도 남부지역을 점령해도 내가 지원군과 보급품을 전달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 없는 일인데. 어서 로마군을 갈리아 남부에서 몰아내야 하는데 시간만 계속 죽이고 있으니 이거 원!”

“아버지. 우리가 해군력에서는 아직 로마에게 밀리고 있지만, 육군은 적어도 마실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군보다는 훨씬 많습니다. 마실리아를 육지에서 공격하는 건 어떨까요?”

“나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하지만 해상 지원 없이 육군만 동원해서 공성전을 시작했다가 적장 그나이우스의 로마군과 마실리아군이 힘을 합쳐서 농성을 벌이면 점령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거다. 그사이에 다른 로마 군단이 지중해를 건너 히스파니아를 공격할 수도 있지.”

기원전 3세기만 해도 마실리아는 갈리아 남부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국가로서 무시할 수 없는 해군과 육군전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무리 하밀카르와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공성전 경험이 풍부해도 로마군과 마실리아군이 힘을 합쳐 농성한다면 로마에게 빈틈을 보이게 될게 불을 보듯 뻔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런 골치 아픈 상황에서는 한니발과 작은 하스드루발이 항상 좋은 전략을 짜내곤 했는데 둘 다 이 자리에 없으니 안타깝네요.”

“그러게 말이다. 그 애들이라면 이 상황에서는 어떤 작전을 세웠을까...”

본래부터 하밀카르는 의심의 여지 없이 카르타고의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명장 중 하나이지만, 한니발이나 하스드루발과는 조금 다른 부류의 군사지휘관이었다.

하스드루발은 전쟁을 거국적인 시야로 바라보면서 철저한 사전계획을 세우는 전략가 타입이고 한니발은 전략과 전술에 모두 능한 만능형 장군이라고 할만했다.

반면 하밀카르는 전투에 임하기 전에 전략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기보다는 뛰어난 지휘력과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것을 선호하는 일류전술가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런 하밀카르도 히스파니아 원정 당시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의 활약을 보아온 덕분에 지휘관으로서의 스타일에 변화가 생겼다.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그가 활약했었던 1차 포에니전쟁 당시와 비교해 정보수집력과 전략구상 능력에 많은 진보를 이룬 것이다.

그 덕분에 하밀카르는 한참 동안 머릿속에서 히스파니아 전역의 지도를 그려가며 전략을 구상한 끝에 한가지 작전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그래! 적이 너무 재빨라서 쫓아갈 수 없으면 우리 쪽으로 유인하면 될 거 아니냐!”

아버지의 말에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적을 불러들이신다고요? 혹시 대규모 회전을 유도하실 생각이신가요?”

“아니다. 적장은 로마에서 지원군을 보내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육지에서 싸움을 건다고 받아줄 것 같지가 않구나.”

“그럼 해전을 벌일 생각이시군요. 로마군과 바다에서 싸우실 생각이시라면 아군의 피해도 작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에겐 아르키메데스 선생이 만든 불을 뿜는 신무기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사정거리가 짧아 폭이 좁은 해협이나 만에서 쓸 때 제일 효과적인 무기니까요.”

“함대전을 벌일 생각은 맞다. 하지만 전장은 바다가 아니라 강이 될 거다. 지금 당장 부관 히밀코에게 보병 3만 명과 기병 5천 기를 맡겨서 육로로 에브로 강의 하류를 향해 출발하라고 전해라. 우리도 빈 수송선 40척과 전함 50척을 이끌고 그쪽으로 출발한다.”

* * *

한편 하밀카르가 마실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군을 고심하고 있을 때 그나이우스는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동생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자신의 침실에서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있었다.

“푸블리우스... 네가 이렇게 허무하게 가버리다니... 적어도 네 장남이 장가가는 모습은 보고 갔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나이우스와 푸블리우스는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이면서 함께 숱하게 전장을 헤쳐나오면서 서로에게 등을 맡기던 전우이기도 했다.

그나이우스는 올해가 가기 전에 함께 술잔을 부딪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동생을 생각하며 홀로 물을 섞지 않은 포도주를 병째로 들이켰다.

포도향보다 독한 알코올 냄새를 더 많이 풍기는 검붉은 액체가 그의 식도를 타고 내려갔지만, 이미 그의 가슴속에 인이 박여버린 혈육을 잃은 슬픔을 씻어내지는 못했다.

그때 침실 문을 두드리는 눈치 없는 노크 소리가 그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그는 노기가 서려 있는 목소리로 문밖에 서 있는 부하에게 소리쳤다.

“오늘은 아무도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내일 아침이면 다시 업무에 복귀할 것이니 썩 물러가라!”

그러나 노크를 한 장교는 총사령관의 호통에도 물러서지 않고 큰 소리로 말했다.

“장군님! 바르카 가문의 영지에 보낸 첩자가 중요한 정보를 가져왔습니다! 적장 하밀카르가 마실리아를 공격하기 위해 직접 움직일 거라고 합니다! 곧 적의 군대와 전함이 카르타고 노바에서 출발해 에브로 강 하류로 이동할 겁니다!”

그나이우스는 장교의 말을 듣자마자 술병을 내려놓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밀카르가 자기 아들들이 내 동생을 죽였다고 신이 난 모양이구나! 당장 마실리아 원로원에 해군 지원을 요청해라! 하밀카르가 이탈리아 땅을 밟지 못하게 해달라는 내 동생의 마지막 부탁을 반드시 지켜내겠다!”

* * *

하밀카르는 마실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군을 유인하기 위한 상세한 작전을 수립한 후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9월 초 장남 공정한 하스드루발과 함께 빈 수송선 40척과 전함 50척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이끌고 카르타고 노바의 항구에서 출발했다.

오랜만에 항해를 시작한 지 나흘째 되던 날. 그는 파도를 가르며 히스파니아 동부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는 기함의 선미에 홀로 서서 드넓은 지중해를 바라보았다.

기원전 218년의 계절은 이미 바뀌어 노장의 새하얀 구렛 나룻에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잔물결이 잔잔하게 일렁이는 파란 바다 사이를 거닐던 선선한 가을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하밀카르는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돌아보면 참으로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혈기왕성했던 30대 중반에 무작정 조국 카르타고를 떠나 문명의 흔적이 희미한 히스파니아에서 타도 로마라는 네 글자만 바라보고 달려온 지 어언 23년.

그 기나긴 세월 동안 히스파니아의 거친 산과 구릉 지대를 말을 타고 달리면서 얼마나 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겨왔던가.

그의 눈 밑에는 벌써 몇 년 전부터 고목의 나이테 같은 주름이 자리 잡았고 아직도 통나무처럼 굵은 그의 두 팔뚝에는 치열한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가득하건만, 야속한 지중해는 여전히 숙적 로마의 품에 안겨있었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에 따라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서서히 시들어가는 육신과는 달리, 하밀카르의 정신은 여전히 잘 벼린 검처럼 날이 서 있었다.

“이제 몇 발짝만 더 나가면 된다. 몇 발짝만 더 나가면 드디어 카르타고인이 카르타고인으로서 살다가 죽을 수 있는 세상이 온다.”

앞으로 10년.

하밀카르는 낙관적인 희망을 담아도 자신이 아들들과 함께 전장에 설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10년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는 눈을 감고 앞으로 10년 후에는 카르타고의 남자들이 자신처럼 육지에서 말을 달리며 일생을 보내는 대신 바다에 나가 상선의 밧줄을 잡아당기는 날이 오게 해 달라고 바알 함몬과 타니트 여신에게 기도했다.

그때 망을 보고 있던 선원 중 한 명이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 그의 기도를 방해했다.

“북쪽으로 11 스타디온(약 2km) 거리에 에브로 강의 하구가 보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하밀카르가 눈꺼풀을 열자, 전함 수십 척을 나란히 세워도 지나갈 수 있는 히스파니아에서 가장 큰 강의 하구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미리 계획한 대로 하밀카르가 이끄는 수송선 40척과 5단 노선 38척은 에브로 강에 진입하고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지휘하는 신형 전함 멜카르트 12척은 타라코의 항구를 향해 계속 북상했다.

하밀카르는 자신이 탄 전함이 에브로 강에 진입할 때 한니발과 하스드루발, 마고가 분투하고 있는 이탈리아 반도가 있는 동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내 새끼들. 조금만 더 고생해라. 이 아버지가 적장을 물리치고 금방 도우러 갈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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