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 [86화] 하밀카르 라이징!(2)
기원전 218년 9월 말 그나이우스는 로마 해군의 전함 50척과 마실리아 해군의 전함 20척을 이끌고 마실리아의 군항을 떠났다.
그는 자신이 지휘하는 함대가 바르카 가문의 세력이 미치는 해안가를 피해 항해하여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에브로 강 하구에 다다르자 조소를 보이며 말했다.
“불패의 명장이라던 하밀카르가 나이를 먹어 예전 같지 않은가 보군. 쉽게 군사기밀을 흘리더니 전함을 에브로 강 하류에 전부 모아 놓느라 해상정찰도 게을리하다니 말이야.”
사실 하밀카르는 로마의 함대를 자신이 원하는 전장으로 유인하려고 일부러 군대의 이동 경로를 숨기지 않았지만, 그나이우스는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유능한 장군인 그가 거짓 정보에 속아 넘어간 이유는 하밀카르의 솜씨가 교묘하기도 했지만, 그나이우스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동생의 죽음 때문에 복수심에 불타고 있어 판단력이 흐려진 탓이 더 컸다.
마침내 로마-마실리아 연합 함대의 선두에 선 마실리아 해군의 전함들이 에브로 강 하구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로마 해군보다 항해 능력이 더 뛰어난 마실리아 해군의 전함 20척이 앞장서자, 로마 해군의 전함들도 커다란 뱀처럼 히스파니아 북동부에 몸을 누인 에브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모든 로마-마실리아 연합 함대가 강으로 진입하자 그나이우스가 선원들에게 명령했다.
“여기서부터는 적의 세력권이다! 하밀카르의 함대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부둣가에 정박해 있다! 적이 전투태세를 갖추기 전에 신속하게 카르타고 해군을 궤멸시킨다!”
원 역사에서 그나이우스는 기원전 217년에 에브로 강 하류에 정박 중인 카르타고 해군의 함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해 큰 승리를 거뒀다.
현재의 그나이우스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전술로 하밀카르에게서 해군 전력을 빼앗을 생각을 하면서 바람처럼 빠르게 함대를 몰아갔다.
한편 적 함대가 강에 진입한 것을 확인한 바르카 가문의 정찰병들은 급히 미리 강변 쪽에 설치해둔 봉화로 달려가 불을 피워 하밀카르와 타라코에 있는 공정한 하스드루발에게 적의 공격을 알렸다.
그 모습을 보고 그나이우스가 타고 있는 전함의 선원 한 명이 그에게 보고했다.
“적이 봉화를 올렸습니다! 곧 카르타고 해군이 반격해 올 겁니다!”
“상관없다! 지금 알아차려 봐야 카르타고인들은 전함에 병사를 태울 시간도 부족할 거다!”
한편 하밀카르는 아군 정찰병이 피운 봉화를 보고 해군 장교들에게 명령했다.
“적이 미끼를 물었다! 5단 노선 열 척을 출동시켜서 적과 적당히 싸우는 시늉을 하다 배를 버리고 탈출해라!”
하밀카르는 일부러 그나이우스에게 불의의 습격을 당한 것처럼 가장하여 그를 미리 파놓은 함정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하밀카르의 명령을 받은 5단 노선 열 척이 굽이친 강을 따라 돌며 적을 향해 나아갔다.
그나이우스는 카르타고 해군이 자신의 함대에 반의반에도 못 미치는 수의 전함만 출동시킨 것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하! 겨우 열 척으로 내 함대에 덤벼들다니! 적이 우리의 기습에 허둥대고 있는 모양이다. 적 전함 옆에 배를 대라! 백병전에 돌입한다!”
고대 로마의 해군은 1차 포에니전쟁 이후 해전을 벌일 때 전함을 적의 함선 옆에 바짝 댄 후 중무장한 병사들이 적의 배에 올라타 근접전을 벌이는 방식을 선호했다.
지상전에서 강한 로마군 병사들의 장기를 해전에서도 살리려는 조치였다.
그나이우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선두에서 물살을 가르고 있는 마실리아의 전함 20척이 바르카 가문의 전함 옆에 배를 대고 칼과 방패를 들고 함성을 지르며 적함에 뛰어올랐다.
그러나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하밀카르의 명령대로 잠시 적과 검을 맞대며 저항하는 시늉을 하다가 이내 배를 버리고 강으로 뛰어들었다.
로마-마실리아 연한 함대의 병사들은 아군이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적의 전함 열 척을 나포하자 손에 들고 있는 검을 머리 위로 흔들며 함성을 질러댔다.
“우와아아아아!”
“카르타고 놈들이 도망친다! 우리가 이겼다!”
그나이우스는 이 기회에 바르카 가문의 해군을 완전히 뿌리 뽑을 생각으로 계속 함대를 몰고 앞으로 나아갔다.
한편 하밀카르는 육지에 보병 2만 명과 기병 5천 명을 강변에 상륙하는 적을 막으려는 듯한 수비진형을 짜게 했다.
“적 함대가 곧 몰려온다! 적장이 마지막 미끼만 물면 우리의 승리다! 모두 전투태세를 갖추어라!”
마침내 로마-마실리아 연합 함대가 하밀카르가 있는 곳에 도착하자 그나이우스는 바르카 가문의 전함이 그대로 정박 되어있고 수만 명의 병사가 부둣가에서 좀 떨어진 곳에 방어진형을 갖추고 있는 것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 하밀카르가 이제 완전히 퇴물이 다되었구나! 내가 강변에 상륙해서 육상전을 벌이려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약을 좀 올려줘야겠군. 부둣가에 정박해 있는 카르타고군의 전함을 빼앗는다! 적의 전함에 쇠사슬을 걸어 아군의 배와 연결해라!”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로마 해군의 전함 38척이 적 전함을 끌고 가기 위해 부둣가에 접근했다.
로마의 수군들이 5단 노선의 갑판에 올라 쇠사슬을 거는 순간, 그나이우스의 부관 중 한 명이 그에게 말했다.
“사령관님 아무래도 좀 이상합니다.”
“뭐가 말이냐?”
“우리 측 첩자의 보고에 의하면 에브로 강 변으로 진군한 적 보병의 수는 약 3만 5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강변에 늘어서 있는 적 보병은 기껏해야 2만 명이 조금 넘어 보입니다.”
그 말에 그나이우스도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고 부둣가에 정박해 있는 전함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아무도 타고 있지 않을 전함의 밑부분이 마치 화물선이나 병사를 가득 태우고 있는 배처럼 물에 많이 잠겨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젠장! 속은 건 하밀카르가 아니라 나였구나! 어서 적 전함의 갑판에 올라가 있는 병사들을 퇴각시켜라!”
그러나 사자의 아가리에 스스로 머리를 넣은 적을 곱게 보내줄 하밀카르가 아니었다.
하밀카르는 자신과 함께 강변에 도열 해 있는 병사들 앞에 서 있던 나발수에게 말했다.
“당장 뿔나팔을 불어라! 적이 도망갈 틈을 주지 마라!”
총독의 명령에 바르카 가문의 나발수가 뿔나팔을 입에 물고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힘차게 불었다.
- 뿌우우우우우웅
그러자 빈 배인 줄로만 보였던 5단 노선 갑판 밑에 있는 선실과 화물칸에 숨어있던 병사들이 팔카타와 방패를 손에 들고 전투의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몰려나왔다.
“와아아아아아아아!”
굵은 쇠사슬을 끌고 적 전함의 갑판에 오른 로마의 수병들은 갑판 밑에서 중무장한 적군 수백 명이 몰려나오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혼비백산하기 시작했다.
“함정이다! 갑판 밑에 복병이 있다!”
“모두 타고 온 배로 도망쳐! 끄아악!”
하밀카르가 히스파니아에 남아 있는 병사 중에서 선별한 정예병 1만 명은 쇠사슬을 던져버리고 자신들의 배로 도망치는 적군을 추격하며 로마 해군의 전함에 올라탔다.
적의 전함 수십 척을 어렵지 않게 탈취하는 줄 알고 신이 나 있던 로마 해군의 수병들은 그제야 황급히 무기를 들었다.
“적의 기습이다! 모두 검을 들어라!”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들의 함성과 검과 방패가 부딪치면서 나는 둔탁한 소리가 평화롭던 에브로 강 변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로마의 수병들은 갑작스럽게 전투에 뛰어드는 바람에 자신들의 장점인 뛰어난 조직력을 발휘할 수가 없어 체격이 건장한 켈티베리아인 병사들에게 금세 압도당하고 말았다.
“으아악! 살려줘!”
“그나이우스 사령관님께 도움을 요청해라!”
그나이우스와 같은 배에 타고 있는 부관들은 아군이 적의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을 보고 그의 주변에 모여들어 이구동성으로 적에게 아군을 돕자고 주장했다.
“사령관님! 이대로는 카르타고군에게 오히려 우리 전함을 빼앗기게 생겼습니다! 어서 아군을 도와야 합니다!”
“지금이라면 아직 배 위에 있는 적을 모두 몰아낼 수 있습니다! 어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나이우스는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로 치밀한 함정을 파놓은 적장이다. 저쪽을 봐라. 강변에 진을 치고 있던 적군도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다.”
부관들이 그나이우스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하밀카르가 미리 준비해둔 작은 보트 수백 척에 탄 중무장 보병대가 자신들이 타고 있는 전함으로 몰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나이우스의 부관들은 험악한 표정으로 적장 하밀카르를 저주했다.
“크윽! 교활한 늙은 뱀 같으니!”
로마군 전함 한 척에는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합쳐 약 250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었다.
아직 적에게 공격받지 않고 있는 로마 해군이 전투에 참여해도 수적으로 두 배가 넘는 하밀카르의 병사들과 난전을 벌여 이길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나이우스는 남은 함대라도 지키기 위해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남은 전함 서른두 척까지 잃으면 조국 로마는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남부 해안 지대의 제해권을 일시적으로나마 완전히 상실하고 말 거다. 분하지만 지금은 후퇴할 수밖에 없다.”
그는 전투에 휘말리지 않은 로마-마실리아 연합함대의 모든 전함에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아군에게 버림받은 로마 해군의 병사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하밀카르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밀카르는 점점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그나이우스의 함대를 보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적장이 그 상황에서는 최선의 판단을 했군. 이제 아르키메데스 그 정신 나간 노인네가 만든 무기에 희망을 걸어볼 수밖에 없구나.”
한편 타라코의 군항에서 대기 중이던 공정한 하스드루발은 아군 정찰병이 올린 봉화를 보고 급히 멜카르트 열두 척을 이끌고 그나이우스의 도주를 막기 위해 출동했다.
동로마 제국의 드로몬을 본떠 만든 멜카르트는 기원전의 주력 전함 5단 노선보다 속도가 빨랐기 때문에 도망치는 적 함대보다 먼저 에브로 강 하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정한 하스드루발은 먼발치에서 적 함대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각 함의 함장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전함 일렬횡대로 늘어서서 아르키메데스의 불꽃을 쏠 준비를 해라!”
그나이우스는 5단 노선보다 작은 전함 열두 척이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을 보고 정면돌파를 시도하기로 마음먹었다.
“뒤에서 하밀카르의 함대가 쫓아오고 있으니 백병전을 벌일 시간이 없다! 전방의 적함을 충각으로 들이받아라!”
사령관의 명령에 살아남은 로마-마실리아 연합 함대의 전함 서른두 척이 이열횡대로 늘어서서 물살을 가르며 적을 향해 돌진했다.
바르카 가문의 수병들은 자신이 탄 배보다 큰 적의 전함이 한 덩이로 뭉쳐서 덤벼왔지만, 조금도 겁을 내지 않았다.
이미 해전 연습을 하면서 신무기의 위력을 똑똑히 확인했기 때문이다.
공정한 하스드루발은 적의 함대가 약 20m 앞까지 다가오자 우렁찬 목소리로 전 함대에 명령을 내렸다.
“발사!”
사령관의 명령을 듣고 기함의 기수가 커다란 깃발을 휘두르자 열두 대의 전함이 신화에 나오는 거대한 용처럼 적을 향해 거대한 불꽃을 토해냈다.
- 화르르르르르르륵!
맨 앞줄에 있던 그나이우스의 전함 열두 척이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화염에 휩싸이면서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
몸에 불이 붙은 수병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다 강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으아아아아아악!”
“너무 뜨거워! 살려줘!”
그러나 로마 병사들의 몸에 붙은 불꽃은 물속에서도 집요하게 타올랐다.
- 콰앙!
앞서가던 아군 전함의 뒤를 따라가던 로마-마실리아 연합함대 2열의 전함들이 화염 공격을 받고 멈춰버린 아군의 배를 들이받으면서 그나이우스의 함대 전체가 거대한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공정한 하스드루발은 한 명의 적도 탈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멈춰버린 적 함대의 측면으로 돌아가서 계속 불꽃을 퍼부어라!”
그나이우스는 함대의 최후방에 있는 기함의 갑판에서 잿더미가 되어가는 로마의 전함을 허망한 눈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사람이 만든 배가 신화 속의 괴물처럼 불을 뿜다니... 정녕 신들께서는 우리 로마를 버리시려 한단 말인가...”
그때 삼각돛을 단 전함 한 척이 조금 아군 함선과 충돌하는 바람에 노가 부서져 멈춰버린 로마 해군의 기함 오른편으로 돌아왔다.
그나이우스는 적 전함의 선수에 설치되어있는 화염방사기가 자신을 향해 포신을 돌리는 것을 바라보며 마지막 힘을 다해 외쳤다.
“올림포스의 신들이시여! 부디 로물루스의 나라를 지켜주소서!”
그나이우스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불줄기가 그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 * *
하밀카르는 에브로 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둬 갈리아 히스파니아 동부해안과 갈리아 남부 해안의 제해권을 확보한 후 곧바로 마실리아 인근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마실리아는 자신들의 도시를 지켜주던 로마군이 큰 손해를 입고 하밀카르가 신무기 트레뷰셋과 아르키메데스의 불꽃을 아낌없이 써가며 맹공을 퍼붓자 기원전 218년 10월 중순 성문을 열고 바르카 가문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바르카 가문이 로마의 5군단을 궤멸시키고 갈리아 남부를 평정했다는 소문이 들불처럼 번져나가면서 전 지중해 세계가 노장 하밀카르의 전성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플라켄티아에 주둔한 로마군이 좀처럼 회전에 응하지 않아 답답해하던 하스드루발도 아버지가 보낸 전령에게 승전보를 전해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역시 아버지야! 언제가 보급로를 확보해 주실 거라고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올해 안에 해내실 줄은 진짜 꿈에도 몰랐네!”
한니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흐뭇한 표정으로 동생에게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다. 우린 아버지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구나.아버지 덕분에 히스파니아에서 이탈리아 북부를 잇는 보급망이 완성됐으니 이제 로마 정벌을 서두를 필요가 없어졌다. 앞으로는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하는 쪽은 카르타고가 아니라 로마일 테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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