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 [87화] 미끼를 던진 하스드루발 (1)
기원전 218년 10월 말.
하밀카르에게 함락된 마실리아에서부터 도망쳐 온 로마군 장교 한 명이 화살을 맞아 다친 어깨에 피 묻은 붕대를 감은 채로 쿠리아 호스틸리아에 들어섰다.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장교가 비통한 목소리로 로마 원로원 의원들에게 보고했다.
“마실리아가... 마실리아가 함락됐습니다. 5군단은 전멸했습니다.”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다친 장교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불과 한 달 반 전에 5군단을 지휘하는 그나이우스에게 히스파니아에 주둔하고 있는 카르타고군의 움직임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있다는 서신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는 가운데 파비우스가 침착한 목소리로 얼굴에 핏기가 없는 장교에게 물었다.
“자네의 말을 도저히 믿기가 어렵군. 히스파니아에 있는 카르타고군이 그렇게 빨리 마실리아를 함락하려면 육군과 해군의 함께 도시를 공격하는 수밖에 없었을 거다. 서지중해의 제해권은 우리가 장악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가 있지?”
“로마와 마실리아 해군의 연합 함대가 9월 중순에 적에게 궤멸당했다고 합니다. 전투에 참여했던 아군의 전함이 모두 나포되거나 침몰했습니다. 그 바람에 마실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5군단은 적장 하밀카르가 도시를 완전히 포위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뭐...뭐라고? 그럼 그나이우스 의원님께서는 어떻게 되셨나?”
“저도 마실리아에서 도망치기 전 적에게 포로로 잡혀있을 때 적군 장교에게 들은 이야기입디다만, 에브로 강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하셨다고 합니다.”
장교의 힘없는 말에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언제나 한결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파비우스는 조차도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이 중얼거릴 정도였다.
“이제 우리 로마는 삼면에서 몰려오는 강력한 적을 상대하게 되었구나... 하밀카르와 한니발이라... 참으로 무서운 자들이다.”
현재 바르카 가문은 카르타고 정부와 협력하면서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로마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한니발이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자 로마 원로원은 시칠리아를 지키고 있던 티베리우스와 그가 지휘하는 3군단과 4군단을 소환해 이탈리아 북부에서 카르타고군의 남진을 막게 했다.
그러자 카르타고 정부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동안 육성해온 신성대와 전함 80척으로 구성된 해군을 하밀카르의 큰사위 보밀카르에게 맡겨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있는 큰 섬 시칠리아의 서남부를 맹렬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로마 원로원은 다시 시칠리아에 보낼 병력을 훈련 시키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마실리아를 점령한 하밀카르가 한니발과 합류해 함께 남진하거나, 느슨해진 로마의 해상봉쇄망을 뚫고 마실리아에서 가까운 섬 코르시카와 사르데냐를 공격할 수도 있는 상황까지 대비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파비우스와 같은 생각을 하며 쿠리아 호스틸리아를 땅이 꺼질 듯한 한숨으로 가득 메웠다.
그러나 그런 원로원 의원 중에서 조국 로마에 대한 걱정에 앞서 그나이우스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가 있었다.
바로 원 역사에서 로마의 검으로 불리는 맹장 마르켈루스였다,
그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구슬픈 목소리로 친구의 별명을 부르며 눈시울을 붉혔다..
“칼부스... 나보다 먼저 엘리시움(그리스 로마 신화의 천국)으로 떠났구나...”
마르켈루스는 4년 전 함께 집정관에 당선되기도 했던 오랜 벗의 복수를 하고 말 것을 결심하며 동료 의원들에게 말했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 여러분께서도 아시다시피 명예롭게 전사한 그나이우스 의원님과 저는 오래전부터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부디 제게 임페리움(군사 지휘권)을 맡겨 주십시오. 파두스 강변에서 플라켄티아를 넘보는 한니발의 군대를 물리치고 마실리아를 카르타고인의 손아귀에서 되찾겠습니다.”
그러자 스키피오의 예비 장인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그에게 대답했다.
“존경하는 마르켈루스 의원님의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제 오랜 벗이자 사돈을 맺기로 약속한 푸블리우스 집정관님께서 전사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같은 심정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번 만은 제게 조국을 구할 기회를 양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유가 뭡니까? 전 4년 전에도 파두스 강변에서 인수브레스 족을 정벌한 경험이 있어 그 지역 지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티베리우스 독재관님을 도와 적장 한니발을 물리치는 임무에 저보다 적합한 자는 없을 겁니다.”
“로마의 일곱 언덕을 둘러싼 세르비우스 성벽 안에 마르켈루스 의원님의 용맹함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제가 의원님께 무리한 부탁을 드리는 것은 지금 티베리우스 독재관님 휘하의 군단에는 제 예비 사위이자 그나이우스 의원님의 조카인 스키피오가 병졸로 복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제게 사돈을 맺기로 약속한 친구의 복수를 하고 눈앞에서 아버지를 잃은 어린 예비 사위를 위로할 기회를 주시길 바랍니다.”
아이밀리우스의 간곡한 부탁이 그 자리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의 마음이 움직였다.
게다가 그는 바로 작년에 집정관에 선출됐었던 검증된 군사 지휘관이기도 했기 때문에 로마 원로원은 그에게 군권을 맡기자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어졌다.
그런 동료 의원들의 마음을 알아챈 원로원의 중진 파비우스가 다시 한번 나섰다.
“존경하는 동료 의원 여러분. 저는 존경하는 아이밀리우스 의원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집정관이나 독재관이 아닌 사람에게 군권을 맡기는 일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지만, 지금은 조국 로마를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저는 여러분께 아이밀리우스 의원님을 ‘전직집정관’에 임명해 두 개의 군단을 지휘할 수 있는 군권을 맡길 것을 제안합니다.”
* * *
현대의 역사학자 중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장 한니발이 사군툼을 함락시키는 데 8개월이나 걸린 이유에 대해서 속 시원한 해명을 내놓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어떤 이는 한니발이 공선전 수행능력만큼은 형편없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가 하면 동맹도시가 오랜 기간 공격받는 동안 로마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모습을 전 지중해에 보여주어 로마연합의 붕괴를 유발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스드루발은 전생에 그 부분에 대해 늘 궁금해해 왔었는데, 드디어 진실을 알게 되었다.
“플라켄티아 인근의 친로마 성향 갈리아 부족의 마을을 회유해보고 거절하는 마을을 약탈한다. 다만 마을을 완전히 불태워 버리거나 저들이 이번 겨울을 나지 못할 만큼 많은 식량을 빼앗지는 마라. 무능력한 맹주 로마를 원망하는 갈리아인의 목소리가 로마연합의 뿌리를 흔들어야 하니까 말이다.”
기원전 10월 중순 어느 날 아침에 한니발은 기병대장 마하르발과 부관 기스코에게 아직도 로마의 편에 서 있는 극소수의 갈리아 부족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처럼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로마 원로원이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동안에도 로마의 식민도시 플라켄티아 주변의 친로마파 부족들을 재물과 무력으로 복속시키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하스드루발은 원래의 역사와는 사뭇 다른 한니발의 행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원 역사에서는 남부 이탈리아의 항구도시를 점령해서 본국으로부터 해상보급을 받는 것 말고는 당장 보급망을 확보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남진을 서둘렀지. 하지만 지금은 히스파니아에서 출발한 보급품이 빵빵하게 들어오고 있으니 그럴 필요가 없어. 그편이 로마연합의 도시국가들의 로마에 대한 불만을 품게 하는데 더 효율적이기도 하고 말이야.’
원래의 역사에서 한니발은 마치 거대한 태풍처럼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적군과 항복하지 않는 도시를 모조리 파괴하면서 이탈리아 반도를 휘저었다.
그런데도 남부 이탈리아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로마연합을 탈퇴하는 도시가 거의 없었다.
로마연합에 소속된 도시들은 한니발이 로마를 멸망시키고 나면 자신들을 다른 카르타고의 속주처럼 가혹하게 대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하스드루발이 국내파를 몰아내면서 개혁을 이룬 덕분에 카르타고가 속주와 동맹국을 관대하게 대한다는 사실이 전 지중해에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게다가 로마연합의 여러 도시들은 아직도 한니발을 적 집정관을 소규모 기병전에서 운 좋게 잡은 애송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이탈리아 북부의 로마연합 소속 도시들은 아직 풋내나는 적장이 이끄는 군대가 이탈리아 북부를 잠식해 나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는 로마군에게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파두스 강 변에 사는 갈리아인 부족에 영향력을 넓혀나갔다.
그 결과 11월 중순 즈음이 되자 이탈리아 북부의 거의 모든 부족이 바르카 가문과 동맹을 맺게 되었다.
이제 다음 전투를 벌일 때가 거의 무르익었다.
하스드루발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니발에게 말했다.
“형. 이제 슬슬 강 건너에 있는 로마군을 몰아내야지. 빨리 적장이 회전을 벌이도록 유도해야 할 텐데 말이야.”
“나도 갈리아인 첩자에게 그 얘기는 들었어. 그런데 듣던 거와는 반응이 영 딴판이라 의외라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다. 이 정도로 인근의 친로마파 갈리아 부족을 들쑤셔 놓았는데 멧돼지 같은 성격이라는 적장이 엉덩이를 뭉개고 있으니 답답하군.”
하스드루발은 전생에서 얻은 역사 지식으로 평민 출신으로 집정관 자리까지 오른 적장 티베리우스가 야심 차고 도발에 쉽게 넘어오는 불같은 성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원 역사와는 달리 티베리우스는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도록 한니발의 도발을 잘 참아냈다.
‘아마 원 역사와는 달리 우리 군의 규모가 커서 함부로 회전을 벌일 수 없는 거겠지. 그렇다고 우리가 강을 건너서 적에게 쳐들어가면 오히려 질지도 몰라.’
이탈리아 반도는 한여름에는 강수 확률이 10%도 안 될 정도로 건조하지만, 겨울에는 자주 눈과 비가 내리면서 강수량이 많아진다.
북이탈리아의 기후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니발의 군영과 로마군 숙영지 사이를 흐르고 있는 트레비아 강에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은 물이 흘러들어 가기 시작해 성인 남자 허벅지 정도 높이였던 강의 수위가 가슴까지 차오를 정도로 높아진 상태였다.
하스드루발은 주변에 뗏목을 만들 나무도 없는 평원에서 걸어서 물이 불어난 강을 도강해 적을 공격하는 건 아무리 한니발의 군대가 수적으로 우위에 있더라도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두 형제가 적장을 끌어낼 방법을 두고 고심하고 있을 때 지휘관 막사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가 안으로 들어와 한니발에게 보고했다.
“한니발 장군님께 보고드립니다. 방금 강 건너의 로마군 숙영지에서 탈영한 갈리아인 2천 명이 우리 군에 합류하고 싶다면서 찾아왔습니다.”
한니발은 뜻밖의 낭보에 기뻐하기보다는 먼저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알프스를 넘을 때도 우리를 환대하는 척하면서 등 뒤에 칼을 꽂으려는 갈리아인들을 만났었지. 그자들도 적장 티베리우스가 보낸 첩자가 아닌지 의심스럽군.”
“저... 갈리안들이 가져온 물건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아마 로마의 첩자는 아닐 것 같습니다...”
병사가 갑자기 헬쑥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리자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곧바로 막사 밖으로 나가 갈리아인 탈영병들을 만났다.
탈영병의 지도자가 한니발을 보자마자 두 팔을 벌리며 반갑게 인사했다.
“이탈리아의 해방자이자 갈리아인의 친구 한니발 바르카 장군님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저는 신벨의 아들 드레스트라고 합니다.”
“반갑다.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 한니발이다.”
“듣던 대로 게르만인처럼 체격이 건장하시군요! 저희는 강 건너에 있는 로마군에게 보조병으로 징집당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다 며칠 전 한니발 장군님께서 로마의 압제로부터 갈리아인들을 해방하려 하신다는 소문을 들었지요. 그 후 자유를 찾아 늘 탈영할 기회만 엿보던 차에 어젯밤에 신들께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로마군 숙영지의 목책을 넘어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한니발은 당장 대답을 하지 않고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자신을 드레스트라고 밝힌 갈리아인을 바라보았다.
드레스트도 한니발이 자신을 못 미더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부하들에게 말했다.
“한니발 장군님께 드릴 선물을 가져와라!”
드레스트의 말에 갈라아인 전사들이 자그마한 나무상자 200개를 가져왔다.
드레스트는 그 중 하나를 열어 한니발에게 보여주었다.
“저희의 의지를 직접 보여드리기 위해 가져온 물건입니다.”
“우욱!”
켈트족 출신이 아닌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이 드레스트가 내민 상자의 속을 들여다보고는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나무 상자에 삼나무 기름을 바른 로마군 병사의 머리가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니발은 수염을 깨끗하게 민 로마인의 머리를 보고 태연하게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신들께서 나에게 훌륭한 동맹군을 인도해 주셨군. 환영한다. 조만간 함께 강 건너에 있는 적장 티베리우스를 물리치도록 하자.”
“좋습니다! 다만 그러려면 좀 더 서두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유가 뭐지?”
“이름이 아이밀리우스인지 뭔지 하는 로마의 장군이 며칠 후에 지원군과 함께 트레비아 강 건너에 있는 로마군 숙영지에 도착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한니발 장군님의 군대가 적보다 한 명이라도 많을 때 빨리 적을 치는 게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한니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네가 적의 머리보다 더 큰 선물을 줬구나. 정말 고맙다.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빨리 적장 티베리우스를 공격해야겠군.”
한니발은 갈리아인 탈영병들에게 은화와 식량을 나눠줘 포상한 후 하스드루발과 함께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다.
한니발은 하스드루발과 적장 티베리우스를 물리칠 대책을 논의할 생각이었지만, 의기양양한 웃음을 짓고 있는 동생의 얼굴을 보고 그가 이미 계책을 생각해 냈음을 알아차렸다.
“바알 함몬께서 다시 한번 지혜를 내려주셨나 보구나. 어서 말해봐.”
“역시 눈치가 대단하네. 잠깐만 기다려봐.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글로 써서 보여주는 게 더 빠를 것 같아.”
하스드루발은 즉시 파피루스 두루마리 하나를 펼쳐 잉크를 묻힌 깃털로 무언가를 써내려갔다.
한니발은 두루마리를 펼쳐 동생이 켈트어로 써내려 간 서신을 읽었다.
“타우리니족이 우리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처럼 꾸밀 생각을 해내다니! 정말 훌륭한 계책이다! 적장은 우리 군대가 후방을 공격당하는 줄 알고 강을 건너오겠군! 어서 서두르자! 로마의 지원군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눈앞의 적을 물리쳐야 하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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