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 [88화] 미끼를 던진 하스드루발 (2)
한니발이 로마군 숙영지에서 탈영한 갈리아인들을 만난 바로 다음 날 아침,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는 자신을 호위하는 릭토르 스물네 명과 함께 자신의 숙영지 입구에 서 있었다.
그는 강 건너 흰 눈이 소복이 쌓여있는 평원에 자리 잡은 한니발의 군영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고지식한 아이밀리우스에게 공적을 빼앗길 생각을 하니 벌써 속이 쓰리구나! 그렇다고 저 많은 적군을 내 휘하의 병력만으로 공격할 수도 없고... 정말 답답하구먼.”
정치인 중 권력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티베리우스는 로마 원로원 의원 중에서도 한 손에 꼽을만한 대단한 야심가였다.
평민 출신인 그는 성인식을 치른 직후 로마 원로원의 일원이 되려고 일찌감치 군 경력을 시작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전장에서 싸워 전공을 쌓아왔다.
그 결과 티베리우스는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로마인들이 ‘명예로운 경력’이라고 부르는 공직의 승진코스를 차례대로 밟아왔다.
그러나 그렇게 치열하게 노력해 왔음에도 그는 42세가 되어서야 처음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일반적으로 로마인들이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초임 집정관의 나이는 마흔 살이니 티베리우스의 출세가 그렇게 많이 늦었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늘 자신이 귀족 출신이 아니라서 동료 원로원 의원보다 출세가 늦어지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이밀리우스의 군단이 이곳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로마군이 카르타고군에게 승리하면 개선식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 귀족 샌님이 되고 말 거다! 이대로는 감찰관 자리에 올라보지도 못하고 명예로운 경력을 끝내게 생겼구나!”
로마의 관직 중 가장 강한 실권을 쥔 자리는 역시 군 통수권자이자 행정부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집정관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가장 탐내는 자리는 집정관이 아닌 감찰관이었다.
감찰관은 집정관을 경험해본 원로 의원 중에서 선출하는 로마의 최고위 관직으로 실권은 집정관보다 작긴 하지만, 원로원 의원을 선출할 권한을 가진 실세 중의 실세였다.
게다가 감찰관을 역임했던 자는 그가 사망한 후 평범한 수의 대신 왕의 권위를 의미하는 자주색 토가를 입고 장례를 치를 수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서 가장 명예로운 관직으로 여겨졌다.
그는 독재관에 선출될 때 만해도 40대 중반에 감찰관 자리에 오를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지난 3개월간 한 일이라고는 수적으로 우세한 한니발의 군대가 강을 건너지 못하게 지키고 있었던 것밖에 없었다.
거기에 어제는 갈리아 출신 보조병이 야음을 틈타 로마 시민군을 200명이나 죽이고 탈영해 버리는 일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군이 한니발의 군대를 물리치면 로마 시민과 원로원이 아이밀리우스의 공을 더 높게 쳐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티베리우스가 씁쓸한 심정을 숨기지 못하고 한숨을 쉬고 있을 때, 그의 눈에 말을 탄 갈리아 기병 두 기가 강을 건너 로마군 숙영지를 향해 말을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저자들은 대체 뭐지? 겨우 두 명이 우리 군의 숙영지를 공격하려는 건 아닐 테고... 얼마 안 남은 친로마 부족의 사절인가? 당장 갈리아 출신 보조병을 보내서 저 야만인들이 무슨 목적으로 여기 왔는지 알아봐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릭토르 중 한 명이 군영 안으로 뛰어들어가 갈리아 출신 보조병들에게 독재관의 뜻을 전했다.
곧 갈리아 출신 보조병 중 라틴어를 할 줄 아는 병사가 로마군 숙영지로 다가온 갈리아 기병 두 명을 티베리우스 앞으로 데려갔다.
갈리아 기병 중 한 명이 티베리우스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로마군의 사령관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타우리니족 장로 쿠노벨리누스의 아들 이우도쿠스입니다.”
티베리우스는 붉은색 머리에 푸른 눈을 한 갈리아인이 유창한 라틴어로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네처럼 라틴어를 잘하는 갈리아인은 처음 봤구먼. 반갑다. 로마의 독재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다. 그래서 타우리니족의 병사가 무슨 일로 여기 왔지? 자네의 부족이 우리 로마를 배신하고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은 지 몇 달 지나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타우리니족과 로마의 동맹이 깨진 것은 우리 부족의 왕이 숫자만 많은 카르타고군에게 겁을 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아버지이신 쿠노벨리누스 장로께서는 겁쟁이 왕에게 실망하시고 뜻이 맞는 부족장과 장로들의 힘을 모아 며칠 전 선왕을 쫓아내고 새로운 왕을 추대하셨습니다.”
“그럼 타우리니족이 다시 로마와 동맹을 맺고 싶어한다 이 말인가?”
“말씀대로입니다. 적장 한니발은 친카르타고파 왕이 쫓겨난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타우리니족과 로마가 힘을 합치면 벌떼처럼 모여있는 카르타고인들을 손쉽게 이탈리아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겁니다.”
이우도쿠스의 말은 티베리우스에게 더할 나위 없이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그는 타우리니족이 카르타고군의 배후를 친다면, 한니발은 후방을 지키기 위해 병력을 쪼갤 수밖에 없을 테고 그러면 자신의 군대로 적장 한니발의 본대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도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라 이우도쿠스의 말을 그리 쉽게 믿지는 않았다.
“참 솔깃한 제안이다. 그건 인정하지. 그렇지만 내가 어떻게 다시 타우리니족을 믿을 수가 있겠나? 이미 우리를 한 번 배신했던 부족을 말이다.”
사실 하스드루발의 서신을 받고 로마군을 속이러 온 이우도쿠스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간신히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는 침착하게 하스드루발이 미리 전해준 말을 티베리우스에게 전했다.
“새로 추대되신 타우리니족의 왕 아스테릭스 전하께서는 로마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셨습니다. 우리 부족은 사흘 뒤 우리의 영토에 주둔 중인 적장 한니발의 동생 마고의 군대를 공격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가 되면 저희의 진심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로서는 밑져야 본전이겠군. 좋다. 그럼 사흘 뒤에 과연 타우리니족이 이번에는 약속을 지키는지 지켜보도록 하지.”
* * *
이우도쿠스가 로마군의 숙영지에서 티베리우스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적장 티베리우스를 속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자신의 막사에 하스드루발과 장교 전원을 불러모아 군사회의를 열었다.
“이제 때가 무르익었다. 앞으로 사흘 후면 우리는 드디어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적을 물리치고 트레비아 강을 건너 로마의 식민지 플라켄티아를 공격할 것이다. 하지만 먼저 수적 열세를 의식해서 몸을 사리고 있는 적장을 끌어내기 위해 타우리니족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가장해 병력의 절반을 실제로 타우리니족의 영토로 보낼 계획이다.”
한니발의 말에 바르카 가문의 장교 수십 명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급장교인 기스코가 의아한 표정으로 한니발에게 물었다.
“한니발 장군님. 타우리니족의 영토가 여기서 가깝기는 하지만, 기병이면 몰라도 보병은 하루를 꼬박 행군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말씀하신 대로로면 우리는 로마군과 전투를 벌일 때 실제로 절반의 병력만으로 적과 싸우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적장 티베리우스를 유인해 낼 수 없을 거다. 적장이 성격이 급한 편이라고는 하지만, 로마 원로원이 갈리아인의 말만 듣고 전군을 움직일 만큼 멍청한 자에게 독재관 자리를 내주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제야 장교들은 한니발의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중 몇 명은 조금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한니발은 얼마 전 로마 원정에 동참하고자 물밀 듯이 모여든 갈리아인 중에서 특히 건장한 2만 명을 뽑아 자신의 군대에 합류시켜 총 8만 대군을 이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중 절반을 후방으로 보내고 나면 한니발의 군대는 로마군과 거의 비슷한 규모의 병력으로 적과 전투를 치르게 된다.
몇몇 장교들은 지중해 최강의 보병전력을 갖췄다는 로마군단과 비슷한 규모의 군대로 정면승부를 벌이는 것이 불안해했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낌새를 알아채고 장교들에게 말했다.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라. 한니발 형과 내가 적을 물리칠 전술을 이미 구상해놓았으니까 말이다. 전투가 한창일 때 미리 매복해 놓은 정예기병 2천 기가 적의 배후에 기습공격을 하게 할 생각이다. 아무리 사기가 높은 군대라도 배후가 공격당하면 패주하기 마련이지.”
그 말에 기병대장 마하르발이 하스드루발에게 물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저는 지난 석 달간 이 근방을 자주 정찰했습니다만, 이 주변은 병사를 숨길만 한 숲이 없는 평원이었습니다. 어디 적당한 장소를 찾으셨습니까?”
“여기서 남동쪽에 말보다도 키가 큰 덤불이 우거진 곳이 있더군. 거기라면 기병 2천 기 정도는 충분히 숨길 수 있을 걸세.”
“거기라면 로마군 진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아닙니까? 정말 대담한 작전이군요! 적장도 설마 우리 군이 자기 턱밑에 매복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하스드루발의 말을 듣고 바르카 가문의 장교들은 불안감을 말끔히 떨쳐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아직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 한니발에게 물었다.
“형. 그런데 왜 이번 전투에 나가는 보병대의 4분의 3이 새로 합류한 갈리아인이야? 우린 알프스도 정복한 정예보병들이 많이 있잖아. 적이 트레비아 강을 건너느라 지쳤다고 해도 조직력이 약한 갈리아인 보병은 결국 로마 군단병에게 돌파되어 버릴 것 같은데.”
“네 말대로 갈리아 보병의 진형은 로마 군단병이 죽기 살기로 밀어붙이면 분명 돌파당하겠지. 그때는 이미 우리에게 승기가 넘어온 후이긴 하겠지만.”
“뭐? 전투에도 이기고 적을 완전히 섬멸할 수 있으면 더 좋은 거 아니야? 왜 일부러 로마 군단병이 아군을 돌파하고 도망갈 기회를 주려는 건데?”
“너라면 알 수 있을 텐데. 티키누스 강 변에서 벌였던 전투를 잘 생각해봐.”
“아...!!!”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의 의도를 알아채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니발 형은 벌써 칸나에 전투를 설계하고 있구나! 진짜 형이 로마에 태어났으면 카르타고는 진작에 멸망했겠네.’
원 역사에서 로마군은 한니발에게 여러 차례 큰 패배를 당하고도 한니발의 기병과 야비한 책략에 휘말려 졌을 뿐 보병과 보병이 정면에서 힘 대결을 펼치면 로마군이 한니발을 이긴다는 착각을 거의 3년이나 유지했다.
그 결과 한니발은 로마군을 칸나에로 유인해 대규모 회전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지금의 한니발도 티키누스 강 변에서 적장 푸블리우스를 자신이 원하는 전장에 스스로 나오게 유도한 것처럼 로마 원로원에 ‘보병 전투라면 로마군이 이긴다.’라는 잘못된 정보를 심어줘 그것을 이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갈리아 보병이 돌파당하는 게 칸나에 전투를 위한 밑밥이라면 그렇게 하는 게 맞겠지. 그래도 적을 속이면서 적 병력을 더 많이 줄일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때 하스드루발의 머릿속에 두 마리리 토끼를 잡을 방법이 떠올랐다.
“형! 그럼 갈리아 보병이 돌파당한 다음에는 적을 섬멸해도 되는 거잖아? 어차피 도망치는 로마군 기병이 소문은 잘 내줄 테니까 말이야.”
“그렇겠지. 하지만 보병 진이 돌파당한 다음 적을 추격하는 건 쉽지 않을 텐데?”
“우리 어렸을 때 아야몬테에서 카르페타니족과 싸울 때를 생각해봐! 적이 움직일 경로를 알고 있으면 거기에 미리 함정을 설치해 놓으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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