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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91화 (91/201)

[ 91 ] [90화] 격전의 트레비아 강 (2)

티베리우스는 연설을 마치자마자 얼음장처럼 차가운 트레비아 강으로 걸어 들어갔다.

로마 군단병들은 말에서 내린 뒤 가장 먼저 차가운 강물에 발을 담그며 솔선수범하는 독재관의 뒤를 따라 트레비아 강으로 향했다.

모두가 강을 건너기 시작할 때, 스키피오는 티베리우스에게 배를 걷어차인 통증이 가시지 않아서 눈 덮인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속해있는 십인대의 대장 발부스의 부축을 받고 나서야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괜찮냐? 그러게 왜 독재관에게 대들고 난리야! 네가 아직도 집정관 아들인 줄 알아? 즉결처형 안 당하고 이 정도로 끝난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다!”

발부스는 얼마 전 아버지를 잃은 데다 한창 혈기왕성할 나이인 스키피오가 성질을 부리거나 울음을 터뜨릴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통증 때문에 찌푸려진 인상을 펴지 못하면서도 왠지 기뻐 보이는 눈빛으로 십인대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런 식으로 병사를 지휘하는 방법도 있군요! 정말 놀라워요! 이 전투 어쩌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 녀석이 배가 아니라 머리를 얻어맞았나? 갑자기 뭔 헛소리야?! 당연히 우리가 이기지! 티베리우스 독재관님이 다혈질인데도 군단병들에게 인기가 많은 이유가 다 있는 거야! 지휘관이 저렇게 솔선수범하면 병사들이 안 따르고 배기겠냐?”

스키피오가 18년을 살아오면서 보아온 군사 지휘관은 자신의 아버지 푸블리우스와 큰아버지 그나이우스가 전부였다.

스키피오 가문의 남자들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 철저하게 계획한 작전에 따라 군대를 움직이는걸 선호하는 일류전술가였다.

그들은 전장에 나설 때면 병사들을 동요시키지 않기 위해 늘 근엄하고 과묵한 언행을 보였다.

그에 비해 티베리우스는 ‘무조건 중앙돌파’라는 단순한 전술만으로 수많은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고 집정관 자리까지 올랐다.

그가 그처럼 단순한 전술로 많은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비결은 병사들 앞에서 자신의 내면을 진솔하게 내보이고 궂은일에 앞장서면서 부대의 사기를 높이는 재주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스키피오는 몸을 추스르고 다시 말 위에 올라 티베리우스의 뒤를 따라 트레비아 강으로 말을 몰아갔다.

기원전 3세기는 약 200년 전 시작된 소빙하기가 한창인 시절이었기 때문에 겨울 날씨가 매서웠다.

로마 군단병들은 아직 11월 중순인데도 뼈마디까지 얼려버릴 것 같은 찬물이 턱까지 차오르자 온몸에 닭살이 돋아났다.

그러나 로마 군단병들은 무거운 청동 흉갑을 입고도 거침없이 강물을 가르며 걸어나가는 독재관을 따라 배고픔과 추위도 잊고 힘차게 진격했다.

스키피오는 말을 타고 강을 건너면서 처음 접해보는 유형의 지휘관인 티베리우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격정적인 성품의 독재관이 군대를 이끄는 모습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탐욕스럽게 머릿속에 기억을 새겨나갔다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 차가운 강물 속에서도 군단병들의 기세가 꺾일 줄을 모르는구나! 오늘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복수를 할 수도 있겠다! 전쟁의 신 마르스 시여! 부디 로물루스의 후손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하스드루발이 들었으면 코웃음을 쳤을 말이지만, 기원전 3세기의 고대인 관점에서는 충분히 실현 가능해 보이는 바람이었다.

고대 전쟁사에는 본대 양익의 기병 간의 싸움에서 밀려도 본대의 중무장보병이 눈앞의 적을 압도하고 측면을 공격해오는 기병까지 쫓아내면서 승리한 사례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로마군 지휘관 중 상당수는 로마 군단병의 압도적인 전투력을 이용한 중앙돌파가 다른 어떤 전술보다도 뛰어나다고 여기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역사에 한니발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얘기였다.

* * *

누미디아 궁기병 300기가 적을 유인해 올 때,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친 후였다.

하스드루발은 북아프리카 중기병 2천 기를 데리고 한니발의 군영에서 남동쪽에 있는 덤불 지대에 매복했다.

그동안 한니발은 일찌감치 남은 군대를 전부 이끌고 루레티 강을 건너 미리 진을 친다음 티베리우스의 군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부드러운 빵과 양고기를 넣고 끓인 따듯한 스프로 아침을 든든하게 먹은 후 추위를 막기 위해 온몸에 기름을 발라 하나 같이 혈색이 좋아 보였다.

그럼에도 한니발의 병사들과 부관들은 기세등등하게 강을 건너오는 로마 군단병을 보고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로마 군단병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은방패단과 함께 지중해 전역에서 최강의 중무장보병대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 강적과 처음으로 전면전을 벌이기 직전이니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이 석고상처럼 뻣뻣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니발은 병사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자신이 수루스라는 이름을 지어준 전투코끼리를 타고 병사들 앞을 천천히 거닐었다.

수루스는 스무 마리의 인도코끼리 중에서도 유난히 영리했기 때문에 눈이 많이 쌓여있는 곳을 여유롭게 피해 가며 지그재그로 움직였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부대의 마스코트인 수루스의 재주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코끼리의 목에 타고 있던 한니발이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봐라! 수루스도 눈이 많이 쌓여있는 곳은 피해 다닌다! 그런데 적장 티베리우스는 스스로 얼음보다 차가운 강물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구나! 아무래도 적장보다 수루스가 더 머리가 좋은 모양이다!”

한니발의 뜬금없는 농담에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하하하!”

“크크크킄... 맞네! 사령관이라는 자가 코끼리보다 머리가 나쁘다니!”

한니발은 자신의 농담이 먹혀 병사들의 긴장이 풀어진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보다시피 로마의 장군들은 그저 눈앞의 적에게 달려드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자들이다! 전략의 ‘전’자도 모르는 멍청이는 이미 나와 내 동생 하스드루발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다! 게다가 그 적장을 따르는 병사들은 아침밥도 못 먹고 강을 건너느라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잡병들이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이여!오늘 로마인들은 어리석음의 대가를 피로 치르게 될 것이다!”

한니발의 연설에 사기가 오른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이 우렁찬 함성을 질러댔다.

“타도 로마!!!!”

* * *

한니발이 병사들에게 연설하는 동안 로마군은 마침내 트레비아 강을 건너 바르카 가문의 군대와 마주쳤다.

티베리우스는 병사들을 잠시 쉬게 한 다음에 적의 군영을 공격할 생각이었지만, 한니발 군대가 이미 루레티 강을 건너와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일렬로 늘어서있는 카르타고군을 보고 혀를 찼다.

“쯧! 역시 적장 한니발은 만만치 않은 녀석이군! 분명 병력의 절반을 후방으로 보냈다고 들었는데. 그런데도 숙영지의 목책 뒤에서 몸을 사리는 대신 우리 병사들이 제일 지친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치고 나오다니 판단력이 대단하군.”

티베리우스는 진형의 중앙에 보병 3만 6천 명을 배치하고 우익에 로마 기병 1천 기, 그리고 좌익에는 보조병으로 징집한 동맹군 기병 3천 기를 배치했다.

반면 한니발은 진영 중앙의 본대에 켈트족과 히스파니아 출신 보병 2만 명을 배치하고 그 뒤를 정예병인 북아프리카 중장보병 5천 명이 받치게 했다.

또 본대 좌익과 우익에 각각 이베리아족 중기병과 누미디아 궁기병을 각각 약 4천 기씩 배치해 적의 기병을 상대하게 하고 본대와 각 기병대 사이에는 전투코끼리 10기씩 두어 수가 더 많은 적 보병을 견제하게 했다.

한니발의 군대가 기병이 많고 코끼리를 보유하고 있긴 했지만, 병력의 숫자만 따져보면 티베리우스의 군대는 약 4만 명이고 한니발의 군대는 3만 3천 명으로 로마군이 7천 명 정도가 더 많았다.

티베리우스는 적군의 규모를 확인한 후 고개를 돌려 로마 군단병들을 돌아보았다.

병사들은 하나같이 추위와 굶주림을 견뎌 며 강행군을 하느라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만큼은 아직도 불에 달군 칼날처럼 뜨겁고 날카로웠다.

“이 정도 투지면 아직 승산이 있다. 어차피 여기서 등을 보이면 적이 우리의 등에 칼을 꽂으려고 할 테니 전력으로 부딪쳐 보는 수밖에. 전군 적을 향해 전진하라!”

독재관의 명령에 4만 명의 로마군이 약 1km쯤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있는 카르타고군을 향해 서서히 거리를 좁혀나갔다.

한니발은 적과의 거리가 200m 이내로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전투를 준비했다.

“투석병! 사격준비!!”

한니발이 명령하자 갑옷 없이 튜닉만 입고 있는 발레아레스 투석병 4천 명이 본대 앞으로 나서 나무껍질과 가죽으로 만든 슬링을 손에 들고 앞으로 나섰다.

티베리우스는 적의 경보병대가 앞으로 나서는 것을 대대장들에게 명령했다.

“카르타고군의 경보병이 앞으로 나섰다! 우리도 벨리테스를 내보내 적의 기세를 꺾어라!”

독재관의 명령에 최전방에 산개해 있던 경보병 벨리테스들이 작은 원형 방패와 재블린 대여섯 개를 손에 들고 기세 좋게 적을 향해 돌진했다.

“와아아아아아!”

한니발은 적의 경보병이 아군에게 투창을 던지기 위해 돌진해 오자 발레아레스 투석병들에게 발사 명령을 내렸다.

“투석병! 발사!”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발레아레스 투석병들이 머리 위로 납덩이를 넣은 슬링을 돌리다 투수가 야구공을 던지듯 오른팔을 전방으로 힘차게 뻗었다.

그러자 바르카 가문의 상징인 번개를 새겨넣은 달걀 크기의 납덩이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적을 향해 날아갔다.

- 쐐액!

아직 활이나 슬링의 사정거리 밖이라고 생각하고 안심하고 달려오던 벨리테스들이 산발적으로 날아드는 납덩어리에 얼굴이나 가슴을 얻어맞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으아아악!”

“저기서 던진 납덩이가 여기까지 날아온다고? 모두 자세를 낮추고 방패로 얼굴을 가려라!”

누군가의 외침을 듣고 벨리테스들이 일제히 방패를 들어 올려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청동 투구도 박살 내는 발레아레스 투석병이 던진 납덩이를 얇은 나무판을 잘라 만든 부실한 방패가 버텨낼 수 있을 리 없었다.

- 콰직!

결국 벨리테스들은 손에 든 방패가 일격에 부서져 버리자 아직 퇴각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고 말았다.

발레아레스 투석병의 위력을 처음 접해본 티베리우스는 두 눈을 접시처럼 크게 뜨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슬링으로 던진 탄환이 1 스타디온(약 180m)이 넘는 거리를 날아오다니! 게다가 던지는 족족 우리 병사들에게 명중하고 있지 않나!”

티베리우스는 급히 벨리테스들 바로 뒤에서 전진하고 있는 병사들 틈으로 들어가 커다란 방패를 들어 올리며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테스투도!”

테스투도는 병사 수십 명이 직사각형 모양으로 뭉쳐 전후좌우와 상단까지 방패로 막는 로마 군단병의 상징과도 같은 진형이다.

거북이 등딱지 모양을 닮아 귀갑진이라고도 불리는 이 진형은 속도가 느린 단점이 있지만, 고대에는 원거리 공격에 대해 거의 무적의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군 보병 3만 6천 명이 순식간에 수백 개의 직사각형이 방패가 되어 돌을 던지는 적을 향해 서서히 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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