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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92화 (92/201)

[ 92 ] [91화] 격전의 트레비아 강 (3)

로마군이 거대한 거북이 수백 마리와 같은 모습의 진형을 짜고 아군에게 다가오자 한니발이 발레아레스 투석병들에게 외쳤다.

“귀갑진이다! 납덩이 대신 돌을 던져라!”

투석병들은 손에 쥐고 있던 달걀만 한 납덩이를 허리춤에 차고 있는 가죽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고 대신 바닥에 쌓아둔 큼직한 돌멩이를 들어 올렸다.

곧 작고 가벼운 납덩이 대신 성인 남자의 주먹만 한 돌멩이들이 로마 군단병의 방패에 빗발쳤다.

- 퍼억!

- 터엉!

그러나 무게가 최대 500g까지 나가는 큼직한 돌멩이도 튼튼한 나무를 세 겹이나 덧대어 만든 로마 군단병의 큰 방패 스큐툼에 부딪치자 둔탁한 소리를 내며 튕겨 나왔다.

한니발은 로마군의 튼튼한 귀갑진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큰 돌로 방패를 두들겨 대는데도 빈틈 하나 생기지 않는군. 적이지만 훌륭한 조직력이다. 적장도 믿는 구석이 있어서 정면돌파를 시도한다 이건가?”

한니발은 적이 100m 앞까지 다가오자 발레아레스 투석병을 본대의 후방으로 불러들였다.

“곧 적의 투창 사정거리에 들어간다! 투석병은 후방으로 빠지고 기병대는 전방의 적을 향해 전진하라!”

사령관의 명령을 들은 나발수가 뿔나팔을 불자 좌익과 우익에서 대기하고 있던 바르카 가문의 기병들이 발뒤꿈치로 말의 옆구리를 찼다.

곧 철갑을 두른 8천 기의 기병이 먹이 감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사자처럼 적 기병을 향해 천천히 말을 몰아나갔다.

스키피오는 정면에서 다가오는 이베리아족 중기병들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카르타고 기병들이 저번 전투에는 저렇게 긴 창을 들고 나오지 않았는데?”

그는 길이가 5m가 넘는 랜스를 들고 있는 적 기병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스키피오가 속한 십인대의 대장이 애써 태연한 척하며 부하들에게 말했다.

“모두 너무 걱정하지 마라! 십 큐빗(약 5m)이 넘는 창을 말 위에서 휘두를 수 있겠냐? 저거 다 허세야 허세! 저런 걸 들고 적에게 돌진하다가는 말 위에서 균형도 못 잡고 떨어져 버리고 말 거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십인대장의 말에 찬성할 수 없었다.

“십인대장님. 카르타고군 기병들은 하나같이 마치 말과 한몸인 것처럼 움직입니다. 아마 저 비상식적으로 긴 창도 자유재로 다룰 수 있다고 봐야겠지요.”

“뭐? 말하고 한 몸? 헛소리! 저 히스파니아에서 온 야만인들이 신화에 나오는 켄타우루스라도 된다는 말이냐?”

“적어도 저번 전투에서는 그랬습니다.”

스키피오가 지난 전투 이야기를 꺼내자 십인대장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그는 스키피오가 티키누스 강 변에서 적장의 손에 아버지를 잃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네가 푸블리우스 집정관님께서 전사하신 전투 때 겪은 일을 가지고 농담할 리도 없고... 그럼 저 무식하게 긴 창이 우리를 찔러올 거란 말이야?”

십인대장과 그가 지휘하는 병사 여덟 명의 얼굴이 트레비아 강 변에 쌓여있는 눈처럼 하얗게 질리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여기 우익의 기병은 천 명밖에 안 되는데! 눈앞의 적 기병 4천 명이 전원 정예병이라고?”

“큰일 났네... 저 커다란 창에 맞으면 우린 뼈도 못 추릴 거라고!!”

스키피오는 그런 동료들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로마 기병의 사기와 투지가 그가 예상보다 훨씬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기병의 수준이 이렇게 낮아서는 아군 보병이 적의 본대를 분쇄하기 전에 아군이 포위당하고 말겠구나. 아직 희망을 버리기는 이르지만, 최악의 상황에도 미리 대비를 해둬야겠다.”

몇 달 전 벌어진 티키누스 전투 때 로마 기병들은 집정관을 구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사력을 다해 분투했다.

그러나 그와 같이 로마 기병들이 목숨을 걸고 적과 맞선 사례는 500년이 넘는 로마의 역사를 통틀어 별로 찾아볼 수 없는 경우였다.

그동안 로마 기병들의 주요 임무는 정찰이나, 서신 전달, 그리고 로마군의 주력인 중무장 보병이 적을 물리치면 도망치는 패잔병들을 추격해 등 뒤를 공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위험한 임무는 적 기병이 중앙에서 사투를 벌이는 로마 군단병의 측면이나 배후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경우도 강력한 로마의 중장보병대가 눈앞의 적을 순식간에 분쇄하고 그들을 지원하러 오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 잠시만 적의 공격을 견뎌내면 충분했다.

그런 이유로 로마 기병 중 고참병이라고 해도 같은 기간을 복무한 보병에게 비하면 전투경험이 턱없이 부족했다.

스키피오는 그 사실을 눈치채고 십인대장 발부스에게 말했다.

“십인대장님. 저번 전투에서 아군 기병 사천오백 기는 적 기병 육천 기와 맞붙어서 제대로 힘도 못 써보고 패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속한 기병대는 눈앞의 적의 반의반 밖에 안됩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 전투가 시작하기 전에 도망치면 항명죄로 사형당하는 거 모르냐? 우리만 죽는 게 아니라 우리와 같은 대대의 전우 열 명 중 한 명도 돌과 몽둥이에 맞아 죽는다고!”

“전선에서 이탈하자는 게 아닙니다. 만약 아군 보병대가 위기에 처하면 독재관님을 구하러 가자는 겁니다. 적 보병의 주력이 조직력이 약한 갈리아 보병이니 분명 티베리우스 독재관님은 적의 본대를 압도하실 겁니다. 그렇지만 그 전에 아군 기병이 궤멸당하면 카르타고군 기병은 아군 본대의 측면과 후방을 사정없이 공격할 겁니다. 사령관이 전사하는 사태만큼은 무조건 막아야 합니다.”

그제야 발부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저번 전투에서 로마의 집정관이 적장의 활을 맞고 전사한 게 불과 두 달 전의 일이다.

그런데 집정관보다 두 배나 강한 권한과 권위를 가진 독재관까지 연달아 적장 한니발의 군대와 싸우다 전사하게 된다면 로마는 연합 맹주의 권위를 잃게 될 것이 분명했다.

십인대장 발부스는 근심스러운 얼굴로 스키피오에게 대답했다.

“그 말이 틀렸으면 좋겠지만, 끔찍한 티키누스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네 말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구나. 알겠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면 우리 십인대는 독재관님 구출을 최우선 목표로 한다.”

스키피오가 십인대장 발부스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바르카 가문의 기병대는 어느덧 로마군 기병과의 거리를 50m 이내로 좁혔다.

한니발은 전투코끼리 수루스의 목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직접 뿔나팔을 불어 기병대에 돌격을 명령했다.

- 뿌우우우우우웅

사령관의 뿔나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자 이베리아족 중기병 4천 기와 누미디아 궁기병 4천 기가 화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용암과 같은 형세로 적을 향해 돌격했다.

- 두두두두두두두두

그러자 로마의 동맹군 기병 3천 기도 전방에서 하얀 눈보라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활을 든 누미디아 궁기병을 향해 달려나갔다.

로마 기병 1천 기는 랜스를 앞으로 내밀고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는 이베리아족 중기병을 상대로 맞돌격할 엄두를 못 내며 혼란에 빠져버렸다.

로마 기병들이 자신이 들고 있는 창의 길이가 적의 무기의 절반도 되지 않은 것을 알고 미리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이다.

“으아악! 정말 저렇게 긴 창을 들고 달려오잖아!”

“오오 유피테르 신이시여! 부디 저희를 지켜주소서!”

결국 로마 기병대는 아무런 대비도 못 하고 덩치 큰 말을 탄 이베리아족 중기병의 돌격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말았다.

- 투콰과과과곽!

엄청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랜스와 로마 기병들의 뼈가 부러지면서 둔탁한 파열음이 트레비아 강 변을 뒤흔들었다.

그렇게 로마 기병 1천 기는 적을 향해 창 한번 내질러보지 못하고 힘껏 휘두른 망치에 얻어맞은 호두알처럼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끄아아아아악!”

랜스에 맞고도 아직 숨이 붙어있는 로마 기병들이 눈밭을 뒹굴며 비명을 질러댔다.

로마 기병대가 혼란에 빠져있을 때 이미 대열에서 이탈한 스키피오와 그의 동료 아홉 명은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말도 안 돼! 수적으로 열세였다고는 하지만 1천 기나 되는 기병이 저렇게 무기력하게 전멸당하다니!”

다른 십인대 동료들이 모두 패닉에 빠져있을 때 스키피오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가며 전황 전체를 눈에 담은 후 발부스에게 말했다.

“아직 포기하기는 이릅니다! 좌익의 우리 동맹군 기병대도 결국 전멸할 테지만, 조금은 더 시간을 끌어줄 겁니다! 그리고 보병 싸움은 예상대로 우리가 압도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독재관님이 적의 추격을 받게 되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뿐입니다!”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내 아들뻘인데도 대단한 통찰력이구나! 지금부터 너에게 우리 십인대의 지휘를 맡기겠다! 어서 앞장서서 우리를 이끌어라!”

“알겠습니다! 먼저 루레티 강을 따라 몰래 적 본대의 후방으로 돌아가시죠!”

말을 마치고 스키피오는 대열의 선두에 서서 십인대원들을 이끌고 적 본대의 후방을 향해 말을 달렸다.

한편 스키피오가 자신의 뒤로 돌아가고 있을 때 한니발은 중앙의 로마 군단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적을 짓밟아라!”

한니발이 전투코끼리 부대에게 공격명령을 내리며 자신도 수루스를 적의 경보병 벨리테스들에게 몰아갔다.

- 뿌우우우우!

갈리아 보병 본대의 바로 좌측과 우측에 10기씩 배치된 코끼리들이 우레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코끼리가 달려온다! 모두 좌우로 흩어져서 투창을 던져라!”

한니발의 앞을 가로막은 벨리테스들은 능숙한 움직임으로 코끼리의 돌진을 피하며 투창을 던졌다.

그러나 그들이 티베리우스에게 받은 대 코끼리 전술훈련은 갑옷을 입지 않은 기존의 카르타고 코끼리 부대를 상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많은 투창이 코끼리에게 날아들었지만, 대부분 두꺼운 철갑에 막혀 힘없이 튕겨 나왔다.

- 뿌우우우우!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귀에 창을 맞아 상처를 입은 코끼리가 긴 코를 힘껏 휘두르자 거기에 얻어맞은 벨리테스 세 명이 공중을 날았다.

“으아아아아악!”

한니발은 코끼리 부대로 적의 경보병을 압도했지만, 반대로 중앙의 갈리아 보병들은 적장 티베리우스의 맹공에 점점 밀려나고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방패를 치켜들고 줄을 달아 목에 건 호루라기를 입에 문 채 로마 군단병에게 달려드는 갈리아 보병들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우와와아아아!”

갈리아 보병들은 추운 날씨에도 웃통을 벗은 채 손에 들고 눈앞의 적에게 무작정 달려들었다.

- 터엉! 터엉!

갈리아 보병들이 휘두른 도끼와 검이 적의 방패에 부딪치면서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로마 군단병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곧 지쳐버린 갈리아 보병들의 공격속도가 느려지자 티베리우스가 입에 문 호루라기를 힘껏 불었다.

- 삐이이이익!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지자마자 로마 군단병들은 일제히 손에 들고 있는 검을 방패 위로 내질렀다.

“커헉!”

목과 가슴을 찔린 갈리아 보병들이 힘없이 쓰러지자 티베리우스는 다시 한번 호루라기를 불었다.

- 삐이이이익!

사령관의 신호롤 듣고 적의 공격을 견뎌내느라 지친 전방의 로마 군단병들이 재빨리 후방으로 빠지면서 바로 뒷줄에 있던 군단병이 그 자리를 채워 넣었다.

한니발은 로마 군단병이 뛰어난 조직력으로 갈리아 보병을 예상보다 빨리 밀어내기 시작하자 급히 뿔나팔을 두 번 불었다.

- 뿌우우우웅 뿌우우우우웅

그 소리를 듣고 한니발의 군영에 남아있던 병사 두 명이 미리 준비한 봉화에 불을 붙였다.

하스드루발은 먼발치에서 피어오르는 봉화 연기를 보고 자신과 함께 덤불 속에 숨어있던 북아프리카 중기병 2천 기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다! 멍청한 로마인의 등짝에 바람구멍을 내주자!”

하스드루발은 호기로운 외침과 함께 기병대의 선두에 서서 전장을 향해 말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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