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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93화 (93/201)

[ 93 ] [92화] 격전의 트레비아 강 (4)

“대단한 저력이다! 스스로 지중해 최강의 중장보병대라고 자부할만하군!”

한니발은 저돌적으로 갈리아 보병을 밀어붙이는 로마 군단을 보고 식은땀을 흘렸다.

이미 바르카 가문의 기병 8천 기는 로마군의 기병 4천 기를 모두 전장에서 몰아내고 보병만으로 구성된 로마군 본대의 측면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이 오른 독재관 티베리우스의 군단은 멈출 줄을 몰랐다.

전황은 이제 한니발의 기병들이 로마 군단병을 먼저 포위하는지, 아니면 티베리우스의 군단병이 바르카 가문의 본대를 먼저 돌파하는지를 겨루는 시간 싸움이 되어 버렸다.

한니발 휘하의 갈리아 보병 중 몇 명이 겁에 질린 나머지 적에게 등을 보이고 전장을 이탈하려 했다.

“히익! 살려줘!”

“사람이 아니라 움직이는 벽하고 싸우는 것 같아! 여기서 죽을 순 없어!”

한니발은 그런 갈리아 병사들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같은 켈트족인 켈티베리아인은 저렇게 용맹하게 싸우고 있는데 아직 승산이 있는 전장에서 도망치려 해? 역시 갈리아인은 신뢰할 수 없는 족속이다.”

그는 전투코끼리 부대를 적의 본대에 돌진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적과 아군이 완전히 밀착해버린 상황에서 코끼리가 달려들면 오히려 아군이 거대한 짐승의 발에 짓밟혀 혼란에 빠져 버릴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한니발은 자신의 전투코끼리 수루스를 다른 병사에게 맡기고 지상으로 내려와 도망치는 갈리아 병사 중 한 명의 등을 검으로 베었다.

“끄아악!”

한니발은 갈리아 보병의 피가 묻은 외날검 팔카타를 앞으로 내밀면서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탈영병은 용서하지 말고 베어버려라! 곧 아군 기병이 적을 포위하니 전선을 유지해라!”

사령관의 명령에 갈리아 보병과 켈티베리아인 중보병의 후방에 자리 잡고 있던 북아프리카 중장보병들이 탈영병들을 가차 없이 베어버렸다.

곧 갈리아 보병들이 탈영을 멈췄지만, 바르카 가문의 본대가 로마 군단병에게 돌파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한니발은 동생이 정예기병 2천 기와 함께 매복해있는 남동쪽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스드루발. 빨리 와라. 이번 전투의 승패는 이제 너에게 달렸다.”

형의 바람대로 하스드루발은 휘하의 기병들과 함께 로마군의 후방을 향해 눈보라를 일으키며 바람같이 달려갔다.

적과의 거리가 50m 정도로 가까워지자 하스드루발은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기병대에게 손짓해 잠시 말을 멈추게 했다.

- 푸르릉

추운 날씨에 약 1km를 전속력으로 달려온 하스드루발의 애마 페라리가 투레질하며 코에서 담배 연기 같은 새하얀 콧김을 뿜어냈다.

그는 잠깐 숨 돌릴 틈을 가진 다음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말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부하들에게 외쳤다.

“모두 일렬로 늘어서서 돌격하라!”

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북아프리카 중기병들은 일렬횡대로 늘어서서 랜스를 앞으로 내밀고 적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격했다.

- 두두두두두두

2천 마리의 말이 네 다리를 열심히 휘저으며 얼어붙은 대지를 두들겨대자 전투의 북소리 같은 호쾌한 말발굽 소리가 전장을 가득 메웠다.

로마 군단의 최선임병인 트리아리들은 후방에서 자신이 나설 차례를 기다리며 앞만 보고 있다가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듣고 나서야 카르타고군의 기병이 뒤에서 돌진해 오는 것을 알아챘다.

“적 기병이 후방에서 몰려온다!”

로마군의 한 노병이 뒤를 돌아보며 동료들에게 닥쳐오는 위험을 알리자마자 2천 개의 랜스가 트리아리들의 등 뒤를 가차 없이 찔러왔다.

- 콰과과광!

전장의 최후방에서 고막을 찢을듯한 거대한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트리아리들은 로마 군단병 중에서도 가장 튼튼한 사슬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엄청난 질량으로 부딪쳐오는 북아프리카 중기병의 랜스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로마 군단의 최선임병 트리아리들도 창 하나에 아군 서너 명이 등과 가슴에 구멍이 뚫려 즉사하는 충격적인 모습을 보고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아악!”

“매복이다! 적이 후방에서 난동을 부린다!”

한니발은 천둥소리 같은 거대한 충돌음과 트리아리들의 비명을 듣고 하스드루발이 전장에 도착했음을 알아챘다.

“하스드루발! 드디어 도착했구나! 적의 후방을 공격하는 기병대에 보급품을 전달해라!”

한니발의 명령에 북아프리카 중장보병대의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짐마차 스무대가 랜스를 가득 싣고 전장을 우회해 아군 기병대를 향해 달렸다.

하스드루발과 북아프리카 중기병들은 로마군 진형 후방의 한쪽 귀퉁이를 완전히 무너뜨린 후 부러진 랜스를 버리고 뒤로 돌아가 한니발이 보내온 새 무기를 다시 집어 들었다.

“아버지께서 보급품을 빵빵하게 보내주신 덕에 이런 사치스러운 전술을 다 써보는구나! 모두 다시 돌격하라!”

하스드루발의 기병대가 다시 후방으로 짓쳐들어오자 트리아리들은 뒤로 돌아 손에 들고 있는 창을 비스듬히 겨누어 기병 돌격에 대응하려고 했다.

“모두 창을 사선으로 세우고 기수를 노려라!”

그러나 트리아리가 쓰는 2m짜리 창으로 5m가 넘는 랜스를 막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 투과과과과과곽!

다시 한번 끔찍한 충돌음이 트레비아 강 변을 가득 메우자 드디어 로마군의 후방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으아악! 살려줘!”

“비켜! 좀 비켜보라고!”

후방의 로마 군단병들이 하스드루발의 기병대로부터 도망가려고 앞에 있는 병사들을 밀치기 시작하자 로마군의 진형은 급속도로 무너져 갔다.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군대가 한니발에게 완전히 포위됐음을 알아차리고 전멸만은 피하려고 발버둥쳤다.

“하스타티를 뒤로 빼고 프린키페스를 앞으로 내보내라!”

그는 신병인 하스타티들을 뒤로 보내고 로마군의 실질적인 주전력 프린키페스를 최전방에 세웠다.

“밀어붙여라!”

수년간의 군 복무 경험과 젊은이의 체력을 모두 가진 프린키페스들이 이미 지쳐버린 갈리아 보병을 방패벽으로 밀어붙였다.

“로마놈들 아직도 이런 힘이 남아있다니!”

“진형이 돌파당한다! 모두 막아!”

갈리아 보병들은 아군 기병이 적을 섬멸하는 것을 보고 다시 사기가 오른 상태였기 때문에 로마의 독재관에게 그리 쉽게 길을 내주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로마 군단병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사력을 다해 검을 휘두른 끝에 갈리아 보병의 진형 한가운데에 작은 활로를 뚫는 데 성공했다.

티베리우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최대한 많은 병사를 탈출시키려고 분투했다.

“카르타고군의 진형에 구멍이 뚫렸다! 적이 다시 틈새를 메꾸기 전에 어서 탈출하라!”

로마 군단병들은 함성을 지르며 독재관의 뒤를 따라 마지막 활로를 향해 달려나갔다.

“우와아아아아!”

마침내 티베리우스가 대열의 선두에서 직접 적에게 검을 휘둘러 가면서 간신히 한니발의 포위망을 빠져나왔을 때, 그의 곁에 있는 병사는 고작 5천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꾸물거릴 틈이 없다! 적장의 기병대가 우리 뒤를 쫓기 전에 눈앞에 있는 루레타 강을 건너서 플라켄티아로 후퇴한다!”

살아남은 로마군 병사들은 10kg짜리 방패 스큐툼을 버리고 젖먹던 힘을 다해 루레타 강으로 달려갔다.

원 역사에서는 트레비아 전투에서 패배한 로마군 중 약 6천 명은 집정관인 티베리우스와 함께 무사히 플라켄티아까지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지금은 로마군 패잔병의 앞길에 소복이 쌓인 눈 속에는 어제 하스드루발이 뿌려둔 마름쇠가 기다리고 있었다.

“끄아아아아악!”

패잔병의 선두에서 달려가던 티베리우스와 로마 병사 수십 명이 제일 먼저 마름쇠를 밟고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한니발은 함정이 가득한 눈밭을 눈앞에 두고 머뭇거리는 적들을 끝장내기로 마음먹었다.

“투석병! 후방의 적 패잔병을 향해 발사!”

그의 명령에 발레아레스 투석병 4천 명이 던진 납덩이가 로마군 패잔병들에게 빗발쳤다.

- 퍼억!

- 까앙!

더는 서 있을 힘도 남아있지 않았던 패잔병들은 투구나 등을 향해 번개같이 날아온 납덩이를 맞고 앞으로 넘어졌다.

“으아악!”

티베리우스는 휘하의 병사들이 볏짚처럼 쓰러져가는 와중에도 자신의 발에 꽂혀있는 마름쇠를 침착하게 뽑아냈다.

“크윽!”

그는 끔찍한 고통을 참아내며 간신히 터져 나오는 비명을 삼켰다.

티베리우스는 발바닥을 다쳐 더는 걸어갈 수 없었지만, 루레타 강을 향해 필사적으로 기어갔다.

“크아악!”

그가 배를 바닥에 밀착시키고 팔과 다리를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사방에 널려있는 마름쇠에 팔과 다리를 긁히고 찔려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티베리우스는 자기 주변의 눈이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로 빨갛게 물들어가는데도 마치 바다로 돌아가려는 바다거북처럼 포기하지 않고 팔다리를 움직였다.

“적장 한니발에게 독재관의 목을 전리품으로 내줄 수는 없다! 죽을 때 죽더라도 적의 구경거리가 되느니 강에 떠내려가는 편이 낫다!”

그러나 그는 루레타 강에서 몇 발짝 남지 않은 곳에서 드디어 모든 기력을 다 소진하고 그 자리에 멈춰버리고 말았다.

“여기까지인가... 내가 모자라서 3만이 넘는 병사들이 포로가 되거나 목숨을 잃었구나. 부하들의 복수를 할 기회도 얻지 못하고 스틱스 강을 건너게 생겼으니 이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티베리우스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조용히 눈을 감으려는 찰나, 누군가 피로 물든 패장의 겨드랑이를 붙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독재관님! 티베리우스 독재관님! 정신 차리십시오! 여기서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독재관님의 죽음은 로마의 죽음이나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티베리우스는 멀어져 가는 자신의 의식을 붙잡으려는 청년의 목소리에 감겨있던 눈을 떴다.

그러자 그의 눈에 아침에 자신이 배를 걷어찬 병사 스키피오의 얼굴이 들어왔다.

“넌... 돌아가신 푸블리우스 집정관님의 아들이 아니냐? 난 이미 틀렸다. 너라도 어서 도망가라. 꼭 로마를 지킬 장군으로 성장해서 카르타고인에게서 조국 로마를 지켜다오.”

“헛소리 그만하시고 제 뒤에 타십시오! 출혈이 심한 게 걱정되긴 하지만, 근육을 많이 다치진 않으셨습니다. 적장 한니발과 전투를 치를 때마다 집정관급 장수들이 줄줄이 스틱스 강을 건너시면 로마에 미래는 없습니다! 저 같은 젊은이들이 경험을 쌓기도 전에 적장 한니발이 로마에 입성해 버리고 말 거라고요!”

스키피오의 당찬 꾸짖음에 점점 빛을 잃어가던 티베리우스의 눈동자가 다시 조금씩 기운을 되찾아갔다.

“네 말이 맞다! 로마의 임페리움(군사지휘권)을 부여받은 순간부터 내 목숨은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병사! 날 살려서 이 전장을 빠져나가라! 난 살아서 원로원에 오늘의 패배를 보고할 의무가 있다!”

“알겠습니다! 말 등위에 올려드릴 테니 제 허리를 꽉 붙잡으셔야 합니다!”

스키피오는 십인대장 발부스의 도움을 받아 독재관을 자신의 말에 태웠다.

그 후 말에 오른 그는 자신의 뒤에 탄 티베리우스가 두 팔로 자신의 허리를 붙들자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와 비슷한 상황이구나.”

그러나 스키피오에게는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벌써 그의 뒤에서 이베리아족 중기병들이 독재관을 사로잡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이 추격해온다! 모두 플라켄티아로 후퇴하라!”

스키피오는 십인대 대원들에게 퇴각 명령을 내린 후 고삐를 움켜쥐고 플라켄티아를 향해 말을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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