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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95화 (95/201)

[ 95 ] [94화] 북이탈리아의 통치자 하밀카르

기원전 218년 11월 말, 마실리아에 머물고 있던 하밀카르는 한니발이 보낸 승전보를 받아들고 뛸 듯이 기뻐했다.

“드디어 내 아들들이 로마 정벌의 첫걸음을 내디뎠구나! 한니발의 군대가 로마의 독재관 티베리우스의 4만 대군을 궤멸시키고 로마의 식민지 플라켄티아를 점령했다고 한다! 장하다! 내 새끼들!”

마침 카르타고 노바에서 보급품을 가지고 떠나 마실리아에 도착한 공정한 하스드루발이 하밀카르의 말에 맞장구쳤다.

“그러게 말이에요! 북이탈리아를 제패하는 건 아무리 빨라도 내년 초는 되어야 할 줄 알았는데 말이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것도 훌륭하지만, 그 거친 갈리아인들을 설득해 우리 편으로 만든 게 더 대단하네요!”

“위대하신 바알 함몬께서 우리 가문을 도우신 덕분이겠지. 아무래도 내가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을 만나러 가봐야 할 것 같다. 슬슬 로마 원정대에 보급품을 전달해야 할 때도 됐고 예상보다 일찍 북이탈리아와 남부 갈리아 해안 지대를 정복했으니 전략을 다시 한번 짜야 할 필요가 있을 테니 말이다.”

“아무래도 그럴 필요가 있겠지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아버지. 동생들에게 제 안부 좀 전해주시고요.”

“그래. 내가 없는 동안 히스파니아를 잘 부탁한다.”

하밀카르는 공정한 하스드루발과의 대화를 마치고 본국 카르타고 정부에 서신을 보내 기쁜 소식을 알린 후 즉시 한니발에게 전달할 보급품을 말과 노새가 끄는 수레에 싣기 시작했다.

그는 수레에 짐을 싣는 병사들을 직접 지휘 감독하며 하스드루발이 요청한 물품 중 빠진 것은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 특이하게 생긴 화살은 잘 챙겼구나. 아르키메데스의 불꽃은 특히 조심스럽게 운반해야 한다. 불똥이라도 잘못 튀었다간 함께 옮기던 군량까지 순식간에 재가되어 버릴 수가 있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하밀카르는 세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북이탈리아의 도시 플라켄티아로 향했다.

마실리아에서 플라켄티아 까지는 직선거리로도 약 400km나 떨어져 있고 계절이 한겨울이라 자주 눈이 내렸기 때문에, 하밀카르는 한달 내내 행군한 끝에 플라켄티아의 성문 안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하밀카르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마중 나온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아버지를 맞이했다.

하스드루발이 방금 말에서 내린 아버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포옹하며 말했다.

“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하필 제일 추울 때 오시는 바람에 고생 많이 하셨겠어요!”

“우리 작은 하스드루발! 겨우 9개월 만에 더 늠름해졌구나! 오는 길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알프스 산맥을 넘은 너희만 했겠느냐? 평지로만 행군해서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마고와 아우니아 처제는 사이가 안 좋은 타우리니족과 인수브레스족을 화해시키느라 오늘 회담을 열어야 해서 내일이나 도착할 거라고 해요.”

“마고도 이제 한 사람 몫을 제대로 해내는구나. 다 한니발과 네가 잘 이끌어 준 덕분이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자 한니발도 아버지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아버지. 먼 길 오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건강해 보이셔서 마음이 놓이네요. 날이 추운데 어서 실내로 들어가시지요.”

“한니발!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조금 야위었구나! 그런데 네 말대로 이 동네 겨울이 춥긴 춥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하밀카르와 그의 두 아들은 한니발의 공격에 겁을 먹은 로마인들이 버리고 간 플라켄티아의 주택 중 한니발이 임시 사령부로 쓰고 있는 저택으로 들어갔다.

한니발이 시중을 드는 병사에게 간단한 주안상을 내오게 하자 세 사람은 술잔을 주고 받으며 신나게 회포를 풀었다.

“아버지! 대체 어떻게 마실리아 같은 대도시를 그렇게 빨리 점령하셨나요? 정말 대단하세요!”

“너와 아르키메데스가 개발한 신무기가 없었으면 그보다 시간이 훨씬 오래 걸렸을 거다. 그 덕분에 거의 피해 없이 로마와 마실리아의 연합 함대를 불살라버릴 수가 있었지.”

한창 대화가 무르익었을 때 한니발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 그런데 물자 수송을 부관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굳이 이 먼길을 오신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저희를 보고 싶으신 것 말고 다른 이유도 있을 것 같은데요.”

“내 정신 좀 봐라! 신나게 얘기하다 보니까 본론을 잊어버리고 있었구나. 다른 게 아니고 너희와 로마 정벌 전략에 대해서 상의하러 왔다.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이냐?”

아버지의 입에서 ‘로마’라는 단어가 나오자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의 눈빛이 달라졌다.

한니발이 하밀카르의 질문에 대답했다.

“사실 처음에는 잠시 재정비 시간을 가진 다음 봄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남부 이탈리아를 향해 출발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트레비아 강 변에서의 전투가 끝나고 며칠 지나고 나니까 감기몸살에 걸려 쓰러지는 병사가 너무 많이 생겨서 계획을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랬겠지. 나도 여기까지 오는 길에 수송대의 병사들이 계속 몸살이 나는 바람에 일정이 꽤 지연됐다. 원래는 이십일만에 도착할 계획이었는데 한 달이나 걸려버렸지.”

지중해성 기후인 이탈리아에는 겨울이 시작되는 11월부터 봄이 끝날 때까지가 1년 중 가장 강수량이 많은 계절이다.

다만 이 시기의 이탈리아 반도의 날씨는 한국의 장마철과는 달리 몇 달에 걸쳐 거의 매일 눈이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경우가 많아 한니발의 병사들은 알프스를 넘은 뒤 야외활동을 할 때마다 옷이 축축하게 젖는 날이 많았다.

거기에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일부 갈리아인을 제외하면 사시사철 눈 구경할 일이 없는 곳에서 나고 자란 자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얼음이 얼 정도로 추운 날씨에 격렬한 전투를 치른 한니발의 병사들이 몸살이 도져 앓아누운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스드루발이 푸념을 늘어놓는 아버지와 형에게 말했다.

“실레노스에게 병법을 배울 때 웬만하면 겨울에는 전쟁을 벌이지 말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겠네요. 로마군이 아직 저번 전투에서 잃은 병력을 보충하기 전에 남진하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내년 봄이 되고 난 뒤에 다시 전쟁을 시작하는 게 좋겠어요.”

하밀카르가 고개를 돌려 하스드루발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너희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석 달이나 되는 시간을 그냥 보내버리면 안 된다. 이번에 너희가 정복한 북이탈리아의 거점에 요새를 짓고 병력을 배치해 우리 가문의 세력을 제대로 다져놔야 한다.”

“저도 그 방법을 꽤 오래 검토해봤어요. 하지만 그 역할을 해낼 지휘관이 없습니다. 마고가 지휘관으로서 많이 성장하긴 했지만, 집정관급 지휘관이 이끄는 로마 군단에게서 북이탈리아 전체를 지켜내는 건 아직 역부족일 거예요.”

한니발도 동생의 의견에 찬성했다.

“작은 하스드루발의 말이 맞습니다. 북이탈리아에 병력을 더 남긴다고 해도 마고가 지켜낼 수 있는 건 타우리니족의 영역 정도일 겁니다. 괜히 요새를 짓느라 물자와 병사들의 기력만 소모해 버리는 게 아닐지 걱정됩니다.”

원 역사에서 마고는 2차 포에니전쟁 초기부터 한니발과 함께 원정길에 올랐다.

그는 형 한니발의 곁에서 알프스를 넘고 칸나에 전투 승리까지의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지만,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인 형의 뛰어난 전략과 전술을 끝내 익히지 못했다.

한니발은 하스드루발과 같은 미래의 지식은 없지만, 막냇동생의 한계를 특유의 관찰력으로 꿰뚫어 보았다.

그 결과 그는 이탈리아 북부에는 보급망을 간신히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필요 최소한의 영토만 차지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하밀카르의 생각은 두 아들과 조금 달랐다.

“내가 북이탈리아에서 마고와 함께 세력을 다지면 문제없을 거다. 사실 그럴 생각으로 서둘러 플라켄티아에 왔단다.”

하스드루발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아버지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네? 그럼 마실리아는 누가 지키나요? 큰형 혼자서는 히스파니아를 지키면서 보급품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벅찰 텐데요.”

하스드루발의 질문에 하밀카르가 대답했다.

“걱정마라. 본국에 계신 네 장인어른 하스드루발 기스코 의원님께 갈리아 남부 총독 자리를 맡아달라고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수락하셨다. 내가 이탈리아 북부에 자리 잡고 있으면 너희들이 이탈리아 남부로 떠나도 이탈리아 북부의 로마 동맹도시들에게 계속 압박을 가할 수 있을 거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기쁜 표정을 지으며 감탄했다.

“정말 훌륭한 계책입니다 아버지! 어쩌면 전쟁 초기부터 로마연합에서 이탈하는 도시들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요!”

“형 말대로예요! 게다가 아버지 말씀대로만 된다면 적어도 로마 원정대가 이탈리아 중부를 지날 때까지는 보급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하밀카르도 기뻐하는 아들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로마 원정대가 이탈리아 남부의 곡창지대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이 아비가 뒤를 받쳐주마! 너희는 그저 로마군을 무찌를 궁리만 열심히 해라!”

* * *

하밀카르가 두 아들과 오랜만에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로마의 일곱 언덕에는 복수의 칼날을 가는 로마인들로 가득했다.

약 한 달 전 독재관 티베리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바르카 가문의 군대에 최악의 패배를 당한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노한 로마 시민들은 로마 시내 곳곳에 모여서 한니발을 저주하고 패장 티베리우스를 조롱했다.

그런 분노한 로마 시민 중 평민 남자 두 명이 서민들이 자주 드나드는 로마의 선술집인 타베르나에 모여 싸구려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빌어먹을 카르타고놈들! 듣자 하니 미리 우리 군대 후방에 복병을 숨겨놓고 전투가 한창일 때 갑자기 등 뒤를 공격했다는군! 비열한 암살자처럼 말이야!”

“적장 한니발은 로마에서는 아직 대대장이나 재무관 정도나 하고 있을 나이라고 하더라고! 아직 서른 살도 안 됐다고 하더라? 그런 새파란 애송이가 속인다고 속는 티베리우스가 멍청한 거지! 그런 모자란 인물을 독재관이라고 뽑은 원로원도 등신이고!”

“내 말이! 제대로 된 장군이 군단을 맡아서 카르타고군과 전면전을 벌이면 무적의 로마 군단이 질 이유가 없어! 이번 전투에서도 보병 간의 싸움에서는 우리가 우세했었다잖아!”

티키누스 전투와 트레비아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와 한니발의 군대에게 포로로 잡힌 로마 시민권자는 약 2만 1천 명.

동맹도시 인구를 제외한 로마시민의 1%가 넘는 많은 인원이 죽거나 노예로 팔려나간 완패였지만, 로마인들은 쓰디쓴 패배를 순순히 인정하지 않고 정신승리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복병이 없었으면 로마군이 이겼다.

보병전에서 만큼은 로마군이 우세했다.

티베리우스가 한니발의 전략에 휘말리지 않아 로마 군단병들이 강을 건넌다고 찬물에 몸을 담그지 않았으면 이겼다.

로마인들은 귀족 평민 할 것 없이 문제의 본질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다양한 변명거리를 창작해냈다.

그러나 이런 로마인들의 자기 위안을 얻기 위한 무의식적인 노력이 그저 쓸모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그 스키피오라는 병사의 활약이 정말 대단했다던데?”

“어느 스키피오? 스키피오 가문의 남자들이 어디 한두 명이냐?”

“얼마 전에 전사한 집정관 푸블리우스의 아들 말이야. 아직 열여덟 살밖에 안 된 일개 병사가 저번 전투에서 다 죽어가는 독재관을 구해냈다더라고!”

“뭐? 그게 말이 돼? 그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건 몇백 명 밖에 안된다고 하던데? 아직 어린 신병이 무슨 수로?”

“전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기가 막히게 빨리 눈치채고 십인대장을 설득해서 독재관을 구하러 가자고 설득했다더라! 요즘 마르스 광장에 나가면 그 이야기를 안 하는 사람이 없어!”

“스키피오 가문이 명장을 배출하기로 유명한 이유가 다 있었네! 선임병들도 줄줄이 죽어 나간 전장에서 제 한 몸 챙기기도 힘들었을 텐데 독재관을 구해? 그 친구 전쟁의 여신 미네르바께 사랑받고 있는 게 분명하군!”

“그러게 말이야! 그 친구 그 공로를 인정받아서 이번에 대대장으로 승진했다더라! 이런 유망한 젊은이들이 계속 나오는 이상 우리 로마가 카르타고 따위에게 질 일은 없어!”

원 역사보다 더 뛰어난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의 활약은 역사를 휘젓는 나비의 날갯짓이 되어 미래의 숙적 스키피오가 일찌감치 로마인들의 주목을 받게 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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