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 [95화] 이탈리아 남부로!
하밀카르가 막내 마고와 함께 이탈리아 북부에 요새를 건설하며 세력을 다지는 동안 어느덧 소빙하기의 혹독한 겨울이 물러가고 기원전 217년의 봄이 찾아왔다.
마침내 바르카 가문의 로마 원정대가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해 이탈리아 남부로 진군할 때가 된 것이다.
아버지와 막냇동생이 북부 이탈리아에 방어선을 구축하는 동안 하스드루발과 한니발은 플라켄티아에서 남동쪽으로 약 100km쯤 떨어져 있는 도시 보노니아에서 겨울을 났다.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남진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보노니아까지 마중을 나온 아버지와 마고, 그리고 제수인 아우니아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마고는 이번에도 두 형만 떠나보내는 게 못내 아쉬웠는지 한니발에게 말했다.
“형. 역시 나도 함께 갈게. 앞으로 계속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 텐데 장수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편이 좋지 않겠어?”
“네 지휘력은 아직 기병대장인 마하르발이나 아즈루바알에게도 미치지 못한다. 아버지께서 보노니아 주변 지역을 지키시는 동안 넌 플라켄티아와 타우리니 족의 영토를 지키고 수송대를 지휘해줘. 그게 더 도움이 될 테니까.”
“어...?”
안 그래도 마고는 어린 시절부터 전장에서 영웅적인 활약을 보여온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에게 남몰래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아직 20대 초반인 마고는 형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시무룩해 지고 말았다.
“그래... 어차피 나 같은 거 형들을 따라가 봐야 별 도움도 안될 거야...”
이제 페니키아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아우니아가 남편을 면전에서 타박한 한니발을 매섭게 째려보았고 하밀카르도 괜히 헛기침하며 한니발을 나무랐다.
“크흠....한니발. 좀 말이 심하구나.”
훈훈했던 출정식의 분위기가 알프스의 만년설처럼 싸늘해지자 하스드루발도 당황하고 말았다.
‘아이고! 저 인간이 또 평범한 사람 마음을 모르고 무표정으로 막말을 해대는구나! 뭐 서른 살 먹도록 주변에서 천재로 치켜세워 줬으니 저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만.’
하스드루발은 황급히 마고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시 분위기를 띄워보려고 노력했다.
“마고야! 풀 죽을 거 없어! 전쟁에서 제일 중요한 건 병참이야! 한니발 형은 너한테 그 중요한 임무를 맡기고 싶은 거고.”
“위로해줘서 고마워 형. 나도 도움이 되도록 노력할게.”
결국 하스드루발은 약간의 찝찝함을 남기고 한니발과 함께 원정길에 올랐다.
그는 보노니아에 남은 가족들의 얼굴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멀어지자, 한니발에게 따졌다.
“아 형! 눈치 없이 애한테 그렇게 심한 말을 하면 어떻게 해! 안 그래도 마고는 자기 전공이 적은 걸 꽤 신경 쓰고 있다고!”
“나도 알아.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마고는 어떻게든 우리를 따라가려고 했을 거야. 걔는 어렸을 때부터 의외로 끈질긴 구석이 있거든.”
“그럼 마고가 풀이 죽을 걸 알면서 그런 소리를 했단 말이야?”
“그래. 앞으로의 원정길은 알프스를 넘을 때보다 더 위험할 거야. 미숙한 장교가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 줄 여유는 없어.”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좀 너무했어.”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의 말에 강하게 반박할 수가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가 데려가는 병사는 원 역사와 비슷한 규모지만, 로마는 원 역사와 달리 히스파니아 원정을 포기하고 이탈리아와 지중해 방위에 병력을 집중할 수도 있어. 이제부터는 사소한 실수 하나가 원정대의 전멸로 이어질 수도 있으니 아직 미숙한 고급장교를 데려가는 건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야.’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하밀카르가 이탈리아 북부를 통치하기로 한 덕분에 더 원활한 보급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지만, 로마군의 공격으로부터 새로 얻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 알프스를 넘은 8만 명의 정예병력 중 4만 명을 후방에 남겨야만 했다.
대신 한니발은 로마에 복수하길 원하는 갈리아인 중에서 가장 뛰어난 귀족 전사 1만 명을 합류시켜 총 5만 명으로 로마 원정대를 꾸렸다.
병사 5만 명은 기원전 3세기 지중해 세계의 어지간한 나라는 손쉽게 정복할 수 있는 대군이지만, 미래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하스드루발에게는 한니발의 군대가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원 역사의 로마는 기원전 206년에 병사를 18만 5천 명이나 굴리고 있었지. 2차 포에니전쟁을 치르는 동안 로마측 전사자가 30만 명이나 됐는데도 말이야. 오죽하면 그리스의 명장 피로스가 로마를 계속 머리를 베어도 금방 다시 자라나는 신화 속의 괴물 히드라에 비유했겠어. ’
하스드루발은 한니발과 함께 나란히 대열의 선두에서 말을 타고 행군하다가 고개를 돌려 형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결국 형 말대로 하는 수밖에 없겠네.”
“뭘 말이야?”
“로마를 공격하기 전에 형 말대로 로마연합을 먼저 붕괴시킨다는 전략 말이야. 우리 가문의 병력을 전부 이탈리아에 쏟아부어도 비 온 다음 날 숲에서 자라는 버섯처럼 솟아나는 로마군을 다 때려잡는 건 불가능하겠어.”
“그 문제에 관해서는 늘 의견이 반만 일치하는군. 적어도 이번 전쟁에서는 로마를 직접 공격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돼.”
“아이고... 역시 아직 로마에서 공성전을 치를 생각은 없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우리 가문과 동맹을 맺기 시작하면 로마 원로원은 어쩔 수 없이 나에게 강화를 요청해 올 거야. 이번 전쟁의 목적은 로마와 강화조약을 맺고 연합 맹주의 권위를 잃은 이빨 빠진 늑대 로마를 서서히 굶겨 죽이는 거다.”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의 말을 듣고 한숨을 쉬었다.
‘형이 다른 부분에서는 내 말을 참 잘 들어주는데, 군사전략에 관해서는 절대 의견을 굽히지 않는구나.’
하스드루발은 끝내 이번 전쟁의 마지막에 로마를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여야 한다는 자신의 전략을 군략가로서의 자부심이 강한 한니발에게 이해시키지 못했다.
로마인들이 아직 카르타고군을 얕보고 있듯이 주도면밀한 한니발도 원 역사에서처럼 공화국 로마의 전력은 정확하게 파악했지만, 로마인의 저력은 과소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상황은 이미 하스드루발의 예상범위 안의 일이었다.
‘한니발 형을 설득할 수 있었으면 제일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뭐. 인류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라는 사람이 자기 분야에서 부리는 고집을 어떻게 꺾겠어. 지금은 행군과 전투에만 집중하자. 칸나에 전투 이후에 내가 본국에 가서 제해권을 확보하고 병력과 공성 무기를 가져오는 방법도 있으니까.’
다행히 로마 공성전에 대한 의견과는 달리 남부 이탈리아 정복 전까지의 계획에 대해서는 두 형제의 생각이 완전히 일치했다.
한니발이 한숨을 푹푹 쉬어대는 동생에게 말했다,
“로마를 공격하는 문제는 남부 이탈리아를 정복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다. 지금은 다음 전투를 준비하는 게 더 중요해.”
“미리 상의한 대로 다음 전장은 무조건 에트루리아 지역으로 선택하는 게 좋겠어. 우리가 거기 나타나면 로마인들이 기절초풍할걸?”
“그렇지. 아펜니노 산맥에서 평야 지대로 향하는 길이 여섯 갈래나 되니까 가장 험한 길을 골라서 행군하면 로마군에게 발각되지 않고 에트루리아 지역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러려면 험한 산맥을 넘은 다음에도 습지를 건너야 해. 어쩌면 알프스 산맥을 넘을 때보다 더 고생할지도 모르니 각오를 다져야 한다.”
“적어도 거기에는 우리 머리 위에서 돌을 던져대는 산악 갈리아 부족은 없을 거야. 습지가 좀 걱정스럽긴 하지만, 내가 이것저것 준비해 온 게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역시 믿음직스럽구나! 그럼 어서 출발하자. 로마군이 우리 위치를 알아차리기 전에 서둘러 움직여야지.”
두 형제가 막 출발한 보노니아(현대의 볼로냐)에서 이탈리아 남부까지 가는 길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이탈리아 동부 해안 지대의 움브리아족의 영역을 지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조금 전 한니발이 말한 대로 현대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역에 해당하는 에트루리아 지역을 지나는 길이다.
움브리아족의 영역을 지나는 길은 좀 돌아가기는 하지만, 에트루리아 지역을 지나는 것보다 훨씬 편안하고 안전했다.
보노니아에서 남동쪽의 평야 지대를 지나 이탈리아 중북부 해안도시 아리미눔(현대의 리미니)에 도착한 이후 로마인들이 잘 닦아놓은 고대의 고속도로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남부 이탈리아까지 쾌적한 행군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니발의 남진을 예측한 로마 원로원이 그렇지 않아도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 쌓여있는 아리미눔에 많은 수비병력을 배치할 게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로마 연합의 지방도시 하나를 얻기 위해 시간과 병력을 소모해가며 공성전을 벌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원 역사에서 로마는 적어도 2개 군단을 아리미눔에 배치했다. 히스파니아에 원정군을 보내지 않은 지금은 그보다 많은 수비병력이 배치되어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두 형제가 선택한 길은 행군 도중 험난한 자연의 위협만 잘 견뎌내야 하겠지만, 5만 대군이 로마군에게 발각되지 않고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게다가 한니발의 군대가 에트루리아 지역을 약탈하면 움브리아족 영역을 공격하는 것보다 로마연합이 입게 될 손실이 훨씬 컸다.
로마는 인구가 많은 에트루리아 지역에서 약 5만 명의 보조병을 징집할 수 있지만, 척박한 움브리아족의 영토에서는 고작 2만 명 정도의 병사만 징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트루리아 지역을 완전히 박살 내면 로마가 징집할 수 있는 75만의 예비병력 중 5만 명이 증발해 버린다. 로마가 정신 못 차리는 틈을 타 더 로마연합에 원 역사보다 더 큰 피해를 줘야 해. 거인 로마를 쓰러트리려면 강력한 스트레이트 한 방도 중요하지만 자잘한 잽으로 데미지를 누적시키는 것도 중요하니까.’
하스드루발은 로마가 있는 남쪽을 바라보며 손등에 핏줄이 잡히도록 주먹을 세게 쥐었다.
* * *
한편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보노니아를 떠나기 몇 주 전부터 로마에는 새로운 집정관을 뽑기 위한 선거운동이 한창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선술집에 삼삼오오 모여 로마 군단의 자존심을 짓밟은 적장 한니발을 토벌할 인재가 누구인지를 두고 떠들썩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전직 독재관 티베리우스는 너무 성급하게 카르타고군을 공격하다가 새파랗게 어린 적장의 전략에 넘어가서 힘없이 져버렸잖아? 그럼 이번에는 신중한 인물을 집정관으로 뽑는 게 좋지 않을까? 원로원의 파비우스 의원은 어때?”
“파비우스? 자네 설마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파비우스는 신중하다 못해 느려 터졌어! 그 늙은이가 집정관이 되면 작년에 태어난 자네 딸이 시집갈 때까지 카르타고군이 이탈리아 안을 제집 앞마당 인양 휘젓고 다닐걸? 게다가 보병으로 복무해본 적 없는 귀족 놈들은 영 믿을 수가 없어.”
“그럼 누가 적격이라는 거야? 티베리우스도 평민 출신인데 죽다 살아왔잖아.”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님께서 이번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대. 그 양반이 곧 마르스 광장에서 연설한다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가서 들어 보자고.”
“평민의 영웅 플라미니우스? 그 분이라면 믿을만하지! 어서 가보자고!”
곧 로마 시민 수천 명이 플라미니우스를 보기 위해 마르스 광장에 모여들었다.
충분히 많은 군중이 모이자 미리 준비한 단상에 올라선 플라미니우스는 시민들의 면면을 바라보면서 환갑이 가까운 나이답지 않게 우렁찬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친애하는 로마의 평민 여러분! 여러분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15년 전 처음 호민관에 당선되어 정치에 발을 들인 후 로마를 평민이 행복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귀족들이 차지하고 있던 국유지를 평민 여러분께 돌려 드렸고 대농장을 경영하는 귀족들이 평민들의 생계수단인 해외무역에 관여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습니다! 그리고 5년 전에는 집정관에 당선되어 로마의 안녕을 위협하는 이탈리아 북부의 인수브레스족을 제 두 손으로 물리쳤습니다! 이제야 로마는 평민이 웃으며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아니, 되었었습니다. 간악한 카르타고인들이 우리의 영토를 침범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카르타고’라는 단어가 그의 입에서 나오자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플라미니우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열정적인 연설을 이어나갔다.
“적장 한니발은 비열한 수법으로 2만 명이 넘는 우리의 부모 형제를 살해하고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그 원수들이 이제 로마를 약탈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바로 몇 년 전 제가 건설한 ‘플라미니아 가도’를 타고 말입니다! 존경하는 로마의 평민 여러분! 제게 혈관 속에 흘러든 독극물처럼 로마로 쳐들어오는 외적을 물리칠 기회를 주십시오! 저를 집정관으로 뽑아 제 이름이 붙은 가도가 카르타고인의 군화에 짓밟히는 것을 막게 해주십시오!”
로마의 평민들은 플라미니우스의 연설에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다.
플라미니우스는 2위로 당선된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와 압도적인 표 차이를 보이며 1위로 당선되었다.
곧 두 로마의 집정관은 각각 2개 군단을 이끌고 한니발의 군대를 막기 위해 로마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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