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 [96화] 산 넘어 늪 (1)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에트루리아 지역을 다음 전장으로 선택한 후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남서쪽으로 향했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오랜만에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초원 지대를 행군하면서 기뻐했다.
“맨날 발목까지 빠지는 눈밭을 걷느라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는데, 여기는 정말 천국이 따로 없구나!”
“그러게 말이야! 이번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런 길만 걸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틀 동안의 행군 끝에 아펜니노 산맥의 초입에 다다랐을 때,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을 제외한 로마 원정대 전원은 맥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탈리바 반도를 종단하는 거대한 천연장벽 아펜니노 산맥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저거... 하여튼 한니발 장군님은 산맥을 너무 좋아하신다니까...”
“평지를 놔두고 왜 저 험한 산을 넘어야 하는 거지?”
한니발은 그런 병사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오늘은 일찌감치 숙영지를 짓는다. 그리고 인근 마을에 척후병을 보내 길잡이를 내게 데려와라.”
원 역사의 한니발은 전략과 전술을 짤 때 부하들과 전혀 상의하지 않고 오로지 혼자 생각해낸 작전으로 전투를 치르는 독불장군으로 유명했다.
그런 기질은 지금도 원 역사와 별로 다르지 않아 한니발은 하스드루발을 제외한 다른 부하 장수들에게는 전투에 대한 의견을 묻기는커녕 작전행동을 벌이기 직전에야 정보를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니발의 심복이자 기병대장인 마하르발은 섭섭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한니발에게 말했다.
“보노니아를 떠날 때 전투코끼리를 한 마리만 데려오신 이유가 있었군요. 미리 언질을 주셨으면 산악행군을 위한 준비를 더 철저히 했을 텐데 말입니다.”
“기밀을 아는 자가 적어야 정보유출을 막을 수 있지 않겠나. 자네의 충정을 믿고 있지만, 누구나 말실수는 할 수 있는 법이지.”
한니발의 말에 마하르발이 보기 드물게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로마 원정대원들의 섭섭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한니발이 인근 마을에서 차출한 길잡이가 병사들에게 험준한 아펜니노 산맥 너머에서도 도사리고 있는 더 큰 위험을 알려주면서 섭섭함을 느낄 겨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지금 이 지점에서 산맥을 넘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것도 이 많은 병사를 이끌고요? 저번 겨울과 올해 봄에는 유난히 많은 비가 내려서 산맥 너머에 있는 아르노 계곡은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곳곳에서 떠내려온 익사한 동물 주검이 썩어들어가면서 사방에서 악취가 진동하고 있지요. 보기보다는 지면이 단단해서 걸어 다닐 수야 있겠지만, 어딜 가나 허벅지까지 더러운 물이 차오를 겁니다.”
로마 원정대의 장교와 병사들은 나이 많은 길잡이의 말을 듣고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계곡이 아니라 늪지나 마찬가지잖아? 오오! 바알 함몬이시여!”
“무릎까지 물이 차오르는 곳에서는 어떻게 잠을 자야 하지?”
평소 과묵한 성격 때문에 거의 말이 없는 기병대장 아즈루바알까지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에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두 분 장군님의 판단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의견을 참고해주셨으면 합니다. 물이 범람한 계곡을 지나는 건 생각보다 대단히 위험합니다. 아펜니노 산맥을 가로지르는 로마인이 만든 다른 산길이 있는데, 에트루리아 지역의 평야 지대로 이어진다고 하니 그쪽을 지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즈루바알은 그의 우직한 성격대로 교과서적인 제안을 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그 안전하다는 길로 아펜니노 산맥을 넘으면 방어태세를 굳힌 로마 군단이 산악행군에 지친 아군을 맞이할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즈루바알이 말한 행군 루트의 끝에는 요새도시 아레티움이 버티고 있다. 원 역사대로라면 그곳에는 집정관이 지휘하는 로마군 2개 군단이 아펜니노 산맥의 도로만 노려보고 있겠지. 우리 병사들의 그림자만 보여도 지원군을 요청할 준비를 하면서 말이야.’
하스드루발이 부관들에게 늪지대를 지나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려는 찰나 한니발이 먼저 아즈루바알을 매섭게 노려보면서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자네의 의견을 물었던가? 생각은 내가 한다. 너희는 입을 다물고 대신 귀를 열어라. 내 말을 따르면 언제나 그 끝에는 승리가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더는 군말하지 않겠습니다. 알프스를 넘을 때처럼 고생 끝에 큰 승리가 있을 거라고 믿겠습니다.”
한니발이 단호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고 바르카 가문의 다른 장교와 병사들도 더는 불만을 내비치지 않았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형의 모습을 보고 그 유명한 ‘한니발 리더쉽’의 비결을 알 수 있었다.
‘21세기에 한니발 리더쉽이니 뭐니 하는 자기계발서 다 내다 버려야겠다. 타고난 카리스마를 어떻게 배워서 따라 할 수 있겠어? 여자에게 인기 있고 싶으면 잘생김을 배워야 한다는 거나 마찬가지인 소리지.’
한니발은 고개를 돌려 병사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어서 숙영지를 짓고 일찍 자라! 앞으로는 한동안 알프스를 넘을 때만큼 힘든 행군이 될 거다! 쉴 수 있을 때 쉬고 먹을 수 있을 때 먹는 것도 너희의 임무임을 잊지 마라!”
한니발의 명령이 떨어지자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해가 지기 전에 숙영지를 짓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다음날 해가 뜨자마자 군대를 이끌고 아펜니노 산맥을 오르기 시작했다.
길이 좁고 가파르긴 했지만, 험준한 알프스도 넘어본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무거운 장비를 착용하고 보급품을 실은 수레를 끄는 당나귀를 돌보면서도 그리 어렵지 않게 산악행군을 이어나갔다.
“이거 의외로 할 만한데?”
“그러게 말이야. 한니발 장군님께서 미리 너무 겁을 주셨나 봐. 길잡이한테 들었는데, 산길도 직선거리로는 150 스타디온(약 27km)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하더라.”
“정말? 그럼 한 사흘 정도면 산맥을 벗어나는 거네? 홍수가 났다는 아르노 계곡이 좀 걱정되기는 해도 하루 정도만 더 고생하면 다시 평지에 숙영지를 짓고 쉴 수 있겠다!”
하스드루발은 우연히 병사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한니발에게 말했다.
“형. 병사들이 아르노 계곡을 하루 만에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있는 것 같아. 이거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해주는 게 좋으려나?”
“미리 병사들의 사기를 꺾을 필요는 없지. 지금 알려주면 우리가 히스파니아에서 데려온 병사들은 몰라도 갈라아인 중에서는 산에서 내려가 다른 길을 찾아보자고 아우성을 치는 자들이 나올지도 몰라. 아펜니노를 넘으면 어차피 다들 알게 될 테니 그냥 아무 말 하지 말자.”
“와... 형 진짜 독하다. 허벅지까지 물이 차오르는 곳에서 3박 4일 행군해야 하는 걸 알면 병사들은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겠지.”
“로마군이 미리 구축해둔 방어선을 무모하게 들이받고 정말 죽어버리는 것보단 며칠 고생하는 게 더 낫지 않겠어?”
“그건 그렇지만... 아무튼, 늪지대를 건너는 동안 별일 없으면 좋겠다.”
“너답지 않게 너무 초조해하는구나. 알프스를 넘을 때도 그렇게 침착하더니 좀 이상한데? 혹시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어?”
그는 한니발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형에게 숨기는 게 뭐가 있겠어!”
한니발은 부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동생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는 했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이 추궁하지 않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휴... 하여튼 진짜 눈치 빠르다니까. 잘못하면 앞으로 이삼일 뒤에 한쪽 눈이 멀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말을 본인 앞에서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원 역사에서 한니발은 악취나는 늪지대를 건너다 그만 심각한 안염(眼炎)에 걸리고 만다.
그 뒤 한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은 후 그가 남긴 한마디가 아주 걸작이었다고 전해진다.
“나는 감은 눈으로 작전을 생각하고, 뜬 눈으로 적을 바라보겠다.”
하스드루발은 역사에 길이 남을 한니발의 명언이 증발해 버리는 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그래도 24년간 함께 지내온 형이 애꾸가 되어버리는 비극을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내가 준비한 대책이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정말 걱정된다. 뭐 일단 부딪쳐봐야지 어쩌겠어.’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낮에는 걷고 밤에는 천막을 칠 수 없는 좁은 계곡 길에서 담요를 덮고 보급품 수레에 등을 기대 잠을 청하며 드디어 이탈리아 반도의 등뼈 아펜니노 산맥을 넘었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앞으로 겪게 될 고생길에 대한 각오를 다지고 있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자연이 만든 지옥도를 혼이 나가버린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탄식했다.
“사실 우린 이미 저승에 와있는 거 아닐까?”
“씨부럴... 대체 저기를 어떻게 건너냐고! 똥물이 지중해의 수평선처럼 끝이 안 보이잖아!”
아르노 계곡에는 겨우내 쌓인 눈 녹은 물과 엄청난 양의 봄비에 산에서 쓸려 내려온 흙이 뒤섞인 걸쭉한 흙탕물이 넘실거렸다.
그 드넓은 흙탕물 호수에는 익사한 야생동물과 가축의 부패한 사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하스드루발은 불결하기 짝이 없는 광경에 헛구역질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우욱..... 얼마나 더러운 곳이길래 원 역사의 한니발 형이 며칠 만에 안염에 걸리나 궁금했는데 이건 상상 이상이다. 기적이 따로 있냐? 이렇게 세균이 득실거리는 환경에서 씻지도 못하고 오염된 음식을 먹고 병에 안 걸리면 그게 기적이지.’
고대 카르타고인은 로마인이나 그리스인처럼 목욕을 즐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모를 깔끔하게 하려는 경우나 목욕 자체를 취미로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청결한 위생상태가 질병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보다 약 1,500년 전의 사람인 한니발이 위생의 중요성을 알고 있을 리 만무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비누를 만들어 볼 걸 그랬나? 아니다. 바쁜 와중에 별로 돈도 안 되는 물건을 개발할 짬은 도저히 없었을 거야. 내가 준비한 것들이 병에 걸리는 병사를 줄여주길 바라는 수밖에.’
그는 늪이나 다를 바 없는 아르노 계곡에 들어서기 전에 미리 한니발과 상의한 대로 전군에 명령했다.
“모두 지금 가지고 있는 수통의 물을 전부 마셔버리고 대신 보급품을 실은 수레에서 꿀물을 가져다 채워 넣어라.”
하스드루발은 전생에서 얻은 지식으로 벌꿀이 살균과 항염증 효능이 뛰어나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비위생적인 아르노 계곡을 지나는 동안 로마 원정대가 먹고 마시는 모든 음식에 꿀을 첨가하기로 마음먹고 지난겨울에 원정을 준비하는 동안 대량의 꿀을 히스파니아에서 공수해왔다.
그는 병사들이 가죽으로 만든 수통에 꿀물을 채워 넣는 동안 한니발에게 말했다.
“형. 아르노 계곡을 지나는 동안은 하루에 세 번 얼굴에 꿀을 발라줘. 특히 눈에는 꼭 바르고.”
“뭐? 난 이집트의 공주가 아니라 전장에 나선 사령관이다. 지휘관이 피부미용 따위를 신경 쓰고 있으면 병사들이 날 어떻게 보겠어?”
“바로 그 고대 이집트에 내려오는 꿀하고 기름을 섞어서 만든 연고가 있다더라고. 원래는 상처에 바르는 약이지만, 염증 예방에도 도움이 된대. 내가 넉넉하게 만들어 왔으니까 꼭 틈틈이 발라.”
“그런 거라면 크게 이상할 건 없겠구나.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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