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 [97화] 산 넘어 늪 (2)
한니발은 병사들이 수통에 꿀물을 채우는 작업이 끝나고 나서 행군 대열을 재배치했다.
“갈리아인 병사들은 대열의 중앙으로 이동하고 최후미에서는 누미디아 궁기병이 후방을 경계하면서 행군한다.”
한니발은 후방경계를 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 고통스러운 행군을 견디지 못한 갈리아인 병사들이 탈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누미디아 궁기병을 대열의 최후미에 배치한 것이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자 드디어 로마 원정대는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이제 내년이면 쉰 살이 되는 바르카 가문의 가정교사 실레노스는 끝없는 흙탕물을 바라보며 울상이 되었다.
“젊은 시절에도 겪어보지 못한 고난을 손주를 볼 나이에 경험하게 됐군요. 한니발 장군님. 혹시 제가 행군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더라도 부디 제가 집필 중인 ‘로마 원정기’를 완성해 주십시오.”
“스파르타에서 태어난 사람이 무슨 겁이 그렇게 많은가? 이 한니발에게 병법을 가르친 가정교사가 흙탕물 따위에 쓰러질 리 없네.”
“죽음이 두려운 건 아닙니다. 다만 저는 창과 방패 대신 잉크 묻은 깃털을 손에 든 지가 벌써 이십 년이 넘었습니다. 체력이 젊은 시절 같지 않아서 이번 행군을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뿐입니다. 혹시 제가 잘못되더라도 두 장군님의 활약을 역사에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왜 코끼리를 한 마리만 데려왔겠나? 어서 수루스의 등에 오르게. 신분이 다르다고는 해도 스승의 발을 흙탕물에 젖게 할 수는 없지.”
“그럼 저 때문에 수루스를 데려오셨다는 말씀인가요? 해방 노예 한 명을 위해 코끼리를 데려오시다니! 신들께서도 장군님의 관대함을 아름답게 여기실 겁니다!”
한니발은 수루스의 등에 설치한 상교에 실레노스를 태우고 자신도 코끼리의 목에 올라탔다.
한니발은 수루스를 대열의 선두로 몰아가서 멈춘 후 병사들에게 말했다.
“모두 전진하라! 너희는 이미 적대적인 부족의 위협과 뼛속까지 얼려버릴 것 같던 만년설을 뚫고 알프스를 넘었다! 범람한 계곡물 따위가 우리 앞길을 막을 수는 없다! 이 늪지대를 벗어나면 풍요로운 에트루리아 땅이다! 적에게 승리를 거두고 전리품을 얻고 싶은 자는 내 뒤를 따르라!”
한니발은 연설을 마치고 수루스를 몰아 흙탕물이 넘실대는 남쪽으로 향했다.
사령관의 연설을 듣고 사기가 오른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군말 없이 그의 뒤를 따라 갖가지 오물이 떠다니는 더러운 물에 발을 담갔다.
로마 원정대는 당나귀를 탄 현지인 길잡이의 안내를 받으며 조금씩 전진했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습지였던 아르노 계곡이 절대 인간에게 친절하지 않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으아아아악!!”
도망가는 노새를 붙잡기 위해 대열에서 벗어난 리비아인 병사 한 명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순식간에 머리까지 물에 잠겨버렸다.
그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허벅지까지 밖에 잠겨있지 않았던 전우가 갑자기 물속으로 가라앉자 당황한 나머지 안절부절못했다.
“우왓! 저 친구 갑자기 왜 저래!”
“몰라! 모두 조심해! 발밑에서 뭔가가 잡아당기나 봐!”
하스드루발은 후방에서 병사의 비명이 들려오자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병사가 늪에 빠졌잖아! 모두 정지! 행군을 멈추고 발밑을 조심해라!”
그는 급히 전군을 그 자리에 멈추게 하고 애마 페라리의 등에서 뛰어내리면서 지신의 바로 뒤에 있는 병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거기 너! 가서 빨리 밧줄 가져와!”
늪에는 점토가 많은 늪과 수분이 많은 늪 두 가지가 있다.
전자는 빠져나오기 어려운 대신 몸이 천천히 가라앉고 후자는 비교적 빠져나오기 쉽지만 한번 빠지면 순식간에 머리까지 잠겨 버린다.
그렇지만 후자도 팔이나 다리에 갈대나 수생식물이 걸리면 혼자 힘으로는 빠져나오기 어렵다.
하스드루발은 그런 사실까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손만 내민 채 허우적거리는 병사의 모습을 보고 서두르지 않으면 그가 곧 익사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밧줄 가져왔습니다!”
그는 지시를 받은 병사가 가져온 밧줄을 받아들고 잽싸게 늪에 빠진 병사의 손을 향해 던졌다.
늪에 빠진 병사는 자신의 오른손에 부딪힌 밧줄을 온 힘을 다해서 움켜쥐었다.
하스드루발은 그 모습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패닉에 빠져 있는 부하들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뭣들 하고있냐! 모두 밧줄을 잡고 잡아당겨야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하스드루발이 두 손으로 쥐고 있는 밧줄을 그와 함께 움켜쥐었다.
“당겨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밧줄을 붙잡은 하급장교 기스코와 병사 다섯 명이 줄다리기하듯 힘차게 줄을 잡아당겼다.
“영차!”
다행히 늪에 빠진 병사는 전우들의 도움으로 다시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콜록! 콜록! 콜록!”
하스드루발은 연신 기침을 해대며 흙탕물을 토해내는 병사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와 함께 밧줄을 잡아당긴 기스코가 말했다.
“장군께서 일개 졸병을 위해 몸을 던지시다니! 정말 감동했습니다!”
평소의 하스드루발 이었으면 머쓱한 표정을 지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열에서 벗어나지 마라! 길잡이가 알려주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면 또 늪에 빠지게 될 거다!”
병사들은 죽다 살아난 동료의 핼쑥한 몰골을 보고 앞사람의 등만 보며 오와 열을 철저하게 지켜 행군했다.
더는 병사가 늪에 빠지는 사고가 나지는 않았지만, 아르노 계곡의 습지는 다양한 방법으로 로마 원정대를 괴롭혀왔다.
그중 하나는 습기와 따듯한 봄 날씨 때문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해충의 습격이었다.
“앗 따가워! 팔은 모기에게 뜯기고 다리는 거머리에게 물리고! 로마군과 싸우기 전에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서 죽게 생겼구나!”
병사들은 모기를 막기 위해 몸에 기름을 바르고 다리에 천을 두르고 끈으로 묶었지만, 물속과 공중에서 끊임없이 몰려드는 해충을 전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병사들을 괴롭히는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아! 아껴뒀던 빵에 벌써 곰팡이가 피었잖아!”
“습지에서 올라오는 독기 때문에 음식이 빨리 상하나 봐. 그거 절대 먹지 말고 바로 버려. 이 와중에 배탈 나서 낙오하면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야.”
“여기선 불을 피워서 죽을 끓일 수도 없는데 큰일 났네! 가지고 온 음식은 죄다 순식간에 썩어버리고! 정말 미치겠다!”
“어쩌겠어. 소금에 절인 채소나 먹으면서 계속 걷는 수밖에.”
안 그래도 힘든 행군을 부실한 식사로 버텨야 한다는 소문이 전군에 들불처럼 번져나가자, 로마 원정대의 사기는 곧 바닥을 치게 됐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풀이 죽어있는 병사들을 보면서도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지난겨울 보존 기간이 긴 견과류에 식품의 부패를 막는 꿀과 소금, 그리고 인도에서 수입한 버터를 첨가한 음식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내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지.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강행군하려면 잘 상하지 않으면서도 열량이 높은 음식이 필요할 게 뻔하니까. 다들 내가 가져온 허니버터아몬드를 한번 먹어보면 깜짝 놀랄 거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자 하스드루발이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보급품 수레에 실어둔 나무통을 열고 식량을 배급해라. 불에 익혀 먹을 필요 없는 음식이니 바로 먹으면 된다.”
절인 채소나 질긴 육포 따위를 씹게 될 줄 알았던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뜻밖의 별미를 먹어보고는 환호성을 질러댔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늪지대에서 먹게 될 줄이야!”
“하스드루발 장군님! 이건 대체 뭐라고 부르는 음식입니까? 달면서도 짭짤한 게 입에서 아주 살살 녹네요!”
“내가 새로 만든 음식인데, 앞으로 허니버터아몬드라고 불러라.”
물론 하스드루발의 신메뉴는 여러 가지 첨가물이 더 들어간 현대의 허니버터아몬드와 같은 맛을 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고대에는 꿀을 분말 형태로 만들 기술이 없기 때문에 꿀에 버터와 소금을 넣은 시럽에 아몬드를 담근 것뿐이어서 죽처럼 숟가락으로 퍼먹어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2% 부족한 듯한 어설픈 맛도 단 음식을 구경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고대인을 매료시키기에는 충분했다.
한니발도 처음에는 전장에 무슨 달달한 음식을 가져왔느냐며 눈살을 찌푸렸지만, 허니버터아몬드를 한 개 먹어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흐음... 나쁘지 않은 맛이군. 병사들이 단 음식을 먹으면서 나약해질까 봐 걱정되긴 하지만, 상한 음식을 먹고 낙오해 버리는 거보다는 훨씬 낫겠지. 하스드루발. 정말 잘했다.”
“그게 다야? 방금 눈 커지는 거 다 봤다고. 사실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란 거지? 기다려봐. 좀 더 가져올게.”
“누가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는 거냐? 하스드루발. 미식은 그리스인의 나약한 풍습이야. 사람은 살기 위해 먹어야지 먹기 위해 살면 안 되는 법이다.”
“그래? 알았어. 그럼 형은 소금에 절인 순무하고 육포를 먹어. 안 그래도 병사들이 허니버터아몬드만 먹으려고 해서 순무하고 육포는 많이 남을 것 같거든.”
순간 한니발은 입을 다물고 뭔가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하스드루발은 형이 극심한 내면의 갈등을 느끼고 있음을 알아챘다.
잠시 후 한니발이 다시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열 개만 더 가져다줘.”
“열 개? 순무를 열 개나 먹으면 배가 빵빵해질 걸?”
“다 알면서 왜 그렇게 심술궂게 구는 거냐?”
“알았어. 안 그럴게. 처음부터 그렇게 솔직하게 말했으면 얼마나 좋아?”
하스드루발은 이미 단짠의 매력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된 한니발을 보면서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스드루발이 가져온 허니버터아몬드와 꿀물은 그의 예상대로 행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은 병사들의 사기가 조금 오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오염된 음식을 먹고 탈이 나는 병사가 거의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가 조금 전 한니발의 반응을 보고 떠올린 아이디어가 더해지자 로마 원정대의 행군속도는 원 역사보다 훨씬 빨라졌다.
하스드루발은 대열의 선두에서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최대한 빨리 이 거지 같은 습지를 벗어나자! 모두 길잡이의 뒤를 따라 진군하라! 엄살을 피우면서 행군을 방해하는 자는 매끼 마다 허니버터아몬드 대신 소금에 절인 순무만 먹게 될 것이다!”
그의 외침을 듣고 점심을 먹은 후 죽은 동물 사체 위에 드러누워 쉬고 있던 병사들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강행군을 시작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도 너무 하시지! 이 지옥 같은 곳에서 그딴 걸 먹다 보면 지쳐 쓰러지기 전에 미쳐버리고 말 거야!”
“다들 일어나라! 죽은 사슴 위에 누워서 순무 씹지 말고 빨리 습지를 벗어나 숙영지 천막에서 편히 쉬자고!”
하스드루발의 활약 덕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원 역사보다 하루 더 빠른 2박 3일 만에 아르노 계곡을 빠져나왔다.
마침내 평야 지대에 들어선 병사들은 초췌한 몰골로 환호성을 질러댔다.
“드디어 빠져나왔다!”
“해냈다! 그저 땅에 풀이 나 있을 뿐인 초원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한니발은 즉시 척후병을 보내 깨끗한 물이 흐르는 냇가를 찾아낸 후 그 옆에 숙영지를 지었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흐르는 물에서 온몸에 묻은 오물을 씻어낸 후 거의 일주일 만에 죽은 동물의 사체 대신 침낭에 누워 편안하게 잠을 잤다.
그날 밤 실레노스는 자신의 숙소에서 등불을 켜고 깃털에 끝에 잉크를 묻혀 ‘로마 원정기’를 집필해 나갔다.
‘독기로 가득 찬 늪지대도 바르카 가문에서 가장 뛰어난 두 형제가 지휘하는 로마 원정대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한니발 장군의 단호한 명령에 허벅지까지 차오른 더러운 물에 발을 담근 5만 명의 병사들은 하스드루발 장군의 지혜 덕분에 큰 피해 없이 단 사흘 만에 위험한 습지를 벗어났다. 그 과정에서 하스드루발 장군이 보인 지도력은 대단히 인상 깊었다. 하스드루발 장군은 숙련된 기수가 말의 고삐를 잡고 다루듯 순무를 채찍으로 삼고 허니버터아몬드라는 별미를 당근으로 삼아 병사들의 위장을 휘어잡으며 군대를 평야 지대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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