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 [98화] 에트루리아 초토화 작전
실레노스가 열심히 로마 원정기를 집필하고 있을 때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의 막사에 찾아가 형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니발은 동생이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자 왠지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뭐야? 대체 왜 그래?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어? 아니야. 뭐 묻은 거 없어. 형. 그런데 말이야. 혹시 한쪽 눈이 따갑다거나 간지럽다거나 하지는 않아?”
“전혀. 설마 그거 물어보러 이 밤 중에 찾아온 건 아니겠지?”
“그거 물어보러 온 거 맞아. 그럼 난 이만 자러 갈게.”
하스드루발은 황당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한니발을 뒤로한 채 지휘관 막사 밖으로 나왔다.
그는 자기 막사로 돌아온 다음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형 눈이 멀쩡하다! 꿀로 만든 고대 이집트 연고 효과 죽이네! 좀 더 만들어서 앞으로 생길 부상병들 상처에도 발라야겠어!”
몇 번이고 역사를 바꿔온 그였지만, 죽을 운명이었던 아버지를 살려냈을 때를 제외하면 그처럼 기쁜 적은 없었다.
하스드루발은 그가 사서 고생을 하는 이유가 가족과 고향을 지키기 위함임을 다시 한번 느꼈다.
“확실히 이제 역사의 흐름이 카르타고의 승리 쪽으로 물길을 돌려가고 있는 것 같다. 원 역사의 바르카 가문의 남자들은 거의 다 칼 맞고 죽었지만, 바뀐 역사에서는 전부 손주들 얼굴을 보면서 지내다가 침대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을 거야!”
그는 다시 한번 로마를 정복할 것을 다짐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 * *
로마 원정대가 아르노 계곡을 건넌 다음 날의 해가 밝았지만,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숙영지를 걷지 않고 이틀 더 그곳에 머물기로 했다.
험한 산맥을 넘고 늪지대를 건넌 병사들을 좀 더 쉬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사들이 이탈리아 중부의 따듯한 봄 햇살을 만끽하며 풀밭에서 뒹구는 동안에도 바르카 가문의 두 형제와 장교들은 쉴 틈이 없었다.
그날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어갈 즈음에 기병대장 마하르발은 이번 행군 도중 원정대가 입은 인적·물적 자원의 손실을 재빨리 파악해 한니발에게 보고했다.
“한니발 장군님께 보고드립니다. 아펜니노 산맥과 아르노 계곡을 지나는 동안 병사 일흔두 명이 사망했고 병에 걸리거나 다친 자는 약 백오십 명입니다. 다만 사상자는 대부분 갈리아인 이어서 히스파니아에서 데려온 정예병은 거의 손실이 없습니다.”
“자네가 말한 것보다 최소한 다섯 배는 더 죽을 거로 예상했는데, 하스드루발 덕분에 불필요한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군.”
“장군님 말씀대로입니다. 다만 말과 당나귀의 손실은 적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인간은 정신력으로 고난을 견뎌낼 수 있지만, 짐승은 그럴 수 없으니까. 그래서 잃어버린 말은 몇 필이나 되나?”
“말 오백 필이 늪지대를 건너는 도중 병에 걸려 죽거나 도망가 버렸습니다. 수레를 끄는 당나귀도 천 마리 정도 잃었습니다.”
하스드루발은 병사들이 늪지대를 지나는 동안 먹을 식량을 직접 개발하기까지 했지만, 말이나 당나귀가 먹을 여물에까지 부패를 막기 위해 조치를 하지는 못했다.
말 한 마리가 하루에 먹는 여물과 곡식은 전장에 나선 병사 한 명의 하루 식량 배급량보다 일곱 배나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로마 원정대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가축을 잃었지만, 그 손실은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의 예상을 넘지는 않았다.
“그 정도 손실은 이 지역을 지키고 있는 로마군을 물리친 후 얻은 전리품으로 보충하면 되겠지. 그러니 지금 당장 정찰병을 내보내 인근 지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쉬고 있는 병사 중 기운을 차린 자들을 추려내 기스코에게 맡겨 정찰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후 마하르발은 즉시 척후병과 기병대를 남쪽으로 보내 인근의 지형과 에트루리아 지역 어딘가 주둔하고 있을 로마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사흘 뒤 정찰을 나갔던 하급장교 기스코가 돌아와 지휘관 막사에서 한니발에게 보고했다.
“한니발 장군님께 보고드립니다. 우리 군의 숙영지에서 남쪽은 넓은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고 인근 주민의 말에 의하면 남동쪽으로 백 스타디온(약 180km) 이상 떨어져 있는 곳에는 구릉 지대와 거대한 호수가 있다고 합니다.”
“로마군의 동향은 어떤가?”
“로마의 집정관 플라미니우스가 지휘하는 로마군 이만 오천 명이 이곳에서 남동쪽으로 약 오십오 스타디온(약 100km) 떨어진 곳에 있는 아레티움에 주둔하고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편한 길로 아펜니노 산맥을 넘을 줄 알고 그곳에 군대를 배치한 모양이군. 그 외에 다른 로마 군단에 대한 정보는 없나?”
“임무 수행 도중 마주친 로마군의 척후병 이백 명과 전투를 벌여서 승리했는데, 그 과정에서 포로 다섯 명을 붙잡았습니다. 그자들을 심문해 정보를 캐보겠습니다.”
“알았다. 수고 많았다.”
보고를 마친 기스코가 경례를 하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한니발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상의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 동생의 얼굴을 바라보다 흠칫 놀라고 말았다.
하스드루발이 이미 승리한 장수처럼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 역사대로 플라미니우스가 집정관에 당선됐군! 하긴 로마의 장수 중에서 그동안 쌓은 전공만 놓고 보면 죽은 티베리우스를 제외하면 그 양반을 넘는 사람은 한 명도 없겠지!’
후세의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자신의 저서에 플라미니우스를 무능하고 성급한 지휘관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현대의 역사가들은 그런 폴리비오스의 박한 평가는 스키피오 가문의 후원을 받는 그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위대함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했다고 보고 있다.
사실 플라미니우스는 6년 전 쉰 살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이탈리아 북부의 대부족 인수브레스족을 정벌하여 큰 승리를 거두고 개선식을 치를 정도로 뛰어난 무장이다.
그러나 그는 일전에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에게 패한 티베리우스처럼 기존의 로마군이 사용하는 획일적인 전략과 전술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하스드루발은 플라미니우스를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아레티움에서 유인해 회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한니발이 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활짝 웃고 있는 걸 보니 필승전략이라도 떠오른 모양이지?”
“바로 맞췄어. 내가 알기로 적장은 우직하고 견실한 명장이야. 일전에 맞붙었던 독재관 티베리우스보다는 신중하겠지만, 제대로 된 전략을 짜고 저 아레티움 성벽 밖으로 유인해 내면 그리 어렵지 않게 잡아낼 수 있을 거야.”
“나도 인수브레스족 출신 병사들에게 적장 플라미니우스에 대해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지. 아마 네 말이 맞을 거다. 다른 로마 집정관의 군대도 지금쯤이면 이탈리아 동부해안도로를 지키고 있을 테니 금방 플라미니우스를 지원하러 오려면 적어도 일주일 이상 걸리겠지.”
“맞아. 남쪽 평야 지대에 있는 에트루리아인들의 마을과 농장을 약탈하면 적장을 도시 밖으로 유인할 수 있을 거야.”
“좋은 생각이다. 이번에는 적장을 놓치지 말고 꼭 처치하자.”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했다.
“적군은 섬멸해야겠지만, 적장은 되도록 놓아주는 편이 좋겠어.”
“뭐? 적장을 놓아주자고? 제정신이야? 적장은 로마의 장수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자야. 그런 자가 전사하면 로마연합의 결속이 적지 않게 흔들릴 거다. 왜 이런 기회를 포기하자는 거지?”
“플라미니우스가 죽고 나면 아주 골치 아픈 자가 로마의 독재관이 될 확률이 커. 파비우스 막시무스라는 로마 원로원 귀족파의 중진인데, 그자가 로마의 군권을 장악하고 나면 로마군은 회전을 피하면서 청야전술을 펼치기 시작할 거야. 하지만 플라미니우스는 이번 전투에서 살아나가면 다시 우리에게 회전을 걸어올 게 분명해.”
공화정 시절의 로마 원로원은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걸 꺼렸기 때문에, 카르타고처럼 계파 수장 격인 인물은 따로 없었다.
그렇지만, 로마 원로원에도 귀족파와 평민파라는 계파는 존재했고 각 계파에는 연륜과 실적을 인정받아 특히 시민들에게 존경받는 중진 의원들이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2차 포에니전쟁 전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중진 의원은 평민파의 플라미니우스와 귀족파의 파비우스였다.
파비우스는 원 역사에서 전술지휘 능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지만, 한니발의 군대를 이탈리아 남부에 고립시켜 말려 죽인다는 작전을 처음으로 생각해낸 뛰어난 전략가로 유명하다.
원 역사의 한니발은 트라시메노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며 적장 플라미니우스를 사살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평민파의 상징적 인물인 플라미니우스가 허무하게 죽자 주전론자가 대부분인 평민파는 원로원에서 입지가 좁아지고 로마의 방패 파비우스가 본격적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하스드루발은 일부러 적장을 놓아줘서라도 스키피오에 버금가는 숙적의 등장을 늦추고 싶었다.
한니발은 다른 부관이 그런 제안을 했으면 역정을 냈겠지만, 열 살 때부터 첩보와 외교 실무를 처리해온 하스드루발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청야전술이라... 누만티아를 점령할 때 아레바키족이 식량을 전부 불태우면서 도망가는 바람에 고생을 많이 했었지. 그 정보는 확실한 거겠지?”
“적장이 죽으면 열에 아홉은 내 말대로 될 거야.”
하밀카르의 활약으로 당장은 로마 원정대가 육로로 원활한 보급을 받을 수 있긴 했지만, 그건 아직 한니발의 군대가 이탈리아 중북부 지역에 머물고 있고 로마가 카르타고군을 얕보는 바람에 적은 수의 군단만 모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니발의 군대가 이탈리아 남부로 진격하고 로마 원로원이 본격적으로 군단병을 징집해 10만 명이 훨씬 넘는 로마군이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어슬렁거리기 시작하면 예전만큼 육로보급이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럴 때 로마군이 회전을 피하면서 청야전술을 펼치는 것은 한니발로서는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이었다.
“후우... 네 말은 잘 알겠어. 그렇지만 인수브레스족 출신 병사들이 이 사실을 알면 당장 탈영해 버릴지도 몰라. 너도 알다시피 그자들은 대부분 플라미니우스에게 고향을 잃고 복수의 칼을 갈며 우리 군대에 합류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둔 방법이 있어. 일단 플라미니우스에 대한 건은 나한테 맡기고 적장을 성 밖으로 끌어내는 게 우선이야.”
“알겠어. 그럼 나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에트루리아인의 마을을 습격할게. 그동안 너는 남은 병사를 데리고 남쪽에 새로운 숙영지를 짓도록 해.”
“그럴게. 아마 다른 집정관의 군대는 플라미니아 가도가 시작되는 아리미눔에 주둔하고 있을 거야. 말을 타면 사흘밖에 안걸리는 거리니까 서둘러야해.”
* * *
다음날 한니발은 에트루리아인의 마을을 습격하기 위해 기병대장 마하르발과 아즈루바알에게 병사 4만 명을 숙영지 밖에 집결시키게 했다.
병사들이 모두 모이자 한니발이 애마 부케팔로스의 등 위에서 연설을 시작했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이여! 적장 플라미니우스는 아직 우리가 습지를 넘어 자신들의 영토에 들어선 줄도 모르고 있다고 한다! 이제 아레티움에서 엉덩이를 뭉개고 있는 로마인들에게 우리의 존재를 알릴 때가 되었다! 적에게 식량과 병사를 제공하는 에트루리아인들의 마을을 마음껏 약탈하고 불태워라! 우리의 앞길을 막는 자들의 최후를 전 지중해에 보여줘라!”
사령관의 연설에 고통스러운 행군을 참아낸 병사들이 승리와 전리품에 대한 갈망을 담아 우레같은 함성을 질렀다.
“우와아아아아아아!”
“가자! 풍요로운 에트루리아 땅이 눈앞에 있다!”
그러자 한니발은 대열의 선두에서 사기가 하늘을 찌를듯한 병사들에게 명령하며 말을 달려나갔다.
“진격하라!”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무방비하게 풀을 뜯는 양 떼를 습격하는 사자무리처럼 에트루리아의 푸른 초원으로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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