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 [99화] 플라미니우스의 분노
에트루리아인들은 천연장벽 아펜니노 산맥을 담장으로 삼고 로마라는 강력한 동맹국을 둔덕에 약 170년 전 갈리아인의 침략을 받은 이후로는 오랫동안 평화를 누려왔다.
그런 그들에게 갑작스럽게 나타난 한니발은 적이라기보다는 자연재해에 더 가까웠다.
한니발은 매서운 눈빛으로 목책조차 없는 에트루리아인들의 마을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이여! 마음껏 날뛰어라! 저항하는 자는 죽이고 모든 마을과 농장을 약탈하고 불태워 버려라! 너희가 못 보고 지나친 밀가루 한 포대가 로마군의 입에 들어갈 빵이 됨을 잊지 마라!”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무서운 기세로 번져나가는 들불처럼 비옥한 평야 지대 곳곳에 자리 잡은 에트루리아인의 마을과 농장을 습격했다.
곧 병사들은 굶주린 사자처럼 눈에 보이는 민가마다 들이닥쳐 금 장신구와 은 접시를 빼앗고 외양간과 목장에서 소와 양을 끌고 나갔다.
노도와도 같은 습격이 시작된 지 겨우 사흘 만에 에트루리아 전역에 화염과 비명으로 가득했다.
카르타고군의 공격에서 간신히 도망친 에트루리아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울부짖었다.
“끼아아아악!”
“로마군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왜 동맹이 공격당하는 데 가만히 있는 거냐고!”
에트루리아인들이 노예처럼 끌려가며 눈물 흘리고 있을 때 플라미니우스와 로마군 병사들은 분통을 터뜨리며 아레티움의 성벽 위에서 불타는 동맹의 마을과 농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잔악한 놈들! 불타지 않은 마을이 하나도 없구나!”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시여! 부디 제가 카르타고인들의 심장에 검을 꽂을 수 있게 하소서!”
특히 에트루리아 출신 보조병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마을이 불타는 장면을 보다 못해 집정관 플라미니우스에게 달려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했다.
“집정관님! 언제까지 저 도적 무리의 횡포를 지켜만 보고 계실 겁니까! 당장 성문을 열고 나가서 싸워야 합니다!”
“제발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제 가족들이 사는 마을이 마른 장작처럼 불타고 있단 말입니다!”
“자네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렇지만 오늘 아침 적의 기병대와 교전을 치른 후 간신히 살아 돌아온 정찰병의 말에 따르면 적의 규모는 5만 명 이상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아군보다 두 배나 많은 적과 엄폐물도 없는 평야에서 싸우는 건 자살 행위다.”
“그럼 계속 보고만 있을 겁니까! 저곳이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였어도 그렇게 멍청히 보고만 있을 거냔 말입니다!”
악에 받친 에트루리아 보조병은 눈에 핏대를 세우고 집정관 플라미니우스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그를 호위하고 있던 릭토르 열두 명이 나무 다발에 도끼를 묶어놓은 파스케스를 치켜들며 병사를 위협했다.
“무엄하다! 일개 병사가 감히 집정관님께 대들어? 집정관님! 당장 이자를 끌고 가 군법대로 채찍형에 처하겠습니다!”
라틴어로 플라젤라티오라고 부르는 고대 로마의 채찍형은 잔인하기로 유명하다.
플라젤라티오는 작은 납덩이나 날카로운 뼛조각을 매단 여러 갈래의 가죽끈으로 이루어진 채찍으로 죄인을 후려치는 형벌이었는데, 그 채찍에 여러 차례 얻어맞고도 살아남은 자가 많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성을 잃고 집정관에게 고함을 질렀던 에트루리아 출신 병사도 죽음의 공포를 마주하자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지며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플라미니우스는 가족과 고향을 잃은 병사를 굳이 처벌하고 싶지 않았다.
“그만둬라. 에트루리아는 로마에 이백 년이나 신의를 지켜온 우리의 오랜 동맹이다. 저들이 로마의 징집에 응하는 대신 고향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우리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 저렇게 화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집정관이 말리자, 릭토르들도 파스케스를 거두고 더는 에트루리아 보조병을 추궁하지 않았다.
플라미니우스는 주변이 조용해지자 자신의 주변으로 몰려든 에트루리아 병사들의 면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 고향에 대한 일은 진심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회전을 벌이면 적이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발을 디디는 셈이다. 아침에 파발을 띄워 아리미눔에 계신 세르빌리우스 집정관님께 지원군을 요청했으니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보자.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께 맹세코 적장 한니발의 목을 베 오랜 동맹 에트루리아의 한을 풀겠다.”
집정관의 말을 듣고 에트루리아 보조병들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병영으로 돌아갔다.
플라미니우스는 소란을 피우던 병사들이 가고 나서 고개를 돌려 불바다가 되어버린 푸른 초원을 노려보면서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건방진 카르타고놈들! 감히 이 플라미니우스의 얼굴에 먹칠하다니!”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는 58년을 살아오면서 평민만이 역임할 수 있는 관직인 호민관으로 정치 생활을 시작해 집정관은 물론이고 로마인들이 명예로운 경력의 정점으로 여기는 감찰관까지 역임했다.
게다가 그는 불과 6년 전 로마인이 최고의 명예로 여기는 개선식을 거행한 경험도 있었다.
한마디로 플라미니우스는 이미 로마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예를 누린 자였다.
플라미니우스는 그처럼 영광과 명예로 가득한 자신의 경력을 조국을 침범한 외적을 격퇴한 후 한 번 더 개선식을 거행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제 명예로운 경력의 막바지에 ‘패장 플라미니우스’라는 얼룩이 묻게 생긴 것이다.
플라미니우스는 즉시 부관들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아리미눔 주둔군에게서 답장이 오면 바로 출진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어라! 교활한 적장 한니발도 두 집정관이 지휘하는 네 개 군단에게 앞뒤로 포위당하면 당해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 * *
약탈을 마친 한니발의 군대는 많은 양의 전리품을 실은 수레를 끌고 숙영지로 돌아갔다.
형의 군대가 약탈을 하는 사흘 동안 하스드루발이 동남쪽에 새로운 숙영지를 지었기 때문에 한니발은 그리 오래 행군하지 않고 금방 숙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니발은 갑옷을 벗자마자 기병대장 마하르발을 불러 잔치를 열게 했다.
“병사들이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으니 이번에 전리품으로 얻은 소와 양을 잡아서 배불리 먹이도록 하게. 대신 술은 물을 많이 섞은 포도주만 조금씩 마시도록 자네가 잘 관리하고.”
“알겠습니다. 장군님.”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오랜만에 술과 모닥불에 구운 고기를 먹으며 웃고 떠들었다.
“로마 군단병이 지중해 최강이라더니 별거 없네! 자기네 앞마당에 우리가 이렇게나 활개를 쳤는데도 성벽 위에서 멀뚱멀뚱 쳐다보는 꼴이라니!”
“누가 아니래! 요 며칠간 얻은 전리품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면 나한테 시집오겠다는 처녀들이 줄을 서겠어!”
병사들이 잔치를 즐기는 사이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지휘관 막사에서 다음 작전을 논의했다.
한니발은 정찰병의 보고를 토대로 실레노스가 파피루스에 그린 에트루리아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다음 전장은 트라시메노 호수로 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군.”
“내 생각도 같아. 플라미니우스는 아리미눔에 있는 세르빌리우스의 군대와 함께 우리를 협공하려고 할 거야. 놈들이 생각하는 집결지는 아마 트라시메노 호수 남동쪽에 있는 페루시아 정도가 되겠지. 그러니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우리 군대의 뒤를 따라올 게 분명해. 호수 근처에 있는 언덕 위에서 매복해 있다가 로마군을 포위하면 손쉽게 물리칠 수 있을 거야.”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게다가 이번에 새로 구한 길잡이가 트라시메노 호수 근처에는 요즘 밤에 안개가 자주 낀다고 하더군. 로마놈들은 안갯속을 걷다 어디서 날아온 지도 모르는 화살을 맞게 되겠지. 어서 움직이자. 시기를 놓치면 포위당하는 건 우리가 될 테니까.”
말을 마친 한니발이 지도를 돌돌 말려고 할 때, 하스드루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적 대열 맨 앞부분을 포위할 부대는 갈리아 병사로만 구성하자!”
“갈리아 병사로? 갈리아인은 전선 유지력이 약해서 로마 군단병이 강하게 밀어붙이면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그래야 플라미니우스가 살아서 도망갈 확률이 높아지잖아.”
“적장 플라미니우스를 살려 보내서 지구전주의자가 로마의 독재관이 되는 걸 막겠다는 그 작전 말이구나. 다시 묻지만, 정말 확실한 정보겠지?”
“위대하신 바알 함몬께 맹세코 확실한 정보야.”
“그래. 그렇다면 네 생각대로 해봐.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자.”
말을 마치고 한니발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하스드루발이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소란을 피웠다.
“잠깐 기다려봐! 나한테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뭔데?”
“기왕이면 이쪽으로 올 집정관 세르빌리우스의 군대도 전멸시켜 버리자!”
한니발은 동생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원 역사에서 한니발은 세르빌리우스가 동료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를 지원하러 올 것을 예상하고 그 길목에 기병대장 마하르발이 지휘하는 군대를 매복시켜 두었다.
그 결과 마하르발은 보병보다 먼저 플라미니우스를 도우러 가던 로마 기병대 4천 기를 전원 사살하거나 포로를 잡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집정관 세르빌리우스는 자신의 기병대가 전멸한 것을 알고 남은 보병 약 2만 명을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가 한니발을 돕는 북부 이탈리아의 갈리아 부족을 토벌하는 데 주력한다.
한니발이 그런 세르빌리우스를 그냥 내버려 둔 이유는 그의 군대를 마저 섬멸하려고 쫓아가다가는 남부 이탈리아를 공격할 시기를 놓치게 되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한니발도 원 역사와 생각이 별로 다르지 않았다.
“물론 적의 병력을 이만 명 이상 더 줄여둘 수 있으면 좋긴 하지. 그렇지만, 제법 먼 거리에 있는 적을 추적할 시간은 없을 것 같다.”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 보노니아에 계신 아버지께서 지원군을 제때 보내주시면 적장 세르빌리우스의 군대를 앞뒤에서 포위할 수 있어. 우리가 트라시메노 호수로 출발할 때 파발을 띄워서 아버지께 원군을 요청하면 아마 이삼일이면 보노니아에서 도착할 거야.”
“하스드루발. 기발한 생각이긴 하지만, 네 말대로 적장 세르빌리우스의 군대를 포위하려면 보노니아에서 출발한 지원군이 적어도 오십오 스타디온(약 100km)은 행군해야 할 거야. 말을 타면 이틀도 안 걸릴 거리지만, 보병은 최소 닷새는 쉬지 않고 걸어야 도착할 거리지. 그때쯤이면 적장은 다시 아리미눔의 성벽 속으로 숨어 버린 후일 거다. 그리고 우리 보병이 적을 추격하기에도 거리가 꽤 멀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럼 아버지께 기병만 보내달라고 부탁하면 되잖아? 우리 쪽에서도 내가 누미디아 궁기병만 데리고 가서 아버지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적의 퇴각을 방해하고 말이지. 그동안 형은 계속 남쪽으로 진군하면 되잖아. 두 집정관의 군대가 전멸하면 잠시나마 이탈리아 반도 안의 로마 야전군이 완전히 증발해 버릴 거야.”
하스드루발의 말에 한니발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맙소사! 기병만으로 적의 중장보병대를 상대할 생각을 해내다니! 궁기병만으로는 무리일 수도 있겠지만, 중기병과 궁기병이 잘 협력하면 안 될 것도 없겠어! 하스드루발! 정말 대단한 전술을 생각해냈다!”
하스드루발은 형의 칭찬에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생각해낸 게 아니라 카르헤 전투의 파르티아군을 따라 해 보려는 건데. 우리가 로마를 정복하면 어차피 카르헤 전투도 역사에서 삭제될 거니까 내가 오리지날이 되겠네. 그럼 이번 역사에서는 파르티안샷이 아니라 페니키안샷이 되겠구나. 현대 한국에도 빨치산이란 단어가 없어져 버릴 거고. 페튀산 정도로 대체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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