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 [100화] 피로 물든 트라시메노 호수 (1)
회의를 마친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은 곧바로 계획을 행동으로 옮겼다.
한니발은 장교들에게 숙영지를 철거하지 않고 가져갈 수 있는 보급품과 전리품만 챙겨 트라시메노 호수가 있는 남동쪽으로 행군할 준비를 하도록 명령했다.
그 사이 하스드루발은 하급장교 기스코를 불러 자신이 작성한 서신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오늘 밤 기병 열 기만 데리고 보노니아로 떠나라. 무슨 일이 있어도 사흘 안에 이 서신을 아버지께 전해야 한다.”
“맡겨만 주십시오. 꼭 하밀카르 총독님께 하스드루발 장군님의 뜻을 전하고 오겠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로마 원정대는 한니발이 에트루리아 약탈을 마치고 난 다음 날 아침에 드디어 트라시메노 호수를 향해 출발했다.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은 기껏 얻은 전리품 중 적지 않은 양을 버려두고 갈 수밖에 없어 안타까워했다.
“살다 살다 은 쟁반을 무슨 깨진 질그릇 마냥 버려두고 가게 될 줄은 미처 몰랐네.”
“뭐... 썩은 내 나는 늪지대를 건너다가 수레를 끌 당나귀가 천 마리나 죽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잖아? 지금 가져가는 것만으로도 전쟁이 끝나면 집 한 채는 살 수 있을 테니까 뒤 좀 그만 돌아봐. ”
장교들의 심정도 병사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기병대장 마하르발이 대열의 선두에서 말을 타고 행군하는 한니발에게 말했다.
“병사들이 전리품 일부를 버려두고 가는 게 못내 아쉬운 모양이군요. 저 정도면 용병을 삼천 명은 더 고용할 수 있을 테니 아깝긴 합니다.”
“아쉬워할 것 없네. 적진 한가운데에서는 두둑한 은화 주머니보다 밀가루 한 줌이 더 아쉬울 때도 많은 법이지. 저 정도 재물은 앞으로 전투에서 승리하면 얼마든지 또 얻을 수 있네.”
“맞는 말씀입니다. 로마의 일곱 언덕에 쌓여있는 재물을 전부 손에 넣으면 우리 병사 중 카르타고 시민권자는 모두 귀족이 되겠지요. 저희는 그날까지 한니발 장군님과 하스드루발 장군님만 믿고 따라가겠습니다.”
한니발은 여전히 로마를 직접 공격할 생각이 없었지만, 하스드루발을 제외한 다른 장교들에게는 그런 내색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는 행군 도중에도 사방에 척후병을 보내 적의 동향을 파악하고 지형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데 주력했다.
로마 원정대가 그날의 행군을 마치고 막 숙영지를 지었을 때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누미디아 궁기병 한 명이 지휘관 막사에 들어가 한니발에게 보고했다.
“한니발 장군님께 보고드립니다. 적장 플라미니우스가 기병 약 사천 기와 보병 약 이만 명을 이끌고 오늘 낮에 아레티움의 성문을 나섰습니다. 현재 우리 군의 후방에서 약 삼십 스타디온(약 5.4km) 정도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기병대장 아즈루바알이 한니발에게 말했다.
“전면전을 피하면서 후방에서 우리를 압박할 생각이군요. 우리 군대의 행군속도를 늦추면서 며칠 후에 도착할 지원군을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확실히 연륜이 느껴지는 지휘입니다. 기세 말고는 별로 볼 게 없었던 독재관 티베리우스보다 한 수 위인 장수인 건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 봤자 로마인이다. 지금까지의 움직임으로 보면 우직하고 견실하지만, 창의력이나 임기응변하고는 거리가 먼 인물인 게 확실하다. 티베리우스처럼 욕설 몇 마디로 꾀어낼 수는 없겠지만, 플라미니우스도 어차피 내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게 되겠지.”
한니발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부관 중 최고참인 마하르발에게 지시했다.
“이제 다시 로마인을 사냥할 시간이 됐네. 병사들을 일찍 재우고 자정쯤에 깨워서 야간행군을 할 걸세. 내일 아침이 되면 적장은 우리가 후방의 로마군을 따돌리려고 강행군을 하는 줄 알고 황급히 쫓아오겠지. 호숫가 근처의 언덕과 숲에 병사를 매복해 두었다가 강행군으로 지친 적을 기습할 계획이니 미리 준비를 해두게.”
그의 말에 막사 안에 있던 바르카 가문의 장교들이 모두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한니발을 바라보았다.
기병대장 마하르발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한니발에게 대답했다.
“두 장군님께서는 언제나 저희는 상상도 못 할 작전을 생각해 내시는군요! 바알의 은총(한니발)과 바알의 도움(하스드루발)이 저희와 함께하시니 적장은 이번 전투에서 살아나가기 어렵겠습니다!”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작전의 세부적인 내용은 하스드루발이 세워두었네. 그 녀석은 먼저 보병 천 명과 수레 몇 대를 끌고 트라시메노 호수로 출발했다네. 그곳에 도착하면 하스드루발과 상의해서 병력을 배치하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이 이번에는 어떤 기발한 작전을 세우셨을지 궁금하군요.”
* * *
한니발보다 먼저 트라시메노 호수의 북쪽 연안에 맞닿아있는 언덕에 도착한 하스드루발은 횃불을 밝히고 병사들을 독려하며 로마군을 공격할 병기를 설치했다.
“좀 더 빨리 움직여라! 아마 이틀 후면 적이 이 길을 지날 거다! 실전에 써먹기 전에 시험 발사 한두 번 정도는 해 봐야 할 거 아니냐!”
하스드루발이 트라시메노 호수 북쪽 언덕에 설치하고 있는 병기는 로마군의 야전용 병기 스콜피온을 모방해서 만든 소형 발리스타였다.
원 역사의 스콜피온은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는 공학발달 수준이 높은 로마만이 야전에서 원활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무기였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이 약 10년 전에 천재 공학자 아르키메데스를 영입하여 자금을 아끼지 않고 그의 연구를 지원한 덕분에 카르타고의 공학기술은 이미 로마를 앞지른 상태였다.
그는 그렇게 개발된 기술을 바르카 가문의 병사 중에서 머리가 좋은 자를 선별해 야전에서 스콜피온을 활용할 수 있도록 꾸준히 훈련시켜 왔다.
“10년 동안 공병을 훈련시킨 게 드디어 성과를 내겠구나! 아르키메데스 선생님이 로마군의 스콜피온보다 성능이 더 좋을 거라고 했으니 한번 믿어 봐야지!”
그가 병사들과 함께 스콜피온 100대를 설치하고 나서 해가 뜨기 시작할 때 한니발이 이끄는 군대가 트라시메노 호수 북쪽 언덕에 도착했다.
한니발이 작업을 마치고 쉬고 있는 하스드루발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하던 일은 다 끝난 모양이구나. 잠도 못 자고 작업을 지휘하느라 고생 많았다.”
“고생은 내가 아니라 병사들이 했지. 밤이 되니까 안개가 너무 심하게 끼어서 코앞도 잘 안 보이더라고. 그 와중에 복잡한 기계장비를 설치하느라 다들 녹초가 되어 버렸어.”
“고생한 보람이 있게 아르키메데스 그 노인네가 만든 물건이 잘 작동했으면 좋겠군. 뭐, 그동안 경험으로 미뤄볼 때는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지만.”
“안 그래도 지금 시험 발사를 해 보려던 참이었어. 형도 한 번 봐봐.”
하스드루발은 근처에 있던 병사 네 명에게 언덕 아래에 있는 호수 북쪽 연안의 좁은 길에 사슬갑옷을 걸쳐둔 굵은 통나무를 세워두도록 지시했다.
그는 통나무를 설치한 병사가 스콜피온의 사선에서 벗어나자 직접 화살을 장전한 후 과녁을 조준한 후 레버를 당겼다.
- 피유우우웅!
그가 레버를 당기자마자 창대처럼 굵은 화살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약 200m밖에 떨어져 있는 통나무를 향해 번개처럼 날아가 꽂혔다.
한니발은 그 광경을 보고 감탄을 자아냈다.
“저렇게 멀리 있는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추다니! 하스드루발. 내가 모르는 사이 사격연습을 많이 했구나.”
“내가 잘 쏜 게 아니라 스콜피온 성능이 좋아서 그런 거야. 원래 명중률이 높은 무기거든. 그리고 아직 놀라기는 일러.”
하스드루발은 다시 병사들을 시켜 자신이 맞춘 통나무를 언덕 위로 가져오게 했다.
두 형제의 눈에 굵직한 화살이 사슬갑옷을 관통해 통나무 깊숙이 박혀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한니발은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아르키메데스의 공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었으면 화살이 뚫고 나갔을 수도 있겠군. 이렇게 강력하면서도 아까 네가 스콜피온을 쏘는 모습을 보니 연사력도 슬링이나 활보다 그리 뒤처지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정말 대단한 물건이다. 나도 앞으로는 아르키메데스를 정신 나간 노인네가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 * *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이 신무기의 성능을 테스트하고 있을 때 집정관 플라미니우스의 막사에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대대장 한 명이 뛰어들어갔다.
대대장은 마음이 급한 나머지 경례도 하지 않고 집정관에게 허둥대며 플라미니우스에게 말했다.
“집정관님! 카르타고군이 사라졌습니다!”
“뭐라고! 그럴 리가 있나! 날이 밝은지 얼마나 됐다고 적군이 벌써 사라졌다는 말이냐!”
“카르타고군은 전리품도 버려두고 야밤에 숙영지를 떠나버렸습니다! 적군이 행군한 흔적이 남동쪽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전리품을 버리고 갔다고? 교활한 적장이 이미 우리가 포위 공격을 계획하고 있는 걸 눈치챈 모양이구나! 놈들은 이미 트라시메노 호수를 지나 페루시아 쪽으로 진격하고 있을 것이다! 당장 뒤쫓아 가야 한다! 대대장들에게 행군을 준비하라고 해라!”
플라미니우스는 행군 준비가 끝나자마자 숙영지를 철거하지도 않고 군대를 이끌고 강행군을 시작했다.
로마군은 아침부터 행군을 시작해 거의 20km에 가까운 거리를 한나절 만에 주파하여 석양이 질 때쯤에는 트라시메노 호수 북쪽 연안에 도착했다.
로마군 2만 5천 명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쳤지만, 플라미니우스는 숙영지를 차리지 않고 병사들에게 잠시 숨돌릴 틈만 준 다음 대대장들을 불러모아서 말했다.
“모두 고생스럽겠지만, 다시 행군을 시작하자. 만약 우리가 아리미눔에서 출발한 아군보다 늦게 페루시아에 도착하면 오만 대군을 이끄는 적장 한니발에게 각개격파 당하게 된다. 해가 뜨기 전에 트라시메노 호숫길을 지나야 하니 어서 늘어져 있는 병사들을 일으켜 세워라!”
로마군 대대장 열두 명은 즉시 집정관의 명령을 백인대장들에게 전달했다.
곧 맨바닥에 널브러져 쉬고 있던 로마 군단병들은 투덜거리면서 땅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몸을 힘겹게 일으켜 세웠다.
“빌어먹을 카르타고놈들! 대체 이게 웬 개고생이냐!”
“여기서 더 내려가면 보급받기도 어려울 텐데 그 멍청한 야만인들은 왜 자꾸 남쪽으로 내려가는 거야!”
다시 행군을 시작한 플라미니우스는 선발대 5천 명을 앞세우고 안개가 자욱한 호수의 북쪽 연안에 난 길로 들어섰다.
길이 좁았기 때문에 로마군은 뱀처럼 길게 늘어선 대열을 유지하며 행군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군 병사 중 두 명이 날씨가 춥지는 않았지만, 달빛조차 가려버리는 짙은 안개 속을 걸으며 두려움을 쫓기 위해 괜히 큰소리로 떠들어 댔다.
“저승의 뱃사공 카론이 배를 모는 아케론 강의 안개도 이 거 보다 짙지는 않겠다!”
“이십 큐빗(약 10m) 앞도 잘 안 보이는데 어떻게 행군을 하라는.... 어억!”
“아 깜짝이야! 왜 말하다말고 소리를 질러! 무섭게!”
갑작스러운 비명에 놀란 병사가 고개를 돌려 조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동료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러자 그의 눈에 가슴에 화살이 꽂힌 채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전우의 모습이 들어왔다.
병사는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 주변의 로마군 병사들에게 위험을 알렸다.
“적습이다! 적이 화살을 쏜다!”
적막한 호숫가에 처절한 외침이 울려 퍼지자마자 4천 명의 궁수가 쏜 화살이 희뿌연 안개 속으로 파고들어 로마군의 머리 위로 빗발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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