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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102화 (102/201)

[ 102 ] [101화] 피로 물든 트라시메노 호수 (2)

피유우우웅!

바르카 가문의 궁수들이 쏘아 올린 4천 개의 화살이 강철의 폭우가 되어 로마군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끄아아악!”

“으어어어억!”

개구리 울음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오던 고요했던 트라시메노 호수가 로마군의 처절한 비명으로 붉게 물들어갔다.

천 명이 넘는 로마 군단병이 갑작스러운 기습에 속절없이 쓰러졌지만,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하스드루발이 사전에 크레타 궁병과 누미디아 궁병의 장교들에게 적장 플라미니우스가 있을 확률이 높은 로마군 행군 대열의 선두에는 활을 쏘지 말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플라미니우스는 개선식을 치러본 경험이 있는 베테랑 장수답게 갑작스러운 화살 공격에 발 빠르게 대처했다.

“테스투도!”

그의 외침을 들은 로마군 병사들이 신속하게 집정관의 명령을 전군에 전달했다.

곧 모든 로마군 병사들이 거북이 등껍질 모양의 방패의 벽을 만들어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냈다.

로마의 백인대장들은 10kg짜리 커다란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후 팔을 떨며 버티는 병사들을 독려했다.

“조금만 더 참아라! 적이라고 화살을 무한대로 가지고 있지는 않을 거다! 적의 공격이 그치면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간다!”

하스드루발은 짙은 안개 때문에 언덕 아래에 있는 로마군 진형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화살에 맞은 병사들의 비명이 그치자 로마군이 테스투도 진형을 짰다는 것을 눈치채고 포병들에게 명령했다.

“스콜피온 발사!”

그의 말을 듣고 옆에 있던 병사가 뿔나팔을 한 번 불었다.

- 뿌우우우우우우웅

중후한 나팔소리가 짙은 안갯속으로 스며들자 100대의 스콜피오가 적을 향해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 피유우우우웅!

말뚝처럼 굵은 화살이 로마군의 상징인 커다란 방패 스큐툼을 깨부수고 그 안에 숨어있는 병사들의 가슴과 배에 박혔다.

“끄아아아아악!”

“스콜피온이다! 적군이 스콜피온으로 화살을 쏘아댄다!”

단단했던 귀갑진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자 껍질이 깨져서 죽어버린 거북이처럼 처참하게 죽은 로마 병사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러나 바르카 가문의 신무기는 멈추지 않고 적에게 매서운 공격을 퍼부었다.

- 피유우우우우웅!

번개처럼 날아온 화살 하나가 로마군 병사의 갑옷과 가슴을 관통해 바로 뒤에 있는 다른 병사의 어깨에 박혔다.

“크헉!”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는 어떻게든 혼란에 빠진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지옥 같은 전장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오오 유피테르 신이시여! 교활한 적장에게 완전히 속아 넘어갔구나! 일단 이 지옥에서 빨리 탈출해야 한다! 부서진 방패는 버려라! 적의 사격을 무시하고 전방을 향해 빠르게 이동한다! 어서 이 좁은 도로를 벗어나자!”

그때 하스드루발이 병사를 시켜 뿔나팔을 두 번 불게 해 아군에게 스콜피온의 사격이 멈췄음을 알렸다.

-뿌우우우우웅 뿌우우우우웅

한니발은 기다리던 동생의 신호가 들려오자 언덕 꼭대기에 매복해 있던 바르카 가문의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아군의 사격이 끝났다! 이제 만신창이가 된 적을 호수로 밀어 넣기만 하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모두 돌격하라!”

사령관의 명령에 4만 명의 보병과 1만 기의 기병이 고막을 찢을 듯한 함성을 지르며 언덕 아래에서 아직 혼란에 빠진 적을 향해 돌진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그렇지 않아도 활과 스콜피온의 공격을 받고 혼이 나가 있던 로마군 병사들이 북쪽 언덕에서 거대한 산사태처럼 들이닥치는 한니발의 군대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로마군 대열의 중간 부분을 공격하도록 배치된 히스파니아 중장기병 4천 기가 언덕이 많은 곳에서는 사용하기 힘든 랜스 대신 검을 휘두르며 마갑을 두른 말을 적에게 충돌시켰다.

“크허어어억!”

팔을 뻗으면 앞사람의 어깨에 손이 닿을 정도로 오밀조밀하게 서 있던 로마군 병사들은 굴러 오는 볼링공에 부딪힌 핀처럼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그에 뒤질세라 북아프리카 중장보병 1만 5천 명이 카르타고의 상징인 바알의 손바닥이 그려진 커다란 원형 방패를 들어 올리고 그 위로 팔카타를 내질러 적의 목을 찌르며 묵묵히 전진했다.

- 철걱 철걱 철걱 철걱

북아프리카 중장보병들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경번갑의 철갑이 서로 부딪치며 규칙적인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대열의 최후미에 배치된 로마군 병사들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압박해오는 북아프리카 중장보병의 기세에 밀려 뒷걸음질치다 하나둘 호수 속에 빠져버렸다.

“으악! 밀지 마! 물에 빠져버린다고!”

호수에 빠져버린 로마 병사들은 헤엄을 쳐서 도망쳐 보려 했지만 20kg에 가까운 사슬갑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곧 검은 호수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아군의 기세가 너무나 거셌기 때문에 하스드루발이 적장 플라미니우스가 혹시 살아서 트라시메노 호수를 나가지 못할까 봐 걱정해야 하는 지경이었다.

‘역사서에서 트라시메노 전투를 접했을 때는 로마군의 저항이 처절했다고 읽었었는데, 적어도 로마군 대열 최후미와 중간 부분에서는 아군이 너무 압도적이다. 일부러 적 대열의 앞부분에는 조직력이 약한 갈리아 병사만 배치했는데 설마 허무하게 죽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개선식까지 치렀던 장군인데 그 정도는 큰 어려움 없이 뚫고 나갈 거야.’

그러나 하스드루발의 예상과 달리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는 대열의 선두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를 원수로 여기는 인수브레스족 출신 전사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그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플라미니우스를 죽여라! 우리의 고향을 불태운 원수를 살려 보내지 마라!”

철제 미늘갑옷과 장검을 든 갈리아의 귀족 전사들은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증오에 이성을 잃고 집정관을 보호하는 군단병들의 방패 위로 미친 듯이 무기를 휘둘렀다.

- 터엉! 터엉! 터엉!

장검과 방패가 부딪치면서 둔탁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벌써 거의 한 시간 째 무거운 방패를 들고 있다 보니 팔에 힘이 빠진 병사 한 명이 그만 방패를 조금 밑으로 내리고 말자 바로 갈리아인의 장검이 그 사이를 찌르고 들어왔다.

“커억!”

목을 관통당한 병사가 그 자리에 쓰러지면서 흘린 피가 바로 옆에 있던 집정관의 망토에 조금 묻었다.

그러나 그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플라미니우스는 인수브레스족과 여러 번 전투를 치른 경험을 살려 조금씩 활로를 뚫어나갔다.

“선두 대열의 피해는 다행히 그리 크지 않다! 방패를 들어 올리고 전방의 포위망을 밀어붙여라!”

집정관의 지휘 아래 선두의 로마 군단병들이 조금씩 한 덩이로 뭉쳐 최후의 중앙돌파를 시도했다.

인수브레스족 출신 병사들은 로마군의 방패벽을 뚫기 위해 끊임없이 덤벼들었지만, 결국 그들의 체력이 떨어졌을 때 포위망에 구멍을 내고 말았다.

플라미니우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간신히 찾아낸 활로를 향해 병사들을 몰아갔다.

그는 결국 원 역사와는 달리 마지막으로 남은 병사 1천 명과 함께 간신히 트라시메노 호수에서 살아나갈 수 있었다.

* * *

전투라기보다는 학살에 더 가까웠던 트라시메노 전투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집정관 플라미니우스가 로마군 2만 5천 명 중 1만 4천 명이 전사하고 1만 명은 한니발의 군대에게 포로로 잡혔다.

반면 카르타고군의 피해는 채 1천 명이 되지 않았고 그 마저도 대부분 금방 보충할 수 있는 갈리아인 병사였다.

원 역사의 한니발은 트라시메노 전투에서 승리한 후 죽은 로마군 병사들의 시체에서 로마의 사슬갑옷인 로리카 하마타와 투구를 벗겨 무장이 부실한 자신의 병사들에게 입혔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지금은 카르타고군이 입고 있는 경번갑이 로마군의 사슬갑옷보다 더 튼튼했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한니발은 원 역사와는 다른 이유로 기병대장 마하르발에게 로마군 전사자들의 갑옷을 벗겨 내도록 지시했다.

“마하르발. 로마군의 갑옷은 우리에게는 큰 쓸모가 없지만, 저대로 방치하면 다른 로마군 병사들이 저 갑옷을 입고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을 걸세. 적 전사자들의 갑옷을 모두 벗겨서 나중에 아버지께 보내게. 우리에겐 쓸모가 없어도 갈리아인 병사들은 꽤 요긴하게 쓸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마침 이번 전투로 로마군 수송대가 데리고 있던 당나귀와 말을 많이 얻었습니다. 앞으로는 좀 더 여유 있게 보급품을 나를 수 있을 겁니다.”

“그것참 잘됐군! 그래, 이번에 얻는 말과 당나귀가 전부 몇 마리나 되지?”

“말 천육백 마리에 당나귀 삼천오백 마리를 얻었습니다. 주인을 잃고 도망간 녀석들도 있으니 주변을 수색하면 좀 더 많은 가축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 작업은 아즈루바알에게 맡기고 자네는 좀 쉬었다가 하스드루발과 함께 기병대를 이끌고 페루시아 북쪽 숲으로 가게. 그곳에 매복해 았다 보면 집정관 세르빌리우스의 부대를 잡아낼 수 있을 걸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스드루발 장군님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군요. 이렇게 큰 승리를 거뒀으니 병사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시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기병대장 마하르발의 말에 한니발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마 그 녀석은 지금 당장은 그럴 기분이 아닐 걸세. 잠시 후면 웃는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날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도록 하세나.”

한니발과 기병대장 마하르발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하스드루발은 전투가 끝나고 벌써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아직 호수 북쪽의 언덕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그는 한니발의 말대로 로마군 전사자의 시신으로 가득한 호수 연안을 울적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원 역사보다 살아나간 로마군은 적고 내가 바라던 데로 플라미니우스는 살아나갔으니 분명 기뻐해야 할 일인데... 저 끔찍한 광경을 보고 있자니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구나.”

하스드루발이 처음 전장에 섰던 12년 전 아야몬테에서 느꼈던 복잡한 감정이 오랜만에 그의 가슴을 휘저어 놓았다.

그러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의 그에게는 너무 오래 감상에 잠겨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플라미니우스의 군대가 궤멸한 줄 모르는 집정관 세르빌리우스의 군대가 시시각각 트리시메노 호수에서 그리 멀지 않은 페루시아로 다가오고 있었다.

평민파 집정관인 플라미니우스가 이 정도의 대패를 겪고도 로마 원로원에서 정치적 입지를 상실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귀족파 집정관인 세르빌리우스에게는 더 큰 패배를 안겨 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어쩌겠나. 내가 싸우지 않으면 몇십 년 뒤에는 저기 죽어있는 로마인보다 열 배는 많은 동포가 고향이 불타는 모습을 보고 죽게 될 텐데. 최대한 빨리 로마를 정복하는 게 가장 피를 적게 흘리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스드루발은 피로 물든 트라시메노 호수를 한 번 더 바라보고 언덕을 내려가 형 한니발에게로 돌아갔다.

한니발은 언덕을 내려온 동생의 어깨를 오른손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기분은 좀 풀렸어?”

“응. 이제 괜찮아.”

“네 덕분에 내 예상보다도 훨씬 큰 승리를 거뒀다. 정말 잘해줬어. 그렇지만 혼자 모든 걸 다 짊어지려고 하지는 마라. 가족 좋다는 게 뭐겠니?”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에의 격려에 말 대신 따듯한 미소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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