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 [102화] 매복! 또 매복!
하스드루발은 트라시메노 호수에서 큰 승리를 거둔 후에도 쉴 틈이 없었다.
그는 기병대장 마하르발과 함께 육포와 이스트 없이 구운 비스킷처럼 딱딱한 빵만으로 아침 겸 점심을 때운 후 발 빠르게 움직였다.
“마하르발, 이제 출발하세. 자네가 이베리아족 중기병 사천 기를 지휘하고 내가 누미디아 궁기병 사천 기를 맡는 게 좋겠네.”
“알겠습니다. 제 기병들에게도 화살통을 챙기도록 지시하겠습니다. 한니발 장군님께서 트라시메노 호수에서 전리품을 모두 챙기신 후 하스드루발 장군님께 보낼 보급품을 준비하시려면 며칠 걸릴 테니 말입니다.”
“괜찮은 생각이군. 그럼 어서 출발하세. 적이 우리가 매복할 장소를 지나쳐 버리면 골치 아파질 걸세.”
하스드루발은 대화를 마친 후 기병대장 마하르발과 함께 플라미니아 가도를 타고 남하하는 집정관 세르빌리우스의 군대를 요격하기 위해 8천 기의 기병을 이끌고 북동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하루하고도 반나절 동안 말을 달린 끝에 하스드루발과 마하르발은 트라시메노 호수에서 북동쪽으로 약 100km 떨어져 있는 도시 칼레스(Cales) 근처에 도착했다.
칼레스는 고대 기준으로도 작은 도시였지만, 플라미니아 가도 한가운데 위치한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스드르루발은 칼레스에서 남쪽으로 10km쯤 떨어져 있는 곳에서 말을 멈추고 마하르발에게 말했다.
“이곳은 도로 바로 양옆에 숲이 우거져 있어서 병사를 숨기기에 딱 좋은 곳이군. 자네가 길 오른쪽의 숲에서 매복해 있다가 적이 지나가면 먼저 덮치게. 나는 그동안 누미디아 궁기병들과 함께 혼란에 빠진 적에게 화살을 쏘겠네.”
“알겠습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다만 적장 세르빌리우스의 군대는 총 이만 오천 명 정도 된다고 들었는데 기습을 한다고는 해도 우리 기병 팔천 기가 당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니발 형에게 설명 못 들었나? 아마 적은 적장 플라미니우스의 지원 요청을 받고 일단 기병부터 먼저 출발시켰을 걸세.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우리 기병이 두 배는 많을 것 같은데?”
“한니발 장군님께서는 항상 명령만 전달해 주시고 작전에 대해 자세한 정보는 잘 주시지 않습니다. 뭐... 그래도 한니발 장군님의 지시사항만 잘 따르면 항상 대승을 거두니까 전혀 불만 없습니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지요.”
“형이 과묵한 편이라 그런 거지 자네를 홀대하는 건 아닐걸세. 너무 섭섭해하지 말게.”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숲 속에 말과 병사를 숨기시지요. 적의 척후병이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알겠네. 식사할 때 불을 피우지 말고 말린 음식만 먹는 걸 잊지 말게.”
대화를 마치고 두 사람은 각자 4천 기의 기병을 이끌고 플라미니아 가도 왼편과 오른편에 있는 울창한 숲에 매복했다.
하스드루발과 마하르발이 몸을 숨기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칼레스의 남문이 열리더니 로마 기병대 4천 기가 쏟아져 나와 플라미니아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마하르발은 한니발과 하스드루발의 말대로 로마의 집정관 세르빌리우스가 먼저 보낸 기병대가 먼발치에서 달려오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두 장군님은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라도 가지고 계신 걸까? 두 분 다 나보다 어리신데, 이런 통찰력을 가지신 걸 보면 카르타고의 신들께서 바르카 가문을 축복하고 계신 게 분명하다.”
- 두두두두두두두두두
로마 기병 4천 기는 눈앞에 강력한 적이 숨어있는 것도 모르고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내며 4열 종대로 달려왔다.
마하르발은 적 기병대가 자신의 눈앞에 무방비하게 대열의 허리 부분을 드러냈을 때 허리춤에서 팔카타를 뽑아들고 사자의 울음소리와 같은 거친 목소리로 휘하의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돌격하라! 쐐기진형으로 돌진해 적을 분쇄하라!”
마하르발이 명령이 떨어지자 이베리아족 중기병 4천 기가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로마 기병대의 허리를 향해 맹렬하게 돌격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던 로마 기병대의 대열은 갑작스럽게 측면에서 들이닥치는 이베리아족 중기병의 공격에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으아악! 적습이다!”
“적이라고? 여긴 로마연합의 영토 한가운데라고!”
로마 기병들은 거대한 삼각형 모양의 쐐기 진형에 대열의 허리를 찔리는 바람에 부러진 창대처럼 두 동강 나고 말았다.
후방에 남겨져 버린 로마 기병들은 선두에서 말을 달리고 있던 지휘관과 단절되어 버렸고 로마 기병대의 지휘체계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마하르발과 이베리아족 중기병들은 말 위에서도 땅에서처럼 검을 휘두르며 적을 도륙했다.
말이 기병이지 사실상 하마기병(말을 타고 다니다가 적과 마주치면 말에서 내려 싸우는 기병)이나 다름없었던 세르빌리우스의 로마 기병들은 미처 말에서 내릴 틈도 없이 이베리아족 중기병이 휘두르는 외날검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후방에 남겨진 로마 기병대의 백인대장 중 한 명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여기서 적이 매복해 있다는 건 이미 플라미니우스 집정관님의 군대가 적에게 궤멸당했다는 뜻이다!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서 칼레스로 도망가라! 세르빌리우스 집정관님께 반드시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백인대장의 말을 듣고 로마 기병 수십 기가 말머리를 돌려 칼레스로 도망가려는 순간 하스드루발과 누미디아 궁기병 4천 기가 숲에서 튀어나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도망치던 로마 기병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동료들에게 소리쳤다.
“적군이 더 있다! 모두 도로에서 벗어나 숲으로 숨어라!”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그들을 곱게 보내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적장 세르빌리우스에게 우리의 정보가 흘러들어 가면 안 된다!”
누미디아 궁기병 4천 기는 선두에서 돌진하는 장군을 따라 적을 추격했다.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가던 로마 기병들은 지중해 최고의 기동력을 자랑하는 누미디아 기병을 뿌리칠 수 없었다.
- 쐐애애애액!
하스드루발이 힘껏 당겼던 각궁의 활시위를 놓자 섬광처럼 날아간 화살이 도망치는 로마 기병의 등에 박혔다.
“크허어억!”
누미디아 궁기병들도 그를 따라 화살을 쏘아댔고 곧 로마 기병 4천 기는 한 명도 남김없이 말에서 떨어져 플라미니아 가도를 붉은 피로 물들였다.
바르카 가문의 기병들은 압도적인 승리에 고무되어 우레같은 함성을 질러댔다.
“우와아아아아아!”
“또 이겼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만세!”
하스드루발은 전투가 끝나고 가장 먼저 전신에 적의 피와 자신의 땀을 뒤집어쓴 마하르발에게 다가가 말했다.
“마하르발! 정말 대단한 활약이었네! 아버지께서는 우리 형제들을 늘 사자의 자손이라고 부르시는데, 자네야말로 사자처럼 용맹하군!”
“과찬이십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이야말로 겁먹은 토끼 떼처럼 사방으로 도망치는 패잔병들을 전부 잡아내지 않으셨습니까? 한 명이라도 놓쳤으면 적장에게 우리의 위치가 노출되었을 겁니다.”
“적을 전부 물리치긴 했지만, 대로 한복판에서 이렇게 소란을 피워댔으니 빠르든 늦든 적장 세르빌리우스에게는 우리가 트리시메노 호수에서 로마군을 궤멸시켰다는 소식이 들어갈 걸세. 그러니 그전에 아리미눔에서 출발한 로마 군단이 다시 단단한 성벽 안으로 숨어버리기 전에 공격해야지. 자네는 이번 전투에서 전리품으로 얻은 말을 데리고 다시 본대로 복귀하게. 나는 아버지께서 보내실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적장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겠네.”
“알겠습니다. 제 휘하의 병사들이 가져온 화살통을 넘겨 드리겠습니다. 바르카 가문의 수호신 멜카르트께서 하스드루발 장군님을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하스드루발은 마하르발에게서 화살통을 인수하고 로마군 전사자의 몸에 박혀있는 화살 중에서 쓸만한 것을 모았다.
그는 화살보충 작업을 마치고 누미디아 궁기병들에게 말했다.
“큰 승리를 거둔 너희가 정말 자랑스럽다. 하지만 공을 치하하는 것은 잠시 뒤로 미루겠다. 적 기병을 잡아냈으니 이제 로마의 집정관 세르빌리우스가 직접 지휘하는 보병 이만 명을 물리칠 차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는 칼레스에서 멀어질 때까지 편안한 도로가 아니라 숲 속을 통과해야 한다. 이번 전투가 끝나고 경치 좋은 이탈리아 동부 해안에 도착하면 한동안 휴가를 줄 테니 모두 조금만 더 힘내라!”
‘휴가’라는 단어는 현대와 마찬가지로 기원전 3세기 군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우와아아아! 드디어 휴가다!”
“신난다! 오랜만에 해변에서 일광욕할 수 있겠다!”
누미디아 기병들은 열광적으로 환호성을 내지르며 숲속으로 말을 달리는 하스드루발의 뒤를 따랐다.
* * *
플라미니우스와 함께 선출된 로마의 집정관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는 대단히 신중한 인물이었다.
그는 하스드루발의 기병대가 북진하고 있을 때도 아직 동료 집정관 플라미니우스가 트라시메노 호수에서 큰 패배를 당하고 로마군 2개 군단이 증발하고 자신의 기병대가 전멸한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며칠 전 앞서 보낸 기병 4천 기와 플라미니우스가 전령을 보내오지 않자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내 분명 기병대장에게 플라미니우스 집정관님을 만나고 나서 바로 전령을 보내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여지껏 아무 소식도 없다니? 남쪽에 척후병을 보내 사정을 알아봐야겠군.”
그는 남쪽으로 행군하는 속도를 늦추면서 주변 지역에 척후병을 풀어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기병을 플라미니우스에게 보냈기 때문에 경보병인 벨리테스에게 정찰을 의지할 수밖에 없어 정보 수집 속도가 평소보다 느릴 수밖에 없었다.
집정관 세르빌리우스는 정찰을 보낸 척후병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초조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신의 막사를 지키는 병사를 불러 지시했다.
“당장 풀라리를 불러라! 점이라도 쳐봐야지 불안해서 살 수가 없다!”
풀라리는 고대 로마의 점술가 집단으로 로마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가 꽤 높은 자들이었다.
고대 로마의 장군들은 전투를 치르기 직전에 풀라리에게 새점을 치게 하는 것을 관례로 여겨왔는데, 세르빌리우스는 꼭 전투가 예정되어있지 않아도 항상 풀라리를 곁에 두며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새점을 쳤다.
병사에게 불려 온 풀라리가 머리를 조아리며 세르빌리우스에게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세르빌리우스 집정관님.”
“어서 오게. 벌써 열흘도 전에 아군을 지원하려고 내 휘하의 기병을 전부 아레티움에 보냈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네. 어서 새점을 쳐 길흉을 알아보게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풀라리는 병사를 시켜 닭 한 마리를 막사로 데려오게 한 후 기도문을 읊조린 다음 모이를 닭의 앞에 뿌렸다.
그러나 닭은 모이를 한 알도 쪼아먹지 않았다.
풀라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세르빌리우스에게 말했다.
“사흘이나 굶긴 닭이 모이를 먹지 않다니! 대단히 불길한 징조입니다! 부디 군대를 움직이실 때 신중을 기하시길 바랍니다.”
그때 정찰을 나갔던 척후병이 온몸에 땀이 젖은 채로 지휘관 막사에 들어와 세르빌리우스에게 경례를 한 뒤 말했다.
“셀르빌리우스 집정관님께 보고드립니다! 정찰 도중 카레스에서 남쪽으로 약 오십오 스타디온(약 10km) 떨어진 곳에서 아군 기병대 전사자의 유해 약 4천구를 발견했습니다! 인근 주민의 말에 의하면 가도 주변 숲 속에 매복해 있던 카르타고군의 기습을 받았다고 합니다!”
척후병의 보고에 세르빌리우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오오! 유피테르시여! 불길한 점괘는 꼭 정확하게 들어맞는구나! 카레스 주변에서 적군이 활개친다는 건 아레티움에 주둔하고 있던 아군이 전멸했다는 말이지 않나! 당장 대대장들을 내 막사로 불러라! 군대를 돌려 아리미눔으로 퇴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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