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 ] [103화] 알보병 vs 땡기병 (1)
하스드루발은 칼레스의 초병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누미디아 궁기병 4천 기와 함께 울창한 숲을 지났다.
그는 한참 동안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도보로 나무 사이를 지나다 등 뒤에 있는 칼레스의 성벽에서 적당히 멀어진 후 휘하의 기병들에게 소리쳤다.
“이제 길 위를 달려도 칼레스 성의 초병에게 발각되지 않을 거다! 최대한 빨리 플라미니아 가도를 달려 적장 세르빌리우스의 군대를 따라잡는다!”
하스드루발은 말을 마치자마자 널찍한 도로로 달려나갔다.
누미디아 궁기병 4천 기도 그의 뒤를 따라 말머리를 돌렸다.
- 두두두두두두두두두
철로 만든 단단한 편자를 단 말발굽 1만 6천 개가 로마인들이 길에 깔아둔 큼직한 돌을 두들겨대며 요란한 소리를 내자 가도 양옆의 숲에서 놀란 새들이 날아올랐다.
로마 원정대의 별동대 4천 기는 해가 지면 도로 근처의 숲에서 노숙하고 해가 뜨자마자 말을 달리기를 반복하며 이틀 만에 숲 지대를 벗어나 아펜니노 산맥 동쪽 지역에 발을 들였다.
한참을 더 달리자, 이탈리아를 세로로 가로지르는 하스드루발의 눈에 먼발치에 메타우루스 강이 들어왔다.
그는 말을 달리면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며 휘하의 기병들에게 말했다.
“잠시 가도를 벗어나 강가에서 쉬는 동안 말에게 풀과 물을 먹인다!”
벌써 몇 시간째 쉬지 않고 달리던 누미디아 궁기병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하스드루발의 뒤를 따라 강변으로 향했다.
그는 걸신들린 듯이 강물을 마신 다음 풀을 뜯는 자신의 거대한 흑마 옆에 앉아 메타우루스 강을 응시했다.
인간끼리의 전쟁 따위 관심 없다는 듯이 느긋하게 흘러가는 큰 강은 야속하리만치 평온했다.
하스드루발은 평화로운 광경과는 대조적인 굳은 표정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드디어 메타우루스 강에 도착했구나. 원 역사보다 십 년이나 빨리 말이야.”
원 역사의 2차 포에니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는 한니발이 포위섬멸전의 역사를 새로 쓴 칸나에 전투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한니발에게 승리한 자마 전투이다.
그러나 16년 동안이나 진행된 오랜 전쟁에서 한니발과 카르타고의 패배를 결정지은 가장 중요한 전투는 다름 아닌 기원전 207년에 벌어진 메타우루스 강 전투였다.
원 역사의 하스드루발은 히스파니아를 침략한 스키피오의 아버지 푸블리우스와 큰아버지 그나이우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6년에 걸쳐 격전을 벌인 끝에 두 로마의 장군과 전직 집정관 티베리우스까지 사살하고 적군을 궤멸시켰다.
하지만 그는 결국 푸블리우스의 아들 스키피오에게 히스파니아를 뺏기고 마지막으로 남은 정예병력 5만 명과 함께 보급품을 가지고 한니발을 지원하기 위해 형처럼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에 들어섰다.
그 지원군이 한니발에게 무사히 도달했다면 로마 점령도 꿈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 역사의 하스드루발은 불과 말을 타면 며칠이면 한니발에게 도착할 수 있는 거리만을 남겨두고 이곳 메타우루스 강변에서 로마군 집정관 두 명이 지휘하는 군대의 협공을 받고 장렬하게 전사하고 만다.
‘원 역사의 내가 목이 잘려 죽은 불길한 장소에서 전투를 치르게 됐구나. 그것도 겨우 4천 기의 기병만 이끌고 아버지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로마군 2만 명을 며칠이나 상대해야 할 형편이지. 지금까지의 치른 세 전투는 전부 매복을 이용해 쉽게 이겼지만, 이번 전투는 개활지에서 벌어진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메타우루스 강은 이번 역사에서도 내 무덤이 되고 말 거야.’
하스드루발이 고민에 빠져있는 사이 그의 애마 페라리가 봄비를 맞고 돋아난 푸른 풀을 배불리 뜯어 먹고 원기를 회복한 뒤 그에게 다가왔다.
- 푸르르릉
덩치 큰 흑마가 다리를 쭉 펴고 앉아있는 그의 가슴에 콧김을 내뿜으며 머리를 파묻었다.
하스드루발은 화들짝 놀라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페라리에게 소리쳤다.
“야 페라리! 두정갑에 콧물 묻었잖아! 이거 닦아내는 게 얼마나 귀찮은 줄 알아?”
그러나 그의 짜증은 말의 커다랗고 맑은 눈망울을 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봄 햇살에 눈 녹듯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하스드루발은 애마의 윤기가 흐르는 검은 갈기를 오른손으로 쓰다듬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주인 잘못 만나서 너도 고생이다. 어디 대농장이나 경영하는 귀족에게 팔려갔으면 전장을 달리는 대신 매일 같이 마구간에서 이런 풀 말고 보리를 먹으면서 편하게 지냈을 텐데.”
애마의 애교 덕분에 하스드루발은 가슴 속에 눌어붙어 있던 고민을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라리 너도 벌써 열두 살이구나. 사람으로 치면 이십 대 후반 정도 될 나이인데 아직 장가도 못 보내줬네. 네가 스무 살 되기 전까지는 이번 전쟁을 끝내보자! 나도 너 닮은 망아지가 보고 싶거든.”
하스드루발은 다시 페라리의 등에 올라 누미디아 궁기병들을 이끌고 적장 세르빌리우스의 군대를 향해 말을 달렸다.
* * *
한편 집정관 세르빌리우스는 정찰을 보냈던 척후병의 보고를 통해 하스드루발의 기병대가 자신의 군대를 추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즉시 자신의 막사에 대대장 열두 명을 호출해 군사회의를 열었다.
로마군 대대장들이 분한 표정으로 집정관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적장이 우리를 아주 얕잡아보고 있는 모양입니다! 우리 군의 기병이 전멸했다고는 해도 로마 군단병 2만 명을 고작 기병 4천 기로 쫓아오고 있다니 말입니다!”
“세르빌리우스 집정관님. 적이 우리 군의 오분의 일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안 이상 일단 퇴각을 멈추고 북아프리카에서 온 건방진 야만인들에게 투창 맛을 보여주시지요!”
대대장들의 호기로운 외침은 그저 젊은 혈기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었다.
로마인들은 지난 수백 년 동안 누미디아인과 더불어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기마민족인 갈리아인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여왔다.
그런 그들에게 보병으로 기병을 상대하는 전술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중한 지휘관인 세르빌리우스는 하스드루발의 기병대가 그동안 숱하게 상대해온 갈리아인 기병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적이 우리가 상대해온 갈리아인 기병이라면 자네들 말대로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작년에 트레비아 강에서 간신히 생환하신 티베리우스 전직 집정관님께서 말씀하시길 카르타고 기병대는 길이가 십 큐빗(약 5m)이 넘는 창을 들고 돌진하고 말을 탄 채로 활을 쏘아댔다고 하더군. 적 기병대의 숫자가 적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방심하면 안 된다.”
열두 명의 대대장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평민 출신 대대장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안 그래도 날파리처럼 재빠른 기병들이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쏜다는 말씀입니까? 그런 적을 전장에서 만나면 지옥이 따로 없겠군요. 테스투도 진형을 유지하며 날아오는 화살을 막아내도 적이 있는 곳까지 다가갈 수 없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겁니다.”
“자네 말대로네. 이번에 다가오고 있는 적 기병 4천 기도 궁기병이라고 하더군. 그래서 요 며칠간 말을 탄 채로 활을 쏘는 적을 상대하는 방법을 여러모로 궁리하다 좋은 작전을 생각해냈네.”
“그 작전 내용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적의 궁기병은 말을 탄 채로 자유자재로 활을 다루긴 하지만, 흔들리는 말 등위에서 활을 쏘느라 사정거리는 길어야 사십 큐빗(약 20m)정도라고 하네. 적도 우리를 공격하려면 상당히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해 와야 한다는 소리지. 그렇다면 우리는 메타우루스 강과 그 지류가 삼면을 둘러싼 곳에 진을 치고 적이 공격해 올 경로에 미리 마름쇠를 깔아두고 적을 기다리면 되지 않겠나?”
“그렇군요! 함정에 걸린 적을 중장보병으로 압박하면서 벨리테스가 투창을 던지면 손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세르빌리우스가 생각해낸 전술은 보병이 궁기병에게 대응할 방법 중에서는 상책이라 할만한 것이었다.
갑옷을 입지 않아 기동력이 빠른 적 궁기병을 말의 움직임을 제한할 수 있는 지형으로 유인하고 함정에 빠트려 화살을 쉽게 막아낼 수 있는 중장보병이나 중기병으로 압박하여 섬멸하는 전술은 화약 무기가 발달하기 전까지 많은 장군이 애용한 효율적인 전술이기 때문이다.
집정관의 말을 듣자 귀족 출신의 젊은 로마군 대대장들도 환하게 웃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역시 지장(智將)으로 유명하신 세르빌리우스 집정관님 이십니다! 겁 없이 달랑 튜닉 한 장 입고 전장에 나서는 누미디아인들이 이번에야말로 기겁하겠군요!”
“적의 화살이 고작 사십 큐빗(약 20m)정도만 날아온다면 벨리테스들의 재블린하고 사정거리가 비슷할 겁니다. 이번 전쟁에서 우리 군단이 처음으로 조국 로마에 승전보를 전하겠군요!”
“아직 속단하기는 이르다. 적군의 장교 중에 꽤 교활한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카르타고군이 우리의 계획을 눈치챈 다면 이번 작전은 십중팔구 실패하고 말 거다. 모두 마름쇠를 깔 때는 적의 눈을 피해 밤에만 작업하도록 하고 병사들이 인근 주민과 불가피하게 이야기를 해야 할 때에도 입단속을 잘 시키도록 해라.”
세르빌리우스는 그 후에도 대대장들에게 작전의 세부사항을 꼼꼼하게 설명한 후 회의를 마치고 곧바로 하스드루발을 함정에 빠트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 *
하스드루발과 누미디아 궁기병 4천 기는 칼레스 인근에서 출발한 지 사흘 만에 집정관 세르빌리우스의 군대를 따라잡았다.
반유목민인 누미디아인 중에서도 가장 눈이 좋은 병사 한 명이 한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1km도 더 떨어져 있는 로마군의 진영을 보면서 하스드루발에게 말했다.
“하스드루발 장군님! 로마군이 강가에서 물을 긷고 있습니다! 적군이 방심하고 있을 때 서둘러 공격해야 합니다!”
그러자 다른 병사와 장교들이 입을 모아 당장 적을 공격하자며 아우성쳤다.
“장군님! 어서 공격 명령을 내려주십오! 이제 아리미눔 까지는 겨우 걸어서 사흘 거리입니다! 하밀카르 총독님의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려면 로마놈들을 약 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적 병사들이 방패 대신 물통을 들고 있을 때 어서 공격하시지요!”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너무 무방비한 로마군의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와 로마 역사가 리비우스가 묘사한 로마의 집정관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는 다혈질이 많은 로마인답지 않게 굉장히 신중한 성품의 지휘관이었다. 그런데 주변 경계도 하지 않고 병사들에게 물을 긷게 한다고? 그 기록이 정확하다면 지금쯤이면 내가 기병을 데리고 자기를 추격하고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는데? 함정의 구린내가 진하게 풍겨오는군.’
그는 병사들의 요청을 뿌리치고 전군에 명령했다.
“적장 세르빌리우스는 신중하다 못해 소심한 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적군이 저렇게 무방비한 모습을 보이는 건 분명 미리 함정을 파놓았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우리가 그 사실을 눈치챘다는 사실을 적에게 미리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전군 적진으로 전속력으로 달려가다 일 스타디온(약 180m) 떨어져 있는 곳에서 멈추도록 한다.”
하스드루발은 말을 마친 후, 누미디아 궁기병들과 함께 적진을 향해 바람같이 말을 달렸다.
───────────────